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4월17일-6월17일 국립중앙박물관
익산 왕궁리 5층탑 출토 사리장엄구 통일신라 8세기 높이 9.8cm 국립중앙박물관
6월17일까지 두 달간 열린 이 전시는 큰 성황을 이뤘다. 이같은 사회적 관심 외에도 여러 면에서 박물관 역사에 남을 의미가 담긴 전시이기도 했다. 첫 번째는 무엇보다 공전절후라고 할 만한 전시 규모다. 551점의 출품작 가운데 박물관 소장품은 경주, 부여, 공주박물관 것까지 합쳐도 절반이 안 됐다. 나머지는 민간의 개인, 기관에서 출품해 주었는데 불교유물은 내소사, 봉은사, 송광사, 통도사, 흥국사 등 5개 사찰이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대학 박물관은 경북대, 경희대, 고려대, 동국대, 동아대, 서울대, 이화여대가 유물을 빌려주었다.
그 외에 30여명의 개인 컬렉터들도 자기 일처럼 협조를 했는데 이 중에는 이병철, 박병래, 윤장섭, 전성우, 이홍근, 남궁련, 손세기, 홍두영 씨 등 67,70년대를 대표하는 컬렉터들이 들어있었다. 그외에도 고미술 시장의 일선에서 활약하면서 좋은 물건을 컬렉션하고 있던 김동현, 황규동, 차명호 씨 등도 기꺼이 전시출품에 협조했다.
청자철채퇴화점 나한좌상 고려 12세기초 높이21.3cm 선우인순씨 소장
개인 컬렉터 가운데 전형필 선생과 이병직 옹 두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이었으나 유족들이 박물관의 요청에 응해 유물을 대여해 주기도 했다. 특히 전형필 선생의 경우는 71년부터 간송미술관이 정기전시를 개최하는 등 공식 활동 중이어서 미술관 이름 대신 개인 자격으로 작품을 대여해 주었다. 반면 1867년에 이미 동원미술관을 설립해 운영 중이었던 이홍근 선생은 미술관 이름으로 작품을 빌려주었다.
삼국시대부터 구한말에 이르는 한국미술 전체를 ‘이천년’이란 말로 뭉뚱그려 단도직입적으로 소개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우리를 도와준 미국과 유럽에 한국이 문화의 나라였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한국미술 특별전이 기획된 적이 있다. 이때 전시 타이틀은 그냥 밋밋한 ‘한국미술명품’전이었다. 그런데 딱 부러지게 ‘이천년’이라는 말로 써서 듣는 사람은 누구나 구구한 설명 없이 ‘한국미술이 기원 무렵부터 시작되는 유구한 역사 지녔다’는데 자부심을 갖게 했다.
호우총 출토 청동합 고구려 415년 높이 18.5cm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세상일이 그렇듯이 여기에는 약간의 애교 같은 과장이 들어 있었다. 전시에 나온 유물을 전부 찾아보아도 2천년 이전에 해당되는 것은 없었다. 즉 기원 무렵의 유물이 출품돼 있어야 ‘이천년’이 명실상부한 말이 되는데 가장 오래된 유물은 5세기초에 제작된 청동 그릇(靑銅壺)였다. 이는 해방이후 우리 손에 의해 최초로 발굴된 경주 호우총에서 나온 유물이다. 특히 이 그릇의 밑바닥에는 ‘乙卯年國罡(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란 글이 써있어 광개토대왕을 기념하기 위해 415년의 을묘 년에 만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사정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천년’이라고 못 박아 누구든지 2천년에 이르는 장대한 문화민족의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본 만족감에 전시장을 떠났다. ‘이천년’의 작명자는 당시 학예연구실장인 것으로 전한다.
청화백자 매조문 호 조선 15세기 높이 16.5cm 홍두영씨 소장
두 번째 괄목한 만한 의미는 그때까지 학계는 물론 박물관에서 관행처럼 써오던 ‘이조(李朝)’라는 말과 깨끗이 결별한 데 있다. 이 전시에서는 도록은 물론 전시물 소개에서도 ‘이조’ 대신 모두 ‘조선’이란 말을 썼다.(더 정확하게는 조선왕조) 이런 태도가 그 전해 말에 유신헌법이 통과되면서 사회 전반에 한국식 내셔널리즘의 기운이 높아진 것과 연관이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전시를 기점으로 박물관 내에서는 더 이상 일제식 용어인 ‘이조’는 쓰이지 않았다.
또 하나는 규모가 규모이고 대상 범위가 넓었던 만큼 2겹의 자문단을 구성해 그의 조언을 들었다는 점이다. 우선 전시의 권위를 위해 학계 원로들로 구성된 고문단을 꾸렸다. 여기에는 김상기 서울대 명예교수, 박종화 예술원원장, 이병도 학술원원장, 이선근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이희승 단국학교 동양문화연구소장 등 5명이 모셔졌다. 이들이 전체 전시에 대한 자문에 치중했다면 하나하나의 작품을 선정하고 구성하는 일은 한국미술이천년전 위원들이 맡았다. 여기에는 김원룡 서울대교수(이하 당시 직함), 김임용 문화재 관리국장, 김재원 초대관장이자 학술원회원, 임창순 문화재 위원, 전성우 동성학원재단 이사장, 조명기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원장, 진홍섭 이화여대교수가 위촉됐다. 그리고 박물관 측에서 황수영 관장과 최순우 학예연구실장이 참여했다.
이들이 선정한 551점의 작품은 구체적으로 보면 불교조각 71점, 불교공예 22점, 금속, 목조, 석조 등 일반 공예 38점, 토기와 와전 36점, 고려 자기 129점, 조선왕조 자기 157점, 조선왕조 회화 89점, 서예 3점, 사경 및 불화 6점 등이다. 전시에서는 이들을 7개 파트로 나뉘어 소개했다.
각 분야의 국보, 보물급 유물 총망라
이렇게 선정된 출품작은 훗날 상당수가 국보, 보물로 지정됐다. 불교 조각은 대표적인 <금동 계미명 삼존불>을 시작으로 대표적인 고구려 불상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비롯해 삼화령 애기불이라는 애칭이 있는 석조보살입상 그리고 석조금강역사 두상, 백율사 약사여래입상 등이 소개됐다. 이 가운데는 국보로 지정돼 있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 2점이 모두 출품되기도 했다.
불교 공예에는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의 간판 소장품 중 하나인 높이 155cm에 이르는 대형 금동대탑이 이병철 회장 이름으로 출품된 것을 비롯해 불국사 석가탑 내에서 발견된 금동제 사리외함, 금강경 금판을 포함한 익산 왕궁리 오층탑 내에서 나온 사리장치, 창녕4년명(1058년) 고려범종, 차명호씨 소장의 청동은입사 사자뚜껑향로 등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