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예미술대전》1975년 6월 23일 - 7월 23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몇 년 전 소설가 최인호 씨가 세상을 떠났다. 최인호 씨 하면 70, 80년대를 휘어잡은 인기 작가로 소설을 써낼 때마다 세간의 화제를 몰고 다닌 문인이다. 당시 그가 필력을 휘두른 주제는 청년 문화였다. 어느 시대인들 반항적 청년 군상들이 없었으랴만 또 그들에게만 통하는 또 다른 문화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을 사회의 어떤 새로운 현상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최인호 씨가 예리하게 그것을 전에 없고 새로 생긴 색다른 것으로 글 재료로 삼은 것이다. 소설 속에서 묘사한 통기타와 생맥주, 대학 그리고 남녀 청춘들의 연애 등등은 그렇지만 당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최인호 씨의 경쾌하고 발랄한 필력에 의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상을 접하면서 사람들은 새삼 자신 주변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실제 70년대 들어 한국은 과거와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전통 사회에서 식민지, 전쟁, 빈곤 등 어둡고 굴곡진 근대의 터널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70년대에 들어 사회는 경관부터 변했다. 서울시의 개발로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잇달아 놓이고 강변에 고층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새로운 환경과 경관 속에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젊은이들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최인호 소설 인기에 힘입어 영화도 속속 개봉됐다. 그중에 대히트를 친 것이 말할 것도 없이 『바보들의 행진』이었다. 이 영화는 70년대 청춘문화의 상징처럼 성공을 거두며 송창식의 ‘고래사냥’이나 ‘왜 불러’ 같은 노래도 전국적인 합창곡이 됐다. 이 영화의 개봉에 두 달 앞서 극장에서 예고편 필름이 막 돌아가고 있을 때 한국미술쪽에서도 거의 『바보들의 행진』급이라고 할 만한 전시가 열렸다. 이 해 6월23일 저녁 6시 초여름의 길어진 해 덕분에 여전히 날이 훤한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한국민예미술대전》의 개막식이 열렸다.
민예는 오늘날 한국미술의 어엿한 한 장르로 인정받고 있지만 1975년 봄까지만 해도 ‘한국미술’축에는 끼지 못했다. 청자, 백자 중에서 연적이나 붓통, 필가 등 문방구는 일찍부터 미술품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그 외의 것들은 철지난 고물 생활용품 아니면 여인들의 세간 정도 밖에 취급을 받지 못했다.
당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전국적으로 ‘잘 살아보세’라는 슬로건 아래 새마을운동의 열기가 드높게 피어오르던 시절이기도 했다. 집집마다 흑백 TV, 전화기, 냉장고를 갖는 것이 자랑이었고 또 그런 도시적 세련된 양식(洋式)생활이 경제발전이 상징하는 현대생활의 모델인 것처럼 대대적으로 선전되고 있었다. 그래서 ‘잘 살아보자’라는 구호를 실천하기 위해서 우선 낡은 적폐와 구습 그리고 해묵은 관행을 타파하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요청됐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과감하게 과거를 버렸다. 옛날부터 내려온 손때 묻은 목기며 함지며 찬장이며 돌화로며 목침이며 나무 재떨이며 등등을 버리고 새로 호마이카, 나이론, 플라스틱으로 개비(改備)를 했다. 이렇게 해서 옛부터 내려오던 생활 민예품, 용품들은 하루아침에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고 가져가라고 내버려도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는 고물(古物) 신세가 됐다.
그런 마당에 열린 ‘한국민예미술대전’은 이들 민예품의 운명에 사회적인 ‘재고(再考)’를 강력히 요청한 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이전까지만 해도 박물관의 문밖에 있던 것들을 정식으로 초청함으로서 기존의 한국미술과는 궤를 달리하는 또 다른 미와 멋의 세계를 천하(?)에 알린 기회를 만든 것이다.
나전 빗접, 국립중앙박물관, 16세기, 높이 27, 26.8*26.5cm
이날 저녁 개막식에는 이원경 문화공보부 장관, 이희승 박사, 이치순 문화재 국장, 김영권 문화국장 등이 개막 테이프를 끊었다. 이들 뒤쪽에는 당연히 많은 내빈들이 초대돼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특별히 가슴 뿌듯해 하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이들은 당시 자칭하기로 ‘미술당 멤버’들이었다.
이들이 흐뭇해한 것은 출품작의 상당수가 미술당 멤버 소장품이었던 까닭도 있다. 당시 소개작이 647점인데 이 중 박물관 소장품은 1/10에도 못 미치는 46점에 불과했다. 이런 사실은 당시까지만 해도 민예품은 박물관의 수집 대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부득 민간의 내노라 하는 수집가들의 소장품을 빌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없던 새로운 생각과 시선, 인식을 제시해준 이 전시는 대성황을 이뤘다. 전시를 보러온 사람들은 ‘이런 것도 미술품이 될 수 있느냐’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들이 유리진열장 너머로 본 것은 대부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당에, 부엌에 그리고 대청마루를 굴러다니면서 천대를 받으면서 끝내는 엿장수의 리어카 속으로 들어갔던 물건들이었다.
자수십장생문 안경집, 김의진, 길이 16cm, 폭 6cm
전시는 이렇게 천대받던 것들을 꼼꼼하게 모아 전반에 걸쳐 보여주었다. 연초에 띠(干支)동물 소개 특별전에 한 두 점 소개되던 정도에 불과했던 민화는 이때 대거 본격적인 소개가 이뤄졌으며 자수, 돌 공예, 금속 공예, 목 공예, 종이 공예 등 조선시대 후기부터 생활문화 속에서 만들어 쓰던 각양각종의 민예품이 거의 전 장르에 걸쳐 고루 소개됐다. 당시 24개 장르로 나뉘어 소개된 전시 작품의 분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민화: 36점.
자수: 주머니, 안경집, 사주보, 기러기보, 바늘집, 바늘 방석, 베갯닛, 베겟모, 마구자 단추 등 28점.
떡살과 다식판: 도자기, 목각, 곱돌 등 재질별로 분류된 56점.
표주박: 지승, 칠보, 지장(紙粧), 주칠, 목각 등 54점.
등기류(燈器類): 조족등(照足燈), 목등가(木燈架), 촛대, 유등가(鍮燈架), 석제 등잔 등 23점.
담배함, 화로, 수로(手爐), 향로: 석제, 철제, 은상감, 유제(鍮製) 등 52점
자물쇠: 철제, 유제, 철제 은상감 등 21점
수저와 국자: 백동, 유제, 은상감 등 29점
다리미와 부손: 2점
신발류: 마혜(麻鞋), 당혜(唐鞋), 태사혜(太史鞋), 나막신 등 14점
문방구류: 필통, 지통, 연적, 묵상(墨床) 등 39점
석제류: 전골 남비, 반상기, 신선로, 주전자, 다듬이돌, 저울추, 탕기 등 62점
목공예품: 고비(考備), 소반, 함지, 목반, 이남박, 잡곡 뒤주, 항아리, 기러기, 묵통(墨筒), 망건통, 산통(算筒), 화약통, 합(盒) 등 103점.
지승: 바구니, 삼태기, 안침(按枕), 쌈지, 항아리 등 12점
지장(紙粧) 제품: 갓집, 반짓고리, 연상(硯床) 등 12점
죽공예품: 찬합, 반짇고리, 상자, 토시, 투호 등 12점
금공예: 재떨이, 말안장 5점
사어피(沙魚皮)류: 안경집, 찬합, 서류함 등 9점
화각 제품: 참빗, 부채, 자, 상자, 함, 베갯모, 버선장 등 28점
나전 제품: 자, 부채, 필통, 상자, 함, 베겟모, 함지, 반닫이 등 18점
도자기류: 석간주(石間硃), 병, 호(壺), 오리병 등 10점
우피(牛皮) 제품: 상자, 서류함 등 3점
능화판: 4점
기타: 7점
이들 가운데 목공예품을 하나의 예로 들면 사랑방의 선비들이 쓰던 고비(考備)나 망건통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인들이 얼마 전까지 이고 다니던 함지박, 목반, 이남박, 소반 등은 이때 처음 박물관 유리 진열장 안에 들어왔다. 물론 대청마루에 있던 작은 잡곡 뒤주에서 목수 연장인 먹통에서 화약통, 산통까지도 그런 대접을 받으며 처음으로 박물관 출입증을 받았다. 돌로 만든 공예품은 더욱 가관인데 전골냄비에서 반상기, 신선로, 주전자, 다듬이돌, 저울추까지 나와 보는 사람들의 입을 벌어지게 했다.
지장 태극문 바가지, 권옥연, 높이 15.5cm, 지름 31.cm
당시 이들 비공인(?)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던 곳 가운데 미술관 이름이 붙은 곳은 두 곳으로, 일찍부터 민화 컬렉터로 유명한 조자룡 박사가 세운 에밀레 미술관에서 민화를 빌려왔고 동창들의 기증으로 인해 여성 생활용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던 숙명여자대학 박물관에서 해당 유물이 출품됐다.
나머지는 모두 개인소장자로 유강열, 김기창, 김종학, 권옥연, 김기수, 전영우, 예용해, 설원식, 최수정, 김희진, 최구, 변종하, 김상옥, 이대원, 임금희, 김상윤, 박만식, 이병찬, 손도심, 장풍미, 홍석화, 김인건, 이원기씨 등이 소장품을 내놓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미술당을 자처한 사람들이다. 미술당이라는 이름은 나중에까지 남았지만 어떤 실체가 있는 모임은 아니었다. 민예품과 공예품에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들로 서로 어울려 모이면서 스스로 붙인 이름에 가깝다. 이들은 단세포 아메바처럼 홀로 돌아다니다 미술 얘기가 나오면 여기저기서 불특정 다수로 모여 화제의 꽃을 피우는 그런 식이었다. 면면도 박물관 인물을 필두로 화가, 사업가 그리고 단순 애호가 등등 다양했다.
견도, 김기창 소장, 지본채색, 44.8x38cm
그중에 물론 단골 내지는 골수라고 불릴 만한 멤버가 있었다. 당시 박물관의 최순우 관장, 한국 민예에 밝았던 예용해 한국일보 논설위원 그리고 파리 유학에서 돌아와 민예품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화가 권옥연 씨 등이 그 중심에 있었다. 실제로 이 세 사람이 조자룡 씨와 함께 전시의 준비위원을 맡아 출품작의 구성과 분류, 배치에 의견을 나누었다. 특히 최순우 관장은 주변사람들에게 흩어져가는 민예품을 모아두라고 권했던 인물로 유명한데 그는 너른 인품과 폭넓은 대인관계로 중심적 역할을 했는데 민예미술대전도 그의 발의에 의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민화의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먼저 자각했던 사람이 조자룡 에밀레 박물관 관장이었다. 그는 18세기 후반부터 근대 초기까지 일회용 그림처럼 쓰고 버리던 민화에 주목하면서도 누구보다 먼저 그 진가를 알아봤다. 그는 화곡동에 개인 박물관을 세워 당시 외국인들이 한국여행 기념으로 사가는 민화를 본격 수집했고 또 주변에 자신의 주장을 열심히 전파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화가 권옥연 씨는 파리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불현 듯 민예품 수집에 나서며 주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화가 중에는 민예품에 관심을 보인 사람이 더 있었는데 서양화가 김종학 씨 역시 목가구에 몰두하며 가구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서양화가 이대원 씨는 민예품 가운데 소품 수집에 열심이었다. 70년대 댄디스트로 유명했던 서양화가 변종하 씨는 도자기에서 목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면서 독자적인 감식안으로 유명했다. 또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문인 김상옥 씨는 백자에 심취해 한 때 인사동에 아자방이라 가게를 직접 운영할 만큼 프로적 안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또 매듭 분야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해 매듭장까지 된 김희진 씨도 이들 미술당의 일원이었다.
작호도, 에밀레미술관, 19세기, 지본채색, 99.3x59.8cm
화가 권옥연 씨는 파리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불현 듯 민예품 수집에 나서며 주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화가 중에는 민예품에 관심을 보인 사람이 더 있었는데 서양화가 김종학 씨 역시 목가구에 몰두하며 가구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서양화가 이대원 씨는 민예품 가운데 소품 수집에 열심이었다. 70년대 댄디스트로 유명했던 서양화가 변종하 씨는 도자기에서 목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면서 독자적인 감식안으로 유명했다. 또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문인 김상옥 씨는 백자에 심취해 한 때 인사동에 아자방이라 가게를 직접 운영할 만큼 프로적 안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또 매듭 분야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해 매듭장까지 된 김희진 씨도 이들 미술당의 일원이었다.
존안, 권옥연 소장, 길이 27.7cm, 높이 19.cm, 길이 25.6cm, 높이 16.9cm
당시 큰 인기를 끈 《한국민예미술대전》은 어느 면에서 소설가 최인호 씨가 나서서 말해주기까지는 그냥 지나쳤던 청년문화처럼 우리 미술 속에 잠들고 있었던 새로운 보석을 새롭게 캐낸 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적 자각은 정통 미술사를 전공한 학자의 입을 통해서도 증명이 됐는데 김원룡 당시 서울대 교수는 민예품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민예는 날카로운 개성의 귀재를 발휘 못하고 첨단을 걷는 천재의 섬광을 빛내지 못할지 모르나 역사와 시간에 흔들리지 않는 민족의 정감을 반영하고 특정한 자연환경에 대비해서 살아가는 민족의 생활양식을 형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것들을 보면 저절로 ‘금할 수 없는 환향(還鄕)의 따뜻한 감정이나 표현할 수 없는 만족의 공감과 미소를 느끼게 된다’고 덧붙였다.
미술당의 리더이자 실질적인 기획자였던 최순우 관장은 전시도록 서문에 좀 색다른 말을 했는데 그 곳에는 당시 금기어처럼 여겨지던 민중이란 단어가 들어있었다. 그는 민예를 ‘민중적인 공예’라고 풀이하면서 ‘민중 미술이라는 뜻은 민중 예술 속의 조형 예술이라는 말도 된다’고 했다.
민중예술로서의 공예와 회화, 조각을 소개한다고 했지만 내용상으로 사랑방 문화에서 여인네만의 부엌, 규방 문화까지 아울러 남녀노소가 거리낌 없이 즐기는 내용이어서 당시 많은 관람객이 찾았다. 어린이 관람객 사이에 특히 인기가 높았던 것은 호랑이 민화로 그 중에서 웃는 모습이 특이한 조자룡 출품작은 ‘김희갑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무늬 표현이 추상적인 그림은 ‘피카소 호랑이’라고도 불렸다.
책거리 병풍 중, 김종학 소장, 지채, 62.3x37.8cm
숱한 화제를 남긴 이 전시는 박물관으로서도 의미가 깊었다. 이 전시는 해방 30주년 기념전의 하나였다. 해방 이후 박물관이 애써 추구해온 독자적인 한국의 미의 발굴과 정리 사업이 이 기획을 통해 하나의 결실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전시였다. 그 외에 이 전시는 부수효과로 서울 인사동을 민예품 메카로 만들었다. 이전까지 은 서화, 도자기, 골동이 메인이었으나 이 전시 이후 전국에서 한층 민예품들이 몰려들면서 80,90년대 들어 인사동 전성시대를 맞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