신안 해저문화재 특별전 1977년10월8일-12월20일
1977년은 조용한 한 해였다. 유신 반대도 이 해에는 그리 심하지 않아 대학가도 평온했다. 단, 미국 워싱턴에서 박동선 게이트로 인해 미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가 열리고 있었으나 그런 소식은 국내까지 자세히 잘 들어오지 않아 이를 제외하고 국내의 빅뉴스라고 하면 그해 11월 11일 밤에 이리역을 통째로 날려버린 폭발사고가 있었을 정도이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열차에 실려있던 40톤가량의 고성능폭약이 부주의하게 켜놓은 촛불로 인해 폭발한 것인데 이때 이리역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면서 역은 지름 30m의 거대한 웅덩이로 변했다. 이로 인해 많은 인명 피해가 났으며 그중에는 주변 극장에서 공연하던 인기가수 하춘화 씨도 큰 부상을 당해 무명 코미디언이었던 이주일 씨가 그녀를 들쳐업고 병원으로 내달렸다는 일화가 생기기도 했다.
이런 대폭발이 있으리라고 아무도 상상치도 못했던 20여 일 전인 10월 17일 오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아주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전세계 고미술 전문가 특히 도자기 전문가들이 초미의 관심사를 가지고 주시해오던 어떤 한 발굴에 관한 특별전이 개막되고 있었던 것이다.
오후 5시에 맞춰 열린 개막식에는 200여 명의 국내외 귀빈들이 초대됐고 그 중에서 이병도 학술원장, 민복기 대법원장, 김성진 문공부장관, 육인수 국회문공위원장 등이 앞으로 나와 개막 테이프를 끊었다. 그런데 이들과 나란히 이국의 노신사 한 사람도 테이프 커팅 줄에 서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개막에 외국인이 커팅 자리에 선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는데 첫 스타트를 끊은 그는 미국의 동양도자기 학자 존 포프(John A. Pope) 박사로 워싱턴 프리어갤러리 전임관장이자 특히 원나라 도자기에 해박한 전문가였다.
그는 예일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중국 기아를 구제하는 국제기구에 들어가 중국에 가서 일하면서 나중에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동양도자기파트 차석 큐레이터가 되는 알랜 프리스트를 만나 중국 도자기에 눈을 뜨게 됐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 하버드에서 역사와 미술사를 공부한 뒤에 워싱턴 프리어갤러리에 들어갔는데 그의 전공은 원나라 시대의 청화백자였다.
그 자리에는 포프 박사 외에도 뒤쪽으로 미국, 영국, 일본, 중국(이때 중국의 타이페이의 중화민국을 가리킨다), 홍콩에서 온 20여 명의 쟁쟁한 학자들이 죽 늘어서 이 개막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몇몇을 더 소개하자면 그 중 미카미 쓰기오(三上次男) 동경대 명예교수 같은 사람은 테이프커팅 자리에 설만 했지만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시절 사정 때문에 이선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는 도자기 교역사 전문으로 젊은 시절부터 동남아에서 중동을 거쳐 아프리카까지 답사 조사를 했고 특히 이집트 카이로 교외에 있는 옛 도시 푸스타트에서는 이집트학자와 공동으로 중국 당나라 때부터 명청에 이르는 도자기 파편 1만 수천 점을 직접 발굴하기도 했다. 이때 수집한 각국의 도자기 파편은 당시 이 조사를 후원한 도쿄 이데미츠(出光) 미술관에 기증돼 현재도 그곳에 소장돼 있다.
또 다른 일본인 전문가로는 도쿄국립박물관의 동양과장이자 도자 전문인 하세베 가쿠지(張谷部樂爾)가 있었고 중국 타이페이의 고궁박물원에서도 도자부장에 해당하는 뚱이화(董依華) 조장이 왔다. 영국에서 동양도자기가 가장 많다는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미술관의 동양도자파트 차석학예관인 존 에이어(John Ayers)도 그 자리에 있었다.
청자 다구병(多口甁), 남송-원 용천요, 높이 11.5cm
청자 향로, 남송-원 관요계통, 직경 8.6cm
이렇게 국립중앙박물관이 특별전 개막일에 대거 외국인들을 초청한 것은 이례 중의 이례적인 일로 사실 역사상 처음이었다. 이들을 멀리 동양의 작은 나라에까지 오게까지 한 매력은 다름 아니라 이날 개막한 ‘신안 해저문화재 특별전’ 때문이었다. 신안 해저문화재란 전남 신안군 지도면 도덕도 앞바다에서 확인된 원나라 때의 침몰선에서 나온 2만 수천 점에 이르는 유물을 말한다.(이들 유물은 1976년부터 84년까지 11차례의 발굴을 거쳐 최종적으로 도자기 20,661점 금속제품 729점, 동전 28톤 그리고 기타 유물 등 23,024점이 출토됐다.)
특별전은 박물관이 그 전해인 1976년 10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이곳을 발굴 조사한 것과 전시가 열린 그해 여름 즉 7월에 행한 3차 발굴을 통해 건져 올린 7,000여 점의 유물 중에서 우선 국내외에 시급히 보고할 필요가 있는 760여 점을 골라 선보인 자리였다.
청백자 인화화훼문 각형향로, 원 경덕진요, 높이 10.4cm
양각모란문 칠기항아리, 남송-원, 높이 7cm
‘국내외에 보고할 필요가 있다’고 한 것은 그만큼 이 유물에 쏠린 관심이 국내외 막론하고 지대했기 때문이다. 물속에 있는 유물을 건져 올리는 수중고고학은 본고장이 유럽이다. 이미 20세기 초부터 지중해나 발틱해 같은 곳에서는 물속에서 과거의 유물을 건져 올리는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그런 일이 아시아에서 일어난 것은 신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아주 엄격하게 첫째 둘째를 따지자면 신안은 첫 번째가 아니고 두 번째에 해당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첫 수중발굴에 나서기 두 해 전인 1974년에 중국 천주시(泉州市) 앞바다의 천주만에서는 송나라 때 인도양을 오가던 교역선 한 척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 발견됐다. 그러나 이 침몰선이 본격적으로 조사, 인양된 것은 80년대 들어서의 일이었고 또 발견 당시만 해도 중국은 개혁개방 이전이어서 발견에 관한 내용이나 정보가 서구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신안이 본의 아니게 아시아 최초로 여겨지면서 주목도도 한층 높아지게 됐다.(참고로 신안 이후 아시아의 주요 수중발굴 사례를 거론하면 1981년부터 조사 시작된 일본 규수 다카시마(鷹島) 일대의 원나라 침몰선 조사, 1991년 중국 요녕성 수중련의 삼도강 해역의 원나라 침몰선 조사, 1990년 베트남 남부 푸타오의 청나라 침몰선 조사, 1995년의 필리핀 파라완 판다난섬 앞바다의 명말 침몰선 조사 등이 있다.)
이날 개막식을 통해 정식으로 공개된 인양유물을 내용으로 나눠보면 송원대 용천요 계통의 청자와 경덕진 제작의 청백자 그리고 그 외에 강서성, 절강성, 복건성 등지에서 생활자기로 쓰던 흑유와 잡유도기 등이 있었다. 도자기 이외에 나온 유물에는 청동제기, 청동향로, 청동거울 등과 같은 청동제 유물과 많은 양의 동전 그리고 몇 점의 칠기 유물이 들어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3차에 걸쳐 발굴한 7천여 점의 유물 가운데는 이색적으로 고려청자도 3점 들어 있었다. 이는 일본 규슈의 하카타(博多)에서 중국 남부 닝보(寧波)로 향하던 당시의 배들이 선박 수준과 항해술 때문에 일본 연안을 따라 항해하다 살짝 현해탄을 건넌 뒤 다시 한반도 남부 해안선을 따라가서 적당히 황해를 가로질러 중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3점의 고려청자는 양각 모란당초문 매병과 상감청자 운학문 대접 그리고 연당초문을 상감으로 새겨넣은 잔받침(盞托)인데 이 중 앞의 두 점은 전라도 강진 가마에서 구운 것이고 잔탁은 서해안의 부안에서 구운 것이다.
신안 유물이 알려진 것은 1976년의 10월 발굴보다 한 두 해 앞서 어부들이 조업하다가 우연히 물속에서 도자기가 함께 딸려 올라온 데서 시작됐다. 사실 서해안 일대에는 이런 일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신안 앞바다는 계속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 좀 남달랐다. 어망 속에서 물고기와 함께 올라온 도자기는 중국 도자기였는데 당시만 해도 이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고 당연히 모으자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눈 밝은 애호가 한 사람이 희소가치를 밝히면서 값이 급등했다. 당시 인사동 상인의 말을 빌리면 고려청자 중에서 입이 넓적한 광구병(廣口甁) 하나가 50만 원이라면 신안에서 나온 중국 도자기는 400-500만 원에 거래됐다. 이 말이 퍼지면서 서해안 일대의 키조개잡이를 하던 머구리 잠수부들이 대거 몰려와 물속을 휘젓고 다녔고 전주의 모씨는 중간 집하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 들었지만 신안 해저유물은 아무나 쉽게 꺼낼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신안 앞바다의 조건은 매우 나빴다. 수심은 20m나 될 정도로 깊었고 물이 탁해 눈앞의 것도 겨우 분간할 정도였을 뿐만 아니라 5-6m나 되는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해 하루 중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극히 한정됐다. 머구리 잠수부들은 남의 눈을 피해 바닷속에 들어가 손으로 더듬거리면서 병이나 항아리를 주워 올렸는데 이때 손에 걸린 것 중에서 생김생김이 병, 항아리가 아니면 다시 내동댕이치기도 했다. 실제 박물관 발굴팀이 건져 올린 것 중에는 목이 근래에 떨어져 나간 청자 불상이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무질서한 도굴이 횡행하는 동안 자연히 문화재 당국도 이를 감지해 단속에 나섰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도굴에 관한 문화재 관리법은 엄격해 낭만 가득한 서양의 트레저헌터 같은 꿈은 꿀 수 없었다. 즉 허가 없는 매장 문화재는 발굴뿐만 아니라 소지하고만 있어도 위법이었다. 그래서 신안 인근의 한 섬에는 어린아이들 제외한 남자들 모두가 전과자가 됐다는 믿기 어려운 말까지 인사동에 전해졌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이들이 무허가로 건져 올린 유물의 상당수는 단속 과정을 통해 당국에 압수됐는데 이것이 박물관에 이관돼 1976년 봄 무렵에는 박물관 창고에는 이들의 수가 수백 점에 이르게 됐다. 그래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정식으로 기획됐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수중고고학이란 말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시절이었고 그 위에 중국 도자기에 대한 지식 자체도 일천 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첫해 10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조사를 통해 살펴보니(이때 수중에 들어간 사람들은 해군의 전문잠수사들이었다) 바닷속에만 들어가면 유물들이 널려 있고 뻘 속에는 배까지 누워있는 것이 확인됐다.
이렇게 일이 더 커지자 박물관의 자체 역량만으로는 조사에 한계가 있어 국내외 전문가들의 조언을 듣고 한 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강력하게 생겨났다. 아울러 인사동 등을 통해 부풀려진 ‘신안의 보물선 이야기’도 어느 정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특별전 기획안이 짜여지게 됐는데 계획이 선 뒤에는 한층 ‘호떡 집에 불 난 것’처럼 박물관 전체가 바빠졌다. 현지의 사정상 현장을 쉽게 비워놓을 수 없어 추가 발굴계획을 짜야 했고 이미 건져 올린 유물은 당연히 정리를 해야 했으며 또한 국내에 존재하지도 않는 보존전문가를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해 조개껍질이 더덕더덕 붙은 도자기의 보존처리를 의뢰해야 했다.(이때는 유물보존과학 전문가가 전무하다시피해 어느 화공학 전문가에게 부탁한 결과 말끔한 새 청자를 만들어와 박물관 사람들이 아연실색했다는 비화도 있다) 그와 더불어 국내에 없는 자료, 즉 중국 도자기 관련서적을 구입하기 위해 급거 외국에 직원을 파견해야 했으며 아울러 전문가의 조언을 얻기 위한 학술대회를 준비하면서 중국도자사 전공의 외국 학자, 전문가를 수배하고 초청장을 보내야 하는 등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더욱이 그 해는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처럼 국립광주박물관 건립계획이 정식으로 추진되고 있어 한층 박물관을 바쁘게 만들었다.(국립광주박물관의 기공식은 이해 6월17일에 열렸다.)
그래서 특별전에 앞서 우선 국내 학자들에게 먼저 유물을 선보이고 조언을 듣는 학술대회가 8월29일부터 30일 양일간 열렸다. 학술대회에 앞서 전문가들에게 실물을 보여주기 위해 주요 유물 일부를 임시로 박물관 내에서 공개했는데 이때 박정희 대통령도 당시 영식인 박근혜씨를 데리고 와 이 유물을 관람하며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고 박물관 신문은 나중에 전했다.
그리고 재차 정비를 거친 뒤에 공개 유물수를 늘리고 제대로 사진을 찍어 도록을 만든 후, 해외 전문가를 초빙하여 학술대회를 열면서 일반공개를 시도한 것이 바로 ‘신안 해저유물 특별전’이었다. 외국 학자, 전문가들의 학술대회는 개막일 다음 날인 18일부터 20일까지 남대문 옆 한국무역회관에서 열렸다. 이 학술대회에는 14명의 국내외 학자들이 주제발표를 하고 20여 명의 국내외 전문가들이 패널리스트로 참석했다. 학술대회에서 잠정적으로 확인된 사항은 그동안 문헌에만 남아있던 14세기의 한중일 교역상황을 실제로 확인하는 자료가 발굴됐다는 사실, 또 발굴된 중국 남송-원대의 청자는 하한이 1320년대 전후라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국내 청자의 발전과 관련한 연대 수립이 한층 정밀해질 가능성 등이 있었다.(당시까지만 해도 중국 닝보에서 일본 하카타를 향하던 교역선이란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사실 이때 한국에 온 외국 학자, 전문가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점은 원나라 청화백자의 출토 여부였다. 청화백자는 백자 위에 나중에 푸른색으로 변하는 청화 안료를 발라 마치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 새로운 기법인데 중국에서도 원나라 때 처음 개발됐다. 그런데 이것이 개발된 시점은 원나라 후반이었으므로 원나라 시대의 청화백자는 그 수가 극히 적어 당시까지만 해도 전 세계를 통틀어 몇십 점밖에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그래서 신안에서 수천 점의 원나라 도자기를 실은 원나라 난파선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혹시 청화백자가 나오는 것은 아닌가’ 하고 누구나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었다. 존 포프 박사나 영국의 에이어 씨, 도쿄국립박물관의 하세베 과장 등이 모두 청화백자 전문가였던 것도 이런 사정이 반영된 것이다. 당시 원나라 청화백자는 몹시 귀해 황금 위에 다이어몬드가 잔뜩 박힌 것에 비유됐다. 청화백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1350년 전후부터 제작된 것으로 전한다. 아쉽게도 신안 난파선은 그보다 앞선 1320년 무렵의 교역선이었기 때문에 청화백자가 한 점도 실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전시는 일반에게 ‘보물선의 공개’라는 소문이 돌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신안 해저유물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 한 고미술 잡지사에서는 압수된 도자기만을 촬영해 『신안해저인양 문화재도록』이란 도록을 만들어 짭짤한 재미를 보기도 했다.
아무든 인기가 폭발하면서 전시는 두 번이나 연장돼 당초 11월17일에 폐막하려던 것을 12월11일로 연기했다가 다시 20일로 연장하면서 두 달 넘게 일반에 공개됐다. 전시에서 인기를 끌며 특히 일본에서 온 학자, 애호가들을 놀라게 한 유물은 용천요에서 제작된 순청자들로 그중 몇몇은 일본에서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유물과 형태와 발색이 꼭 같았다. 병 자루에 물고기처럼도 보이고 용처럼도 보이는 손잡이가 달린 화병은 일본 이즈미(화천市)의 구보소(久保惣)기념미술관에 소장된 청자 봉황이(鳳凰耳) 화병과 꼭 닮았으며 청화 양각모란문 화병 역시 일본에 유사한 형태를 보이는 청자가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의 에가와(穎川)미술관에 있다.
청자 어룡식(魚龍飾) 화병, 남송-원 용천요, 높이 25.7cm
또 가마쿠라 막부의 말기의 장군인 호조 사다아키(北條貞顯)의 무덤에서 나온 것으로 용천요 제작의 연잎 뚜껑이 있는 줄무늬 항아리는 똑같이 생긴 것이 대소 10여 점 발굴되기도 해 박물관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 외에 흰 바탕에 푸르스름한 색이 특징인 경덕진 가마의 청백자 역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도자기인데 이 전시에는 수십 점이 나란히 소개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반의 인기를 끈 것은 동물 형태를 본뜬 도자기로 청백자 위에 철화로 점을 찍고 사람이 물소를 올라탄 모양으로 만들어낸 연적은 특히 인기 넘버원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전 직원과 시스템이 매달려 엎치락뒤치락 하다시피 국제적인 행사로 치른 결과 국립중앙박물관은 스스로 내부 역량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를 맞이했다. 이를 통해 외국 학계와의 네트워크가 한층 강화됐고 그때까지 ‘국립중앙’이라고 했지만 감춰져 있었던 위크 포인트가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면서 서둘러 보강 작업이 이뤄진 것도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전시가 끝날 무렵인 12월에 당시 미술부의 도자 담당인 윤용이 학예사가 개막식에 참석한 미카미 교수의 추천으로 이데미츠(出光) 미술관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5개월 동안 연수를 받는 기회를 얻었고 또 정양모 수석학예관은 이듬해 1월 말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일본 동양도자학회의 총회와 그후 2월초 아사히 신문이 주최한 신안해저유물 심포지움에 주제 발표자로 참석하게 됐다.
청자 호문개호(鎬文蓋壺), 원 용천요, 높이 30.7cm
청백자 철반문(鐵斑文) 수우(水牛)인물형 연적, 원 경덕진요, 길이 8.5cm
국립중앙박물관의 전 직원과 시스템이 매달려 엎치락뒤치락 하다시피 국제적인 행사로 치른 결과 국립중앙박물관은 스스로 내부 역량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를 맞이했다. 이를 통해 외국 학계와의 네트워크가 한층 강화됐고 그때까지 ‘국립중앙’이라고 했지만 감춰져 있었던 위크 포인트가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면서 서둘러 보강 작업이 이뤄진 것도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전시가 끝날 무렵인 12월에 당시 미술부의 도자 담당인 윤용이 학예사가 개막식에 참석한 미카미 교수의 추천으로 이데미츠(出光) 미술관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5개월 동안 연수를 받는 기회를 얻었고 또 정양모 수석학예관은 이듬해 1월 말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일본 동양도자학회의 총회와 그후 2월초 아사히 신문이 주최한 신안해저유물 심포지움에 주제 발표자로 참석하게 됐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는 수중고고학에 본격적으로 눈을 떠 문화재관리국에서는 해군잠수사가 아닌 독자 인력개발을 위해 지원자를 선발해 스쿠버다이빙 훈련을 시키게 됐다. 이들은 나중에 태안 마도, 군산 십이동파도, 안산 대부도 등의 수중 발굴을 주도하게 됐다. 또 학계 전체로 보아도 이때부터 중국도자사를 전공하고자 하는 연구자들이 생겨났으며 이들 중 일부는 한중 수교 이후 북경 등지로 유학을 가 현지에서 중국도자기를 연구하기도 했다.
수중 도굴에서 시작된 신안해저유물 발굴과 그 전시는 박물관과 미술계에 수중고고학이라는 전대미문의 새 장르를 국내에 소개하고 그 방면의 강국을 만들어 주었고 아울러 한국문화재 연구에 있어 동아시아적 시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자각하는 기회를 새삼 만들어 주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