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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린의 전통공예이야기] 15. 조선후기 담배(煙草)문화와 입사공예(2): 담뱃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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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세린

  17세기 담배가 조선에 유입된 이후 담배와 관련된 각종 기물들이 발달했다. 날이 갈수록 흡연문화는 조선사회에 확장되었고, 사용자의 계층과 취향, 도구의 세부 용도에 따라 기물의 재질 및 장식, 크기도 차이를 보였다. 담뱃대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담뱃대와 함께 중국 및 일본에서 공무역과 사무역으로 들어와 국내에 유통되었다. 이러한 폭넓은 담뱃대의 소비와 유통은 조선 후기 다채로운 대꼬바리 형태와 장식기법으로 장식된 담뱃대의 성행 요인이 되었다. 아울러 사용자의 계층에 따른 사용 이와 같은 담뱃대와 연초와 관련된 주요 기물의 장식과 형태의 다각화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재료의 위계 및 가격, 사랑방, 서재 등 사용자, 사용장소, 향유배경 등 당대의 사회문화와 직결된 요소들이 요인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입사장식 담뱃대를 살펴보기에 앞서, 담뱃대 구조와 명칭에 대해 살펴보면 담뱃대의 제작기술은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제65호 백동연죽장 분야에서 제작기술이 전승되고 있다. 이에 백동연죽장의 전승기술과 조선시대 유물의 비교를 통해 현재 전해지는 담뱃대 유물의 제작기술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담뱃대는 크게 대꼬바리, 설대, 물부리로 구성된다. 담배잎을 넣고 불을 붙이는 부분을 대꼬바리, 연기를 입까지 통하게 하는 부분을 설대, 입으로 직접 연기를 흡입하는 부분을 물부리라 한다. 담뱃대의 구성과 각 구성별 세부명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1. 담뱃대의 구조와 명칭. 국립문화재연구소, 『백동연죽장』(민속원, 2006), p.28.


  담뱃대에서 입사장식이 활용되는 부분은 대꼬바리의 토리, 대통과 물부리의 초올기이다. 하지만 물부리는 입에 직접 닿는 부분이 아닌 초올기에만 주로 시문이 확인되지만, 대꼬바리는 토리에서 대통까지 연결되어 장식되기도 했다. 현재 백동연죽장 분야 역시 나무로 제작되는 설대의 낙죽기법과 함께 입사기법 중에서는 적동이나 오동을 박는 끼움입사와 문양이 음각된 부분에 납이나 수은, 에나멜 등 액체로 된 장식재료를 채우는 납입사(소상감)를 활용해 토리와 초올기의 장식한다. 현재 전해지는 유물 역시 거의 동일하며, 여기에 철로 대통을 제작한 후 쪼음입사로 장식된 사례가 더해진다. 


도2. 끼움입사로 장식된 담뱃대. <담뱃대>, 17-18세기, 국립민속박물관



도3. 끼움입사와 쪼음입사로 장식된 담뱃대. <은입사담뱃대>, 18-19세기, 경기대학교 박물관



도4. 납입사로 장식된 담뱃대. <곰방대>, 19세기 말-20세기 초, 경기도박물관


  입사장식이 간혹 이뤄지는 대꼬바리의 대통 형태는 원형, 육각형 등 다양한데 이는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당시 사용된 담뱃대의 대통이 밤톨 한 알이 들어갈 정도이지만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고 소개되어 있어 당시 담뱃대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사회에서는 신분이나 부의 척도에 따라 담뱃대의 길이와 대통의 재료, 장식이 나뉘었다. 조선 후기 문인인 이옥(李鈺, 1760-1815)이 담배와 연초도구, 담배문화에 대해 서술한 저서 『연경(煙經)』에는 당시 입사기법으로 장식된 담뱃대 대통에 대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세 겹으로 만들되 은과 구리를 섞은 것도 있고 은으로 테두리를 두른 것도 있으며, 은으로 대를 만든 것도 있다. 은으로 꽃을 아로새긴 것도 있고, 은으로 수, 복(壽, 福)자를 전서 글자체로 새겨 넣은 것도 있다. 풍속이 사치로 나아가고 장인들의 솜씨가 교묘해지면서 신기함을 다루고 교묘한 모양을 숭상한다. 따라서 그 제작법이 한 두가지가 아니므로 일일이 다 들지 못한다.”

  이러한 담뱃대의 대통장식은 당시 민간에서 유행했던 봉산탈춤 제6과장 양반춤의 말뚝이 대사 일부에서도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당시 입사로 장식된 담뱃대의 장식과 사회 통념적으로 구분했던 신분에 따른 담뱃대의 사용 양상을 보여준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19세기 말에 이르면 조정에서 화려한 담뱃대 장식의 성행에 문제를 제기하며 당시 백동, 황동제 입사 및 조각장식 대통을 금지하기도 했었는데, 여기에는 장인들이 판매를 위해 앞 다투어 장식을 보다 화려하게 한 까닭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조선 후기 입사장식 담뱃대의 제작 및 소비 풍조를 짐작하게 한다.


도5. <담뱃대와 재떨이 일괄>, 18-19세기, 경희대학교 박물관


  이와 같이 신분에 따라 담뱃대의 장식에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 중 하나는 조선 중기 이후 기존의 사대부층들과 함께 활성화된 상공업, 무역의 발달과 그에 따라 부를 기반으로 등장한 계층들을 중심으로 한 담배문화가 일정 부분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비천한 자는 존귀한 분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조관들이 거리에 나갈 때 담배 피우는 것을 금하기를 심히 엄하게 한다.” 라고 기록된 18세기 문인 유득공의 『경도잡지』 내용은 당시 담뱃대를 비롯한 담배문화와 제반 기물을 둘러싼 사회적 분위기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러한 내용들은 상류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입사로 장식된 담뱃대의 향유층과 사용상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백동, 유동, 은 등 위계가 높은 재료를 활용한 입사기법을 사용했던 이유도 시사한다.(계속)

글/ 김세린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8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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