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수집 한국미술특별전
1971년 4월 16일~ 6월 15일 국립박물관
《호암수집 한국미술 특별전》도록. 이에 사용된 이미지는 가야금관(5-6세기 직경 20.7cm)이다.
카리스마가 있고 그 위에 권위와 실력까지 갖추면 사람들은 그 앞에서 왠지 주눅이 들게 된다. 이런 사람이 호통이라도 치게 된다면 그야말로 상대방은 좌불안석이 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어느 기업의 카리스마 대표가 회의를 주재하면서 부하 한 사람을 호되게 몰아치자 그 부하인즉 얼이 빠져 방을 나간다는 게 그만 캐비닛 문을 열고 들어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기업가 중에 카리스마 넘버 원을 꼽으라면 단연 고 이병철 삼성회장을 꼽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작은 키에 단정한 차림 그리고 늘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신고 그는 몸짓도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입을 다물고 날카로운 눈매로 사람들을 쳐다보면 당사자는 카리스마 같은 위엄을 절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런 외모와 인상이었으므로 보통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서 질펀하게 어울리기보다 혼자 시간을 많이 보내는 편인데 그런 모습에 어울리는 평생 취미가 고미술 감상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고미술과의 인연은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할 때부터 시작됐다고 말했다.
사실 대구는 일제 때부터 서울 다음으로 고미술 열기가 높았던 곳이었다. 특히 골동과 서적에 관심이 높았다. 책은 조선 시대부터 경상도가 유교의 본고장이었던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반면 골동은 어느 정도 당시 일본인 감상 애호가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근대 들어 일본은 중국의 고전문화 유입에 열중하면서 송, 명, 청으로 이어지는 중국 문인사회의 골동 취미, 취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도 고미술은 서화와 도자기가 주를 이루었다. 특히 도자기는 일본 문화 고유의 다도와 관계가 깊은데 서화 역시 다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식물이자 감상품이었다. 그러다가 메이지 시대를 거치면서 불상과 청동 유물 등 금속 골동에 몰두하는 취미가 생겼다. 그것이 일제 때 현해탄을 건너온 것인데 대구에 특히 그런 취향이 심했다.
이병철 회장이 고미술에 경도된 데에는 이런 대구의 분위기가 한몫을 했겠지만 호가 창산(昌山)인 큰형 이병각(李秉珏 1902-1971) 씨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어려서 한학에 공부한 이병각 씨는 당시 경남 유학을 대표하는 학자의 한 사람인 회봉 하겸진(晦峰 河謙鎭 1870-1946)의 사위로 그 문하에서 수학했다. 하회봉은 이후 남명 학통을 이은 곽종석의 제자로 나중에 이건방, 정인보 등 당대의 학자와 교류했다. 이런 환경에서 수학한 이병각씨는 나중에 조부 이홍석 옹의 문집과 스승의 문집 발간을 주도했고 그런 일을 하면서 고서적에 눈을 뜨고 이어서 대구 일대의 고미술계와 발이 닿은 것으로 전한다.
또 다른 영향은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사업차 일본을 자주 드나든 일을 꼽을 수 있다. 젊어서 일본 최고 학부의 하나인 와세다를 다닌 그는 일본의 상대 기업인들과 거리낌 없이 교류할 수 있었고 이들과의 사이에서 골프를 치는 일 외에 이들이 고급 교양으로 즐기는 고미술 애호 취미를 지켜봤던 것이다. 실제로 생전에 이병철 회장이 일본에 갈 때마다 함께 지냈던 한 재일교포 사업가는 이 회장은 비즈니스 미팅이 끝난 뒤 의례 도쿄의 교바시(京橋)나 니혼바시(日本橋)의 골동가를 순례했다고 했다.
그런 그의 컬렉션이 국립박물관의 정식 초대를 받아 일반에 공개된 것이 1971년 봄에 열린 《호암수집 한국미술 특별전》이다. 이 전시는 개인의 컬렉션을 박물관에 소개된 일로 처음은 아니었다. 그보다 앞서 1963년과 64년에 이담 씨와 김원진 씨가 가지고 있던 수집품 일부가 박물관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도자기에 한한 것으로 금속에서 서화, 도자기까지가 모두 200점 가까운 개인 컬렉션이 본격 초대된 것은 이 전시가 처음이었다.
박물관은 실은 그보다 앞서 60년대 후반 들어 민간 수장가들의 컬렉션을 조심스럽게 조사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박물관 소장품과 유물 구입에는 한계가 있어 박물관 활동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민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때였다. 앞서 두 건의 민간 수집품 소개도 그런 배경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는 해도 이병철 컬렉션은 예외적인 특급 대우를 받았다. 우선 전시 타이틀만 보아도 그의 호인 호암(湖巖)을 그대로 썼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이병철 회장과 삼성을 보는 눈은 그렇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실제로 당시 김원룡 관장은 그런 사정을 십분 염두에 둔 듯한 뉘앙스가 느껴지는 초대의 글에 쓰기도 했다. 그는 서구에는 여러 개인 수집가들이 문화 발달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면서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주목할 만한 수집가들이 나타나 재력, 기호, 포부 등에 따라 각기 특색있는 컬렉션을 성장시켜 나갔으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외국과 다른 특수 사정이 있어서 그러한 개인 컬렉션들이 문화재의 보존에 일역을 맡고 있기도 하면서 그 활용이랄까 선전 보급면에 있어서는 보다 폐쇄적인 경향을 가지게 된 것도 부인할 수 없다’고 했다.
관장이 도록에 이런 말까지 한 것은 1966년에 터진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의 여파가 그때까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에 관련됐던 당사자들이 대부분 죽고 없고 또 생전에 남긴 말들이 서로 엇갈려 진상은 알 수 없지만 한국비료는 당시 제3공화국 정부가 농업생산 증대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비료를 제일제당의 성공 경험이 있는 삼성에게 강력하게 권해 시작된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간에 일이 터지면서 이병철 회장은 이로 인해 사업 은퇴를 선언했고 사회에는 ‘돈병철’이란 말이 회자됐다.
그래서 그의 컬렉션 초대전은 정부와 삼성과의 화해라는 거대한 구상의 밑그림 같은 성격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는 그 무렵 사업에 복귀하고 있었으며 한해 앞서서는 환갑을 맞아 모교 와세다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이라는 인식을 일본에 새삼 확실히 심고 있었다. 그래서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갈 길이 바쁜 정부로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이자 일본과의 파이프가 굵은 삼성과의 화해가 절실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었다.
4월의 전시 오픈에 2달 앞서 전시 출품작의 선정과 사진촬영 작업이 시작됐고 이 과정에서 1천여 점에 이르는 컬렉션 중 각 장르를 대표하는 물건 183점이 정선됐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골동 금속 21점
토기 17점
청자 46점
분청사기 26점
백자 54점
서예 4
회화 15점
이 가운데 하이라이트 몇 점을 소개하면 골동 금속 가운데 당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유물은 황금으로 된 왕관과 귀걸이였다. 귀걸이는 누금(鏤金)기법을 써서 수많은 금알갱이를 붙인 대형 귀걸이인 <금제 태환이식(太環耳飾)>로 신라의 금공예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귀걸이 못지않게 일반인들에게 인기를 끈 것이 꽃잎 모양의 입식(立飾)이 장식돼 있고 곡옥이 달려 있는 <가야금관>이었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가야금관 2점 중 하나로 다른 하나는 대구에 있던 일본인 컬렉터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가 수집했다가 일본에 가져가 현재는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태환이식 5-6세기 신라 길이9cm
이 금관은 형 이병각 씨가 수집했던 것인데 나중에 그가 문화재 사건에 연루된 뒤에 골동에 손을 떼면서 이 회장이 물려받았다. 이 전시에는 당시 문화에 관심 많았던 박정희 대통령도 직접 참관했다. 박 대통령은 스스로 피아노도 치고 작곡도 하며 또 서예도 수준급 솜씨를 자랑하는 문화인다운 면모가 있었는데 박물관 전시를 자주 찾았으며 또 청와대로 기증된 고미술품을 박물관에 보내준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박물관 직원이 기억하는 것으로는 일본에서 가져온 잘 생긴 달항아리를 한 점 기증한 적이 있고 또 단원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전하는 8폭 평생도도 박물관에 내려보낸 일도 있었다.
그는 전시를 둘러보면서 가야금관과 신라 귀걸이의 유리 진열장 앞에서 발걸음을 딱 멈추고 뒤따르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출토품일 텐데 어떻게 여기게 들어와 있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전시를 둘러보면서 가야금관과 신라 귀걸이의 유리 진열장 앞에서 발걸음을 딱 멈추고 뒤따르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여기 있는 것들은 모두 출토품일 텐데 어떻게 여기게 들어와 있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순식간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찡-’하고 전류 흐른 듯 얼어붙고 말았다. 과장하자면 근처에 캐비닛이라도 있었더라면 몇몇 사람은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고고학 전문의 미술사학자 출신의 김원룡 관장은 물론 옆에 있던 이병철 회장도 순간 할 말을 잊었다. 그런 어색한 시간이 째깍 째깍하고 지나갈 때 어디선가 ‘대통령님’ 하는 경상도 특유의 억센 여성의 말이 들려 왔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보자 진주 출신의 학예연구관인 이난영 씨로 그녀는 한발 앞으로 나서면서 ‘대통령님, 그기 아입니더. 그냥 놔뒀으면 전부 일본에 갈 것을 수집한 것입니더’라고 하면서 거들고 나선 것이다.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대통령왈 ‘아, 그런가요’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진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가야금관>이 연출한 어색한 장면은 무사히 수습되고 대통령을 전시 관람을 끝내고 이 회장에게 치하(致賀)의 인사를 전한 뒤 박물관을 떠났다.
<가야 금관>만큼 당시 장안의 골동 애호가들이 한 번 보고자 했던 물건이 <청자진사연화표현 주전자>였다. 이 청자 주전자는 강화도의 최충헌 묘에서 묘지와 함께 출토됐는데 해방 후에 미국으로 유출돼 한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을 지낸 동양미술 애호가 에이버리 브런디지(1887-1975)가 소장했던 것이었다. 나중에 그는 소장품 대부분을 고향의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에 기증했는데 이것만 일본에 매물로 내놓아 호암이 인수한 것이다. 당시 높은 가격에 이병철 회장조차도 몇 번씩이나 물건을 여러 번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고민했다고 전한다. 이때 일본의 한 전문가가 ‘고미술이란 10년 뒤에 가치를 보고 사야 한다’는 말을 해주어 구입을 결정했다는 일화가 있고 말 그래도 이 청자는 그후 호암 컬렉션을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
청자진사연화 표형주자 13세기초 고려 높이 32.5cm
청화백자죽문각병 17세기 조선 높이40.6cm
청화백자산수문 화병 18세기 조선 높이 31.6cm
그리고 백자의 하이라이트로는 청화백자 떡메병을 꼽을 수 있는데 이는 6.25때 납북된 역사학자 이인영 교수가 소장했던 것으로 소상팔경의 한 장면과 같은 산수에 조각배가 떠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는 간송 소장으로 동자가 낚시하는 그림이 그려진 것과 나란히 18세기를 대표하는 2대 떡메병의 하나로 유명했다.
서화는 골동, 도자기에 비해 그렇게 많이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글씨는 모두 추사 작품으로 대련 3점과 일찍부터 명품으로 이름난 편액 <죽로지실(竹爐之室)>이 나왔다. 여러 그림 중에는 겸재가 그린 커다란 <노송도>가 눈에 띠는데 이병철 회장이 특별히 좋아했던 단원 그림도 한 점 출품됐다. 이는 패랭이를 쓴 사람과 떠꺼머리 총각이 나란히 등짐을 지고 성벽 아래를 걸어가는 그림이다. 이들이 지고 있는 짐은 일제때부터 돈 짐, 즉 동전 꿰미로 해석됐다. 그래서 이 <성하부전도(城下負錢圖)>를 보고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고 해서 특별히 좋아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근래 들어 이들이 진 짐을 돈 짐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해 제목까지도 아예 봇짐장수를 뜻하는 <부상도(負商圖)>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김정희 전서 <죽로지실> 종이에 먹 30x133cm
김홍도 <성하부전도> 18세기말 지본담채 38.5x27cm
이재관 <오수도> 19세기 전반 종이에 담채 56x122cm
아무튼 이 전시로 호암컬렉션은 세상에 그 모습이 처음 알려졌고 또 그 규모와 수준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이제는 간송의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 호암의 시대가 열렸다는 말까지 했다.
이 전시를 계기로 세상의 공인을 받은 호암 컬렉션은 삼성 제1처럼 이후 국내 제일의 민간 컬렉션을 상징하게 됐다. 이병철 회장은 이후에도 컬렉션에 힘을 기울여 양과 질을 높였고 1984년에는 용인 에버랜드에 한옥 건축양식을 빈 호암미술관을 세우고 소장품을 상설 전시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사후에 컬렉션은 이건희 회장이 물려받았고 이후 2004년 한남동에 오픈한 삼성미술관리움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리움은 현재 국보 23점, 보물 80점을 소장한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으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