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는 박물관, 미술관 활동의 꽃이다. 상설 전시 이외에 특별한 시기에 특별한 테마로 개최하는 특별전과 기획전은 이들 가운데서도 꽃 중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보기 힘든 유물과 작품들이 이때 대거 일반에 소개된다. 그리고 외면되었거나 덜 조명을 받았던 여러 분야에서도 새로운 가치가 재발견되고 또 인정을 받기도 한다. 이왕가박물관부터 헤아리면 한국의 박물관 역사는 벌써 110년에 이른다. 국립중앙박물관을 포함한 공사립 박물관들이 개최한 수많은 전시들은 그동안 한국미술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키고 연구의 폭이 깊게 넓혀온 여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3년 동안 박물관맨으로 활동했던 이원복 前관장과 미술전문기자를 거쳐 경매회사와 대학강단 등에서 활동한 한국미술정보개발원의 윤철규 대표가 함께 한국미술의 지평을 넓혀온 기억 속의 유명 전시를 소개하는 새 연재를 시작한다.
<한국명화 근오백년전>
국립중앙박물관 1972년11월14일-12월22일
지금 들으면 놀라겠지만 한때는 외국영화도 한 2년쯤 지나야 서울에서 볼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모닝 애프터’라는 노래로도 유명한 해양 재난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처’는 호화 유람선이 해저 지진으로 뒤집히고 아수라장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가운데 극소수의 사람들이 용감하고 헌신적인 리더 덕분에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는다는 내용이다.
곳곳에 굶주림이 남아있던 시절, 호화로운 유람선은 언감생심이지만 현실처럼 보이는 극한의 생존 투쟁에 이끌린 때문인지 영화는 국내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가 서울 변두리 극장에 상영된 것은 1972년 영화가 제작되고 나서 2년쯤 지나서였다.
그만큼 한국은 변두리였다. 사회 전체가 그랬으니 박물관만 특별히 사정이 나았다고도 볼 수 없었다. 1972년 한국은 매우 복잡했다. 그 전해 박빙의 대통령 선거를 치르고 3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감쪽같이 북에 보내 7.4 남북공동성명을 체결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남북의 공식 첫 대면이라는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8월 들어 시장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8.3 사채동결조치가 선포됐다.
작자미상 <이항복 초상> 지본채색 35.2x59.5cm 서울대학교 박물관
이 조치의 정식 명칭은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이었다. 연50%가 넘는 고율의 사채 이자에 부도 일보직전까지 내몰린 기업들의 읍소에 귀를 기울여 일체의 채무변제를 강제로 정지시킨 것이다. 그리고 신고한 사채에 대해서는 월 1.35%(연16.2%)의 이자만 주면 되도록 했다. 당시 연간 물가상승률이 15%였으므로 말하자면 거저로 돈을 빌려 쓸 수 있는 조치를 기업에 베푼 것이나 다름없었다.
피해를 본 사채업자들에 야권 그리고 일부 동조세력들이 가담해 극심하게 반발하면서 정국이 꼬였지만 이것은 오히려 다가올 사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두 달 뒤인 10월17일 한밤중에 국회해산과 헌법정지 등을 골자로 하는 대통령 특별선언이 발표됐다. 그리고 곧장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이것이 10월 유신의 시작이다. 박정희는 그해 11월21일 국민투표를 실시해 유신헌법을 확정하고 이어 12월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로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27일에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해 제4공화국이 출범했다.
정치 사회가 이렇게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시절에 오늘날의 모습의 거의 대부분을 갖추었다. 우선 이해 7월1일부터 명칭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박물관은 해방 이후 당시까지 죽 국립박물관으로 불렸다. 그리고 덕수궁 석조전에 있던 박물관은 이 해 여름 경복궁 안에 새로 지은 건물로 이사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존 건물이 아니라 새 건물을 단독으로 지어 독립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박물관 건립사업은 실은 이보다 훨씬 앞서 1966년부터 시작됐다. 주무부서는 문화재관리국이었다. 그런데 이때 이상하게도 ‘특정한 문화재의 외형을 모방하라’는 설계 조건을 내걸어 대다수 건축가들의 반발을 샀다. 많은 건축가들이 이 현상 공모를 보이콧한 가운데 강봉진 안이 채택돼 결국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에 화엄사 각황전 그리고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모습까지 보이는 박물관이 지어졌다.
정선 필 <인곡유거> 지본채색 27.3x27.4cm 故전형필씨 수집품
첫 삽을 뜨고 6년 만에 완성된 새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1층 지상 3층 규모였다. 덕수궁 석조전에 비해 훨씬 크고 넓어 부지면적만 해도 1만2,850평에 달했고 연건평 4,250평에 1,390평의 진열실을 갖췄다.
이전 준비는 5월말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6월24일 정식으로 임시휴관 조치가 내려지면서 전 직원이 모두 이전 작업에 매달렸다. 당시 관장은 동국대 교수로 있다가 선임된 황수영 관장이 맡고 있었다. 7만여 점의 유물을 옮기는 大작업은 간단치 않아 먼저 7천여 점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우선 1차로 이들부터 옮겨 8월말 개관에 맞추는 것이었다.
8월25일 새 박물관 앞뜰에서 마침내 개관식이 열렸다. 경복궁 담장을 헐어 만든 정문에는 이미 이틀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 당연히 대통령 박정희가 직접 썼다.
이날은 아침부터 날이 흐리고 온종일 비가 왔다. 기온도 한여름치고는 서늘해 아침 최저기온이 17.6℃ 밖에 안됐다. 최고기온 역시 22.9℃였다. 아침나절 비가 잠깐 개어 이때 개막식이 열렸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나란히 서서 개관 테이프를 끊었다. 그 옆에 윤주영 문화공보부장관과 황수영 박물관장이 한발 물러서서 이를 지켜보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