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노암
‘벌거벗음’이라는 의상
박필교의 누드화는 일종의 예술이 지닌 품격 또는 존재론적 위상을 밑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을 통해 풍장의 전형적인 문법을 따르고 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작가 자신의 누드화가 아니라 벌거벗었다는 인상이 느껴지도록 연출한다. 존 버거가 말했듯 미술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누드화는 사실 벌거벗은 그림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의식과 관념, 시각적 관습의 옷을 입은 시선으로 벗은 신체를 본다.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의상화이다. 근대 이전의 ‘누드’가 신 또는 영웅과 같은 특별한 존재에게 입혀진 의상이라는 관념은 박필교 작가의 누드화도 일종의 작가의 의식과 시각적 관습으로 작가 자신의 자아에 ‘벌거벗음’이라는 옷을 입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작가는 유머와 풍자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벗은 신체는 거꾸로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이 우리 시대의 우월한 이데올로기나 우상 또는 관념적인 무언가를 쓴 채 보고 있다는 시각을 드러낸다.
박필교 <바리케이드> oil on canvas, 259.1×193.9cm, 2019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난 뭔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엿보는 특별한 존재라는 전통적인 예술가 상을 해체한다. 이러한 태도는 배우거나 경험에 의한 또는 후천적 노력에 의한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인터넷을 통해 세상을 접하며 성장한 세대가 취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로 보인다. 타고난 디지털시대의 세대가 지니게 되는 현실과 꿈, 상상과 이미지, 의식과 무의식, 예술에 대해 취하는 태도와 관계 또는 정의와 관련된다. 예술은 더 이상 세상을 바꾸고 우리의 의식을 바꾸는 영웅적 지위에서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직업으로 그 지위가 하강한다. 그것은 정보나 자본, 하나의 취향과 관련된다. 박필교의 이미지는 이러한 사회에 대해 반응하는 미적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
유머와 풍자 그 너머
여전히 우리사회는 금욕적 또는 강박적 유교적 도덕사회이다. 특히 신체와 성(Sex)의 문제에 있어서는 병적이다. 이중의 도덕적 잣대를 폭력적으로 적용하는 일종의 종교(유교)일치사회 처험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사회에서 이미지를 다루려는 젊은 세대는 무엇을 그릴 수 있고 또 어디까지 그릴 수 있을까?
박필교의 인물은 누드의 포즈와 피부의 컬러와 톤, 장소와 배경을 통해 차갑고 냉엄한 현실의 어떤 장소에 갇힌 인상을 준다. 벌거벗은 일련의 이미지는 등장인물이 작가 자신 또는 작가 자신을 빼닮은 젊은이의 뜬금없는 손짓과 발짓, 엉덩이짓을 보며 우리는 우리 시대의 청년들의 내면에 자리하는 사회와 인간관계에 대한 불신과 부조리, 불편과 불합리, 미래에 대한 어두운 인식 등을 오버랩하게 한다. 벌거벗은 인물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유머와 풍자가 기능하기에 너무 처연하다. 유머와 풍자가 분명 매우 효과적이며 미적인 표현과 소통의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박필교의 그림에서는 작가의 주장처럼 유머를 쉽게 느끼기 어렵다. 풍자는 더더욱 어렵다. 자연인으로서 작가와 상관없이 회화 속 벌거벗은 인물은 다시 옷을 입을 것이고 다시 무언가 새롭고 흥미로운 일에 몰두할 지도 모른다. 박필교 작가의 혐오와 불신의 풍자는 실상 바닥을 침으로써 다시 위로 튀어 오르는 힘으로 작동할지도 모른다. 작가들은 한 손에는 허영을 다른 한 손에는 도덕을 쥐고 현실과 일상을 허우적거리며 꿈을 꾼다.
박필교 <선율> oil on canvas, 130.3×162.2cm, 2019
전통적으로 ‘풍자’는 환상이나 그로테스크 또는 부조리를 기반으로 한 위트나 유머로 비판대상의 존재론적 지위 또는 도덕적 결함을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비판이나 공격의 대상이 자기 자신에게 회귀하는 운동을 보여주는 작업들이 현대예술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박필교의 작업 또한 이러한 흐름을 따르고 있다. 이는 니체나 실존주의를 떠올리지 않아도 20세기 초중반 세계대전과 함께 자본주의와 사회의 세속화가 전지구적으로 심화되면서 인간 자신에 대한 극도의 불신과 혐오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속적 현실의 가치를 따르는 삶의 겉면과 실존적 고독과 영혼의 문제에 결박된 삶의 내면이 불일치하면서 벌어지는 불안과 부조리이다.
2019년 9월에 열렸던 개인전의 <상냥한 도살자>라는 전시 제목 또한 결코 유머와 풍자로는 가둬둘 수 없는 깊은 슬픔과 불가해한 비극 또는 비참함이 있다. 20세 초 독일의 화가 게오르그 그로츠의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인물 초상이 연출하는 그러한 음울하고 스산하며 내일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품을 수 없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와 맞닿아 있다. 희망찬 21세기 Z세대의 몸을 빌려왔음에도 말이다. 청년세대가 밀레니엄을 전후해서 경험했던 피를 말리는 경쟁과 지속되는 저강도의 갈등, 폭력, 부조리가 내면화된 사회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의 초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