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0월 9일 ~ 10월 23일
그해 10월은 늦가을까지 유난히 더웠다. 오후가 돼도 그늘이 아니면 햇살이 여간 따갑지 않았다. 그런 날씨에 손에 양산을 받쳐 든 여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울 성북초등학교의 담장을 끼고 성북파출소 앞까지 길게 늘어섰다. 이들의 줄서기는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데 요즘 같은 천박한 맛집 줄서기가 아니라 미술관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입장을 기다린 미술관은 일제 때부터 이곳에 있었던 간송미술관이다.
이들은 입장을 한다 해도 빽빽한 사람들 틈 사이에 어깨가 밀리며 구경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까치발을 해서라도 오래도록 눈에 담아두고자 한 그림은 보물 1973호의 혜원 신윤복 작 <미인도>였다.
이들은 입장을 한다 해도 빽빽한 사람들 틈 사이에 어깨가 밀리며 구경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까치발을 해서라도 오래도록 눈에 담아두고자 한 그림은 보물 1973호의 혜원 신윤복 작 <미인도>였다.
전시에 조금 앞서 세상에는 혜원을 여장 남자로 설정한 TV드라마 <바람의 화원>가 방영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교과서에도 나와 있어 누구나 알고 있는 신윤복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는데 그의 대표작인 <미인도>가 때마침 간송미술관의 2008년 가을전시에 나온 것이다.
<미인도>가 나오긴 했어도 전시는 혜원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었다. 전시는 근대의 大컬렉터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 선생이 세운 최초의 사립박물관격인 보화각(保華閣)의 설립 7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으로 열렸다. 거기에 선생이 수집한 그림과 글씨 대표작 100여점을 소개하는 가운데 <미인도>도 함께 나온 것이다. 아무튼 이런 장사진(長蛇陣)의 줄서기가 뉴스에도 소개되면서 간송미술관을 보는 눈은 새삼 달라졌다. 간송의 뜻이 널리 알려진 것은 물론 품위와 교양을 지향하는 문화생활인이라면 간송미술관의 봄가을 전시는 놓쳐서는 안 되는 연중행사가 됐고 그무렵이면 줄서기에 행상인들까지 몰리는 성북동의 새로운 풍물시가 됐다.
이렇게 세간의 화제가 된 2008년 가을 전시는 간송미술관이 75번째로 연 전시였다. 시작은 37년전인 1971년 가을이었다.
이 해는 한국미술에 있어 실로 큰 획을 긋은 사건이 잇달아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우선 이 해 7월에 백제의 무령왕릉이 발굴됐다. 무령왕릉은 도굴이 되지 않은 완벽한 형태의 백제 왕릉으로서 이 해 장마통에 우연히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은나중에 한편에서 졸속이라는 지적도 받았지만 어쨌든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를 눈 앞에 재확인시켜준 미술사적 대사건임은 틀림없었다. 무령왕릉 발굴품은 세간의 관심을 위해 그해 10월말에 국립박물관에서 긴급 전시가 열렸다.
「간송전형필수집 서화목록」표지
『간송문화』 제1호 표지
그리고 훗날 봄가을의 좋은 계절에 펼쳐지는 성북동 풍물시의 한 장면이 되는 간송미술관의 첫 특별전은 이 두 큰 사건의 사이인 1971년10월9일에 개막됐다. 당시 특별전의 주제는 ‘겸재(謙齋)’였다. 겸재는 말할 것도 없이 18세기 진경산수라는 독창적 산수세계를 창안해낸 정선(鄭敾 1676-1759)의 호로 이 특별전에는 그의 대표작을 40여점이 소개됐다. 그리고 전시에 맞춰 『간송문화(澗松文華)』 (1호)가 발간됐다. 『간송문화』는 도록을 겸해 해당 테마에 관련된 연구논문을 수록한 것으로 현재까지 발간되고 있다.
이렇게 간송미술관이 간송 선생 컬렉션이 처음에 세상에 공개됐지만 애석하게 선생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간송 컬렉션은 해방이후 국립박물관의 특별전에 대여 형식으로 일부가 간혹 소개된 적이 있지만 선생은 공개에는 체계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본격적인 공개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1962년에 57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타계하면서 모든 계획이 중지됐고 말았다.
유족들이 선생의 유지를 계승하고 사회에 알리기 위해 작업을 시작한 것은 1965년이었다. 간송은 생전에 한국문화의 정수를 지키고자 다방면에 걸쳐 컬렉션을 이뤘는데 그 중에서도 서화에는 겸재(정선), 현재(심사정), 단원(김홍도), 오원(장승업) 그리고 추사(김정희) 등 조선 서화의 흐름을 결정지은 주요 작가의 대표작 100점을 수집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는 물론 이뤄진 것도 있고 다 이루기 전에 생을 마감해 미진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방대한 양을 자랑한 그의 서화 컬력션은 이때 「간송전형필수집 서화목록」이란 이름으로 발간됐다.
그리고 이어서 전적이 정리가 시작됐다. 서화 이상으로 간송컬렉션의 자랑인 전적 컬렉션에는 <훈민정음 혜례본>(국보 제70호)가 들어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서화 이상으로 시급한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고미술상인들 사이에 전해지는 오래된 얘기 가운데는 6.25때 피난을 가면서 중요한 것만 챙겨갈 수밖에 상당수가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이 중 일부가 유출돼 환도한 뒤에 간송이 제값을 주고 다시 사들인 것도 있었다고 했다. 그런 만큼 보존상 문제 때문에 시급한 정리가 필요했다. 이 작업에는 1년여가 걸려 1967년에 「간송문고 한적(漢籍)목록」이 단행본으로 간행됐다. 앞서 나온 서화목록은 정식 출판물이 아니라 등사판 인쇄물이었다.
이렇게 1차적인 유물 정리작업과 동시에 살았으면 그가 환갑을 맞이하는 해인 1966년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됐다. 그리고 1938년에 간송이 컬렉션의 체계적인 보존을 위해 지은 성북동 보화각은 이때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부설미술관이 됐다.
이런 작업은 생전의 간송과 교우를 나눴고 교류했던 문화계 인사들이 대거 도움을 주면서 이뤄졌다. 그리고 그 무렵 전적정리 작업에 합류해 지금까지 간송미술관을 지키며 함께 역사를 만든 사람이 최완수 선생이다. 그와 간송미술관과의 인연은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그 이전에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박물관에 들어가 지방 근무를 자처해 경주에 내려가 있었다. 경주는 남산 일대를 비롯해 한국 불교유적의 보고임은 말할 것도 없다. 불교에 관심이 깊었고 불교미술 연구를 뜻하고 있엇던 그는 매일같이 남산으로 나가 현장을 조사하고 기록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현장에서 유물 스케치하던 곳에 경주에 출장 온 최순우 당시 박물관 미술과장이 드른 것이다. 당시 박물관 말단이었던 그는 미술과장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최 과장은 그의 작업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자신을 의식한 그에게 일을 마치거든 자신이 머무는 월성 여관으로 찾아오라고 말을 건넸고 그것이 인연이 돼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됐다.
간송에서 유물정리 작업이 시작됐을 때 최 과장 머리속에 가장 떠오른 인물이 최완수 선생이었다. 그래서 그를 추천해 그는 간송미술관 제1호 직원이 됐다. 최완수 선생이 최순우 과장의 제안을 쉽게 수락한 한 것은 간송컬렉션만큼 그를 이끈 것은 당시 국내에는 간송에만 있던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의 존재였다. 『대정신수대장경』은 일본이 1922년부터 10년에 걸쳐 만든 대장경의 종합판으로 고려대장경을 바탕으로 해 여러 간행본과 사본을 비교하고 또 자세한 주석까지 단 것으로 일본 근세 불교학이 이뤄낸 대단한 업적 중 하나였다. 원래 불교학에 뜻이 있기도 한 그는 이 대장경의 존래에 이끌려 간송 선생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간송미술관에 합류하게 됐다.
전적 정리를 마치고 1차 정리작업을 마친 서화를 전시 공개를 겸해 테마별, 작가별로 재정리하기 위해 기획한 것이 특별전이었다. 간송의 서화 컬렉션은 조선의 대표화가의 대표작 100점을 목표로 했지만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중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겸재 그림과 추사 글씨였다. 세간에는 겸재와 추사는 대표작이 간송에 모두 있다도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고민 끝에 둘 모두를 첫 특별전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한꺼번에 나란히 소개하면 의미가 훼손될 수 있어 첫 전시는 일반이 보다 관심을 가질 겸재를 택했고 개막 특별전 제2부에 해당하는 전시로 추사전을 열었다. 추사 전시는 이해 가을 겸재 전시가 끝나고 이듬해 4월에 열렸다. 그런데 간송의 추사 컬렉션은 겸재의 것보다 훨씬 많고 다양해 1972년 봄에 이어 가을까지 두 번에 걸쳐 열렸다.(참고로 제4회 전시는 단원 김홍도 특별전이었다.)
첫 번째 겸재 전시에 나온 40여점의 작품 중 15점이 『간송문화』에 도판으로 수록됐다. 이들은 옛 방식 그대로 별도로 인쇄한 것을 도록에 풀칠해 붙인 것들이었다. 겸재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인곡유거(仁谷幽居)>는 그 중에서도 컬러 사진으로 소개됐고 나머지 <장안연우> <종해청조> <정자연> <은암동록> <박생연> <삼부연> <무송관산> <고사관폭> <빙천부신> <천생산성> <만폭동> <통천문암> <장안사> <정양사> 등은 흑백으로 소개됐다.
겸재 정선 <인곡유거> 지본담채 27.4x27.4cm
겸재 정선 <정자연> 지본담채 32.3x57.8cm
겸재 정선 <장안사> 지본담채 56.0x42.8cm
겸재 정선 <무송관산> 지본담채 97.0x55.8cm
『간송문화』에 실린 논문 「겸재 정선」은 최순우 미술과장이 썼다. 이 논문은 간송의 큰 아들이신 전성우 선생이 번역해 초록을 실었다.
제1호 『간송도록』에는 역사학자인 김상기 교수를 비롯해 황수영, 진홍섭, 김원룡 선생이 발간사를 썼다. 그 중에서 진홍섭 교수는 ‘인생은 취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실제 그분은 그림, 도자기를 놓고 밤 가는 줄 모르고 취해 지냈던 분’이라고 간송을 회고했다.
『간송문화』 제2호에 실린 간송 선생의 유묵 <정유원단>
추사 김정희 <지난병분> 종이에 먹 17.4x54.0cm
대련 <호고연경> 종이에 먹 각 129.7x29.5cm
따라서 1971년 가을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첫 개관전은 그런 점에서 한국미술에 있어 마치 두 수레바퀴처럼 관과 민이 서로 상보하면서 한국미술을 이끌어가는 하나의 출발점이 됐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