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운검은 왕을 양 옆에서 호위하는 무사들이 사용했던 검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에는 의례를 할 때 왕의 양 옆에 서서 왕을 지키는 무신(武臣)들에게 별운검(別雲劍)이라는 임시직위를 주고, 좌측에 서 있는 무신을 보검(寶劍), 우측에 서 있는 무신을 운검(雲劍)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별운검은 현직 또는 퇴직한 무신들 가운데 명망이 높고, 공적이 뛰어난 고위 장군들을 위주로 선발했다. 이들에게는 왕을 보위하기 위한 검을 내렸는데, 이는 별운검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사하는 검 역시 동일하게 별운검(別雲劍) 또는 약칭으로 운검(雲劍)이라고 불렀다.
별운검은 대중에게도 익숙한 검으로, 사실 검 자체보다는 사육신(死六臣,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의 일화에 등장한 별운검 직위가 잘 알려졌다. 사육신은 세조(世祖:1417-1468)가 단종(端宗: 1441-1457)의 왕위를 찬탈한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상황을 원상복귀시키기 위해 일을 도모했다. 이들은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1456년(세조2) 명나라 사신이 세조의 책봉교지를 가져오는 연회에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 ?~1456), 박쟁(朴崝, ?~1456) 그리고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응부(兪應孚, ?~1456)가 운검에 뽑히면서, 이 자리에서 세조와 세자(懿敬世子, 德宗: 1438-1457), 세조의 측근대신들을 시해하고 명나라 사신에게 세조의 찬탈 사실과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거사에 동참했던 김질(金礩:1422-1478)의 배신과 이를 눈치 챈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계략으로 거사는 실패하고, 사육신과 운검으로 나섰던 성승, 박쟁은 처형당했다.
조선 사회에서 사육신은 왕실에는 역적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충신으로 인정받았고, 공식적으로 1691년(숙종17)에 복권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충신의 대명사로 통용되었었고, 1511년(중종6)을 시작으로 조정에서 꾸준히 사육신의 복원 문제가 제기되었다. 또 사육신의 거사를 상징하는 별운검은 왕실 의례의 의물이자 동시에 조선 사회에서 충(忠)과 함께 의로운 일을 행하는 의(義)의 상징물로 자리했다.
별운검은 국가에서 지정한 형식을 갖춰 제작되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의(五禮儀)에는 다음과 같이 별운검의 형식을 기록하고 그림(圖說)으로 이를 설명했다. 특히 그림으로 기록된 장검(長劍)의 형태는 현재 전해지는 별운검의 형태와 형식이 동일해 이 제도 안에서 별운검이 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세종실록 오례의 군례(軍禮) 검(劍)에 수록된 그림(圖說)
“『설문(說文解字)』에는 ‘사람이 차는 무기라고 한다. 지금의 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운검(雲劍)이니, 칼집은 물고기의 가죽(魚皮)으로 싸고, 칠은 주홍색(朱漆)을 사용하고, 장식은 백은(白銀)을 사용하며, 홍색 다회끈과 술(紅絛穗兒)을 드리우고 띠는 가죽을 사용한다.
-『세종실록』 오례의 군례 검”
여기에서 백은은 두 가지 형태로 사용했는데, 첫 번째는 검집의 몸체와 끝을 꾸미고 보호하는 용도로, 두 번째는 칼과 손잡이의 경계부분인 코등이와 검집을 입사로 꾸미는 용도였다. 코등이는 백은으로 장식하기도 하고 17-18세기 유물을 보면 금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현재 전해지는 입사장식 운검을 보면 철로 칼의 본체를 제작하고, 칠을 입힌 물고기 가죽으로 칼집과 손잡이를 감쌌다. 또 매듭으로 만들어진 끈과 끈목, 술이 손잡이에 걸려있다. 따라서 운검은 금속공예의 장식기법과 주조기법, 어피공예, 섬유의 매듭 및 다회공예가 결합되어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녹칠어피갑은장별운검>, 조선 17-18세기, 육군박물관
총 길이는 73-84cm 사이로 『세종실록』 오례의의 설명처럼 장검(長劍)에 속한다. 입사장식은 주로 검의 손잡이 윗부분 검과 손잡이의 경계부분인 코등이에 화문, 박쥐문이 장식되어 있으며 끼움입사와 쪼음입사가 병용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코등이가 철로 제적되어 쪼음입사로 장식된 경우가 다수이다.
<옥구보검(별운검)>, 조선 16-18세기, 독일 라이프치히그라시민속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