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5. 30
이원복 김상엽 조은정 김진녕 윤철규
윤철규(이하 윤) 바쁘신데 귀한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선생님들을 모신 이유는 최근, 특히 작년부터 민화가 전시나 시장 쪽에서 주목받는 현상에 대해 한번 고견을 들어보고 싶어서입니다. 미술사에서 민화가 차지하는 범위도 변화하는 조짐도 보이는 것 같구요. 학계에 계시지만 현장을 많이 지켜보셨으니까 객관적인 시각으로 얘기해 주실 수 있을 겁니다. 작년에 주목받았던 민화 전시가 무엇이 있었죠?
김진녕(이하 J. 김)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했던 <판타지아 조선>이 세종문화회관 미술관과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으로 이어졌죠. 갤러리 현대와 현대화랑 전관에서 <민화, 현대를 만나다 - 조선시대 꽃그림> 전이 큰 호응을 얻었구요. 대중의 인기를 끌었던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의 <조선, 병풍의 나라>에도 민화가 꽤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윤 그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이나 다른 서화 전시실에서도 민화가 포함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진 것으로 느껴집니다.
조은정(이하 조) 그 이전에 2016년 겨울 호림박물관에서 <그림 속 삶과 꿈, 민화> 전시도 있었죠. 작년에 열렸던 전시를 돌이켜볼 때 먼저 ‘민화’라는 용어에 대한 규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민화 전시에 궁중장식화 같은 것이 포함되기도 했었구요.
윤 민화의 정의는 작지 않은 문제죠. 대개 민화의 범위나 성격을 규정할 때 무명성, 장식성, 지방성 등을 거론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정의보다는 고급 미술이 일반으로 내려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그림으로 정리합니다.
이원복(이하 이) 민화를 조선말기 중인 미의식의 확장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김상엽(이하 S. 김) 본격적으로 민화라는 것이 전시의 주인공 대접을 받은 것이 1983년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민화걸작전>이 아닌가 싶습니다. <민화걸작전> 도록에 실린 안휘준 선생님의 「한국민화산고」가 민화를 미술사의 대상으로 다룬 첫 번째 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윤 대표님 말씀처럼 상층 미술의 침강, 하향, 또는 저변화 등의 시각이 있을 수 있고, 민중론자들의 시각으로 역사학에서 나오는 이른바 경영형 부농 등이 상층미술을 획득하고 성취해 나간 것이라 보기도 합니다. 편의적이고 또 단순한 분류 방법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시각 또는 아래에서 위로 성취해 나아갔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홍선표 선생님은 민화가 특정한 계급에 국한된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범계급적 장식품, 치레물이라고 보셨습니다. 『안휘준교수정년퇴임기념논문집 –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1 한국 및 동양의 회화』(2006)에 보면 홍 선생님의 논문 「치장과 액막이 그림 - 조선 민화의 새로운 이해」에서 치레물과 상징물의 개념으로 논지를 확장하고 보완하셨습니다. 민화가 단지 서민들만의 그림이 아니고 양반층도 사용했던 범계급적 장식물이라는 것입니다. 궁중/민간, 양반/서민, 이런 식으로 이용 계층을 나누다보면 지나치게 한정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이 부분이 조자용, 김철순 등 민화 애호가들의 입장과 다른 점이죠.
이 민화가 제도권 내 국립박물관에서 최초로 전시된 것이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민예미술대전>(1975)인데, 거기에는 최순우 선생님의 개인 컬렉션이 일부 포함되어 있으며 대부분 개인소장품입니다. 그 때 포함된 그림들을 보면 여타의 다른 민화전의 작품 목록과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록 서문을 보면 민화를 민중미술이라고 정의해 놓았습니다. 어딘가에는 ‘국민화’라는 말도 쓰지만 그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윤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민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민화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서는 다시 논의될 여지가 많습니다.
S. 김 예전에는 채색화이기만 하면 민화라고 여기기도 했죠.
이 초기의 글들, 즉 고단샤에서 나온 이타미 준의 『이조민화』(1975), 경미문화사에서 나온『한국민화』(1977), 고단샤에서 펴낸 이우환의 『이조민화2』(1982) 등과 윤범모, 정병모, 윤열수 선생님 등이 최근에 펴낸 『한국의 채색화』(2015) 등을 참조하면 민화의 개념 변화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울러 강우방 선생의 민화 접근 방법론도 주목됩니다.
윤 이동주 선생은 조선시대의 그림을 의식 기록에 중점을 둔 장면화와 좀더 감상에 초점을 맞춘 화면화로 나누어 설명한 적이 있기도 합니다. 이때 사대부 문인들이 감상의 주체가 됩니다. 어느 정도 경제적인 토대가 만들어지면 그 사회에는 문화를 향유하려는 계층이 늘어나게 마련이죠. 이에 맞춰 미술품 생산도 늘어나야 하는데, 이때 화가의 수가 늘기도 하고 특정 기법이 보급된다든가 하여 미술품의 생산 수단이 개발되는데, 예를 들어 판화가 있습니다. 서구는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판화가 이 수요를 감당했는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판화가 전격적으로 등장하지를 않았어요. 우리에게 민화가 발달한 배경에는 감상을 위한 그림을 빨리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어디선가 나타나서 그들이 그 수요를 충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회화 예술이 요구하던 내재적 규칙을 따르지 않구요.
조 사실 민화에 대한 이해가 연구자 별로 다르고, 감상하는 사람들도 서로 너무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화에 대한 종합적인 이야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용어의 등장이나 기초적인 개념 등 다른 걸 제하고 ‘민화’라는 용어를 들여다보자면 주체성, 계급성을 띠고 있습니다. ‘민(民)’이라고 했을 때 민화는 민에 의한, 민을 위한, 민들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죠. 생산부터 소비까지. 또 그러한 그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장식성, 상징적 의미는 예전 궁중과 양반 계급이 공유했던 것들입니다. 결국 일정 양식, 스타일을 보여주게 되면서 ‘책가도, 문자도 이런 것들을 민화라고 한다’라는 암묵적인 동의 아래서 민화라는 개념이 형성되어 간 것입니다. 민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처음 명명이 잘못됐다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림의 생산과 소비 주체가 그 이름에 들어간다면 상대적으로 양반의 그림 ‘반화’라는 개념이 존재하느냐 하면 그렇다고 보기도 어렵죠. 결국에는 시대적 배경으로 정통의 기득권과는 다른, 자생력을 지닌 그림,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상층부의 미술과는 다른, 주체성을 찾아내려는 욕망에서 민화가 더욱 우리 고유의 그림으로 입지를 다진 것이 아닐까요.
윤 민화의 ‘민’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 사람은 러스킨을 전공한 사람이고 영국의 크라프트 운동을 목도하고 일본에서 1910년대 초에 일어나던 현상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름없는 사람들이 만들어 쓰던 물건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민예’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민예’와 같은 개념을 그림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그 그림은 ‘민화’라고 할 수 있겠다고 했죠.
조 민화가 판매되기 시작한 시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1965년에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고 나서 일본인 관광객들이 인사동 등지에서 민화를 많이 사가기 시작했어요.
이 일본 관광객들을 중심으로 민화가 많이 팔렸고,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까지 길거리에서 민화를 파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어요.
조 당시 운보 김기창의 글 등에서 볼 수 있듯 많은 사람들이 외국 사람들에게 민화를 팔지 말자는 목소리를 냈죠. 왜 그랬을까. 우리 내부에서 왜 민화에 주목하게 됐을까라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70년대의 민학회, 80년대의 민중미술처럼 우리 현대사에서 ‘민’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기득권이 아닌 것에서 우리의 고유의 것을 찾고자 하는 욕망이 결합된 언어가 ‘민화’이기 때문에.
윤 서양에도 포크아트가 있었지만 미술사에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주체의 문제에서도 생산, 소비에서 단일한 계층이 포함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가집에서도 대청마루에 민화 병풍을 올려놓기도 했을 겁니다.
조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가 찍은 기록영화의 결혼식 장면에서 마을 사람들이 결혼식을 재연하면서 초가집 마당에 병풍을 세우는 장면을 본 것도 기억나네요.
윤 수표교 밑에 잔치 때 마다 병풍 빌려주는 집이 있었어요. 정식 화가가 그린 것이 아닌 다소 조잡한 것들이었습니다. 대가집에서 사용하던 것과 민간에서 사용하던 것까지 많은 스펙트럼이 있고, 이들을 구분할 때 형식과 주체가 모호해서 경계에 대한 정리는 쉽지 않습니다. 민화에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모아 이야기하는 수밖에는 없을 텐데 까치호랑이, 책가도 중에서 대형 병풍이 아닌 낱폭으로 되어 있는 것, 문자도, 속필로 그린 산수화, 화조화 같은 것이 대표적인 민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도화서 외의 화가 양성 기관이 없어 재능이 있어도 배울 곳이 없었는데 이러저러한 사회적 필요에 의해 동네마다 무허가로 자생적으로 성장한 사람들 그룹이 있었던 것입니다.
조 이태호, 유홍준 선생님의 『문자도』책에도 장인 그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강원도 쪽에 문자도 장인 그룹이 있었던 것 같고, 전주 쪽에는 화조화를 전문으로 하는 그룹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윤열수 씨의 논문「문자도를 통해 본 민화의 지역적 특성과 작가 연구」(2006)가 그런 내용을 담고 있죠.
윤 요즘 민화가 점차 그 입지를 넓혀가는 와중에 미술사 민화 전공도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이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 석사 전공이 생겼습니다. 그 외에도 요즘 민화를 배우는 인구가 많아져서 서예 인구보다도 민화 인구가 많다고 합니다. 정확한 숫자는 아니겠지만 민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10만 이상이 되고 협회만 여럿에 이릅니다. 민화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는 사실 자체는 고무적인 일입니다. 아직 정리가 필요한 부분도 많지만.
S. 김 민화 붐은 3공화국 때 국가의 교육 이념이 ‘민족문화’, ‘국적 있는 교육’ 등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일어난 측면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개인적 경험인데요, 80년대 대학 다닐 때 탈춤을 추며 사회를 비판하는 탈춤동아리의 활동이 활발했습니다. 당시에 탈춤은 민중 속에서 자라나 민중과 함께 한 운동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한참 나중입니다만 동아대학교 사학과 이훈상 교수가 탈춤에 대하여 쓴 글을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훈상 교수는 연구를 시작할 즈음에는 탈춤이 민중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탈춤을 채록하고 그 사람들을 직접 쫓아다니며 알게 된 것이 탈춤이 서민의 놀이가 아닌 중상층이 향유했던 문화라는 것입니다. 이훈상 교수의 글을 읽은 후 탈춤이 민중의 것이라는 환상이 깨졌지만 무언가 본질에 들어간 느낌이 있었습니다. 이런 잔상이 남아 있다가 민화를 보는데 그것이 오버랩 되더군요. 민화를 민중, 서민의 것이라고 하지만 제작자도 향유층도 그렇게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고, 그 이전의 장식화들도 단순한 감상과 향유라기보다는 기원이나 소망, 바람 같은 간절함을 담은 것이죠. 2013년 경주민화포럼에서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의 우키요에 연구자인 기시 후미카즈(岸文和) 교수는 “민화를 ‘행복화’라고 명명했으면 좋겠다”면서 “세계 어느 나라 그림을 봐도 민화만큼 행복을 간절히 추구한 예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당시 심포지엄에 참석한 분들이 행복화라는 생경한 단어에 이질감을 느껴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수긍하기도 했습니다.
윤 한자문화권에서 특히 중국에서 길상 이미지는 아주 중요하죠.
조 그렇다면 지금 왜 민화인가가 다시 문제인데요.
윤 아까 얘기됐던 것처럼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사람들이 인사동에 와서 도자기나 민화 등을 많이 사가지고 갔고 비슷한 시기에 주한외교관 등 서양 사람들도 휴일에 나와서 그림들을 찾았어요. 인사동 가게에서는 민화 뿐 아니라 산수화를 비롯한 전통 회화들이 다 있었는데, 그 사람들에게 그런 수묵화는 인기가 없었어요. 이해가 어려운 것 말고 ‘한국적’ 토산품으로 이색적인 것을 구입한 것이죠. 왜 지금 이 시점에 민화를 끄집어내는가는 ‘한국적 아이덴티티’에 대해 알게 모르게 고민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올라왔지만 문화적으로 우리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대하면 대륙의 변방에서 전해져 오는 것에 크게 영향받은, 근대 자체는 통째로 이식된 문화적 자산에 의구심이 생기고 욕망이 생기는 것이죠.
조 수요자 입장에서 먼저 민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예술가들입니다. 항상 예술가들이 일반을 앞서가게 마련이고 그들의 자각이 보이는 부분이에요. 운보 김기창이나 장욱진이 민화를 수집하고, 박생광의 경우처럼 한국 화가들에게 민족미술의 구현이나 정체성 문제의 실마리로 민화가 채택된 부분이 있습니다. 김용준처럼 수묵의 전통을 찾아간 예가 있고, 채색화의 길을 찾아간 그들이 있고. 그런데 채색화의 경우 쉽게 왜색으로 몰려 버리니 그걸 벗어나기 위해 거칠고 아이같은, 과감한 표현의 민화적 요소가 도입됐을 겁니다. 민중미술가 오윤은 전통이라고 하면 김홍도, 정선 같은 것만 포함되지 무속화나 불화, 민화 같은 하잘 것 없는 것은 맥락 안에 넣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억압된 것들을 복원하고자 하면서 민화에 주목하고 그 스스로도 까치호랑이, 문자도 등을 시도했습니다.
윤 그간 한국미술사에는 민화를 편입시기키 주저한 면이 많았죠.
조 제가 논문을 쓰던 무렵에는 안중식이나 조석진 논문을 쓰겠다고 해도 연구 대상이 아니라며 안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2000년대에도 석사 과정 학생이 민화를 주제로 수업시간에 발표를 하니 교수님께서 심하게 언짢은 티를 내기도 하셨습니다. 21세기에도 정식 연구대상이 되기 어려웠어요.
윤 민화의 특성상 편년도 어렵고 작가도 없고 양식도 반복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일리 있는 것이긴 합니다.
이 70-80년대에 미술전 심사에서는 운보, 이구열, 이경성, 천경자 선생들이 당선작을 하나같이 무채색 중심으로 뽑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본인들 작품과는 달리.
J. 김 호작도와 목판화가 불려져 들어오던 80~90년대 미술과 현재 민화 시장의 형성과 소비는 맥락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현재의 시장에서 문화교실이나 센터에서 반복적으로 양산되는 테크닉 위주의 교육이 시장 형성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보여져요. 이것은 예전 민족주의에 과하게 경도되었던 시절의 민화의 등장과 역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죠. 관습을 전혀 벗어나지 않고 복제되는, 어찌보면 마이너한 대중적 민화의 생산도 한 시대상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S. 김 미술사학자 들의 글에서 ‘정통 회화’라는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그 외의 다른 그림들은 마이너가 되어 버립니다. 최근 미국의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하는 한국인 교수와 이야기하며 들은 이야긴데, 미국 연구자들은 문인화에 넌더리를 낸다고 합니다. 도무지 접근을 할 수가 없는데다 재미도 없다는 거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념성 강한 흑백의 산수화는 공부를 깊이 있게 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데, 채색화는 즉물적이고 요즘 미감에도 맞고 수수께끼 푸는 것 같은 같은 재미도 있죠. 서구에서도 이 방면에 대한 수요는 계속 있을 겁니다. 문인화에 비한다면 말이죠. 시대는 변해 가고 심지어 대학에 민화 전공이 생겼다고 하는데, 기법이나 작법 면에서의 발전과 같은 상승작용 없이 일부러 못 그린 척 한다거나 완성도가 낮아야 하거나 소박하다는 말로 평가를 얼버무리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조 동시대의 민화 작가들 가운데는 욕망 코드를 불러와 옛 사람들이 욕망했던 기물을 현대인의 명품 등으로 대체해서 그리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일종의 소재주의로 민화를 이용하는 양상도 있는 것이죠. 반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대전에 민화들이 상당히 출품되는데, 20여 장이 다 똑같은 경우가 많아요. 같은 선생님 아래 같은 밑그림으로 배운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장식적 테크닉을 자신의 것으로 해서 새로운 상상력을 가미한 작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J. 김 잘 그리든 못 그리든 그 안에서 민화만의 코드를 느끼면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이야기를 넣지 않고 배운대로만 똑같이 그려내는 것은 좋다고 볼 수 없죠.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베끼기만 하더라도 그 안에서 자기 얘기를 하는 작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의미있는 시대상이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형문화재 시스템처럼 그대로 잇기만 해서 고착되어 가는 것은 고민해봐야 할 문제구요.
이 처음부터 다 엘리트 문화였던 것은 아니죠. 재즈도 바로크도 지금와서 숭상받는 예술의 형태도 그 시대에는 다른 모습이었구요. 다만 조선시대 수묵담채화란 일반감상화의 흐름이 있고, 불화와 초상화 각종 궁중장식화 등 채색화의 두 흐름이 공존합니다. 전자는 베낀 그림이라서, 이것은 왜색이라서 또는 우리만의 것이라서 이런 식의 극단적인 논리는 지양되어야 하겠지요. 민화 열기 그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정리가 필요합니다. 자정 과정을 거쳐야겠죠.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이태원에서 삼각지에서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 옛날 그림들 보수하던 사람들, 소위 천안파 등 당시에 만들어진 가짜들 등 천태만상이 있지만 부정으로만 보지는 않습니다. 민화를 좁은 개념으로 보지 말고 어떤 장르나 경향으로 인정되고 자리매김에 대해 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수많은 화원들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기억되는 사람들은 새로운 화풍을 이룩한 화가들이죠. 민화의 역할은 일정시기의 양식으로 자리매김하고 그것이 또 다른 시대에 공감을 주었다면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진경산수도 따지고 보면 그런 면이 있구요.
S. 김 현대 작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작품들 말고, 옥션에 출품되는 민화가 많이 늘었는데 그것이 아주 높은 가격으로 팔리는 것에 대하여 우려가 큽니다. 사실 옛 그림의 매매는 시대와 작가 등 감정의 문제로 논쟁이 될 여지가 많지만 민화는 높은 거래가격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어렵습니다. 기준작이라는 것도 많지 않고 판단의 근거도 불분명하니 유사한 중국의 것에 덧칠한 것이 우리 것으로 탈바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회화에 비하면 논란의 여지가 훨씬 적다는 점에서 매매하는 쪽에서 편리할 수 있다고 봅니다.
J. 김 감정이 어려운 부분이라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죠. 경매에 나온 민화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는 듯합니다.
이 그에 대해서는 걱정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결국 남을 것만 남으니까요. 거품은 결국 빠지게 마련이죠.
조 진위에서 해방되어 가짜든 뭐든 좋아서 사면 되는 것이죠. 이원복 선생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시대에 따라 새로운 양식이 나타나게 마련이지만 한국미술에서는 양식이라는 부분이 거의 없다시피 했었죠. 어디에서 시작됐건 정식 화가들이 민화를 모티브로 삼는 것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양식 같은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윤 미술사에서도 이제 민화를 적절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의 그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까 말이죠. 정의에 대해서도 학술대회 같은 것을 통해 좀더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죠.
S. 김 민화는 충분히 매력이 있는 분야입니다. 음식에 비하면 인스턴트식품 같다고 할까요. 감추고 숨기는 것 없이 단맛, 짠맛 등 여러 맛을 숨김없이 눈앞에 죽 펼쳐 놓는 듯합니다. 게다가 현대적인 미감을 가지고 있다는 장점이 큽니다. 다만 가장 큰 문제점이라면 ‘서민의 그림’ 또는 ‘민(民)’이라는 데에 너무 집착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민화라는 단어를 만든 야나기 무네요시조차 우리가 현재 느끼는 것과 같은 시각을 가졌을지 조차 분명치 않은데 말이죠. 민화의 개념 규정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출발선과 골인 지점이 제각각인 중구난방의 경주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그리고 요즈음 구청 문화교실마다 민화반이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고 민화 관계 협회가 여러 곳이 난립하고 있으며 심지어 대학에 민화 전공이 생겼습니다. 한마디로 장사가 되니 사람과 돈이 몰리는 것이지요. ‘민화현상’이라 할 만합니다. 민화현상은 긍정적인 점보다 걱정되는 면이 많습니다. 여러 문제점이 있지만 비슷비슷한 소재의 작품을 반복하는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띕니다. 중국에서는 스승과 똑같은 글씨를 쓰면 파문된다고 하지만, 우리는 정반대입니다. 창조가 아닌 반복의 원인은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서입니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이 없으니 다른 관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포용하지도 못하는 것이지요. 서예에서 그런 퇴행적인 면을 보았는데 이제는 민화에서도 그런 잘못을 답습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듭니다. 지금은 한참 붐을 타고 있지만 잘못하다가는 미술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할 기회를 스스로 날리게 되는 것 아닐까 걱정이 든다는 말씀입니다. 예술로서 그 가치가 계속 인정되려면 인문적 상상력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 민화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적어도 기본의 일반의 전통 회화를 중국 것으로 돌리고 민화만이 우리 민족의 것으로 여기는 시각은 잘못된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우리의 옛 그림들이 중국 그림과 같다는 사람들은 우리 그림을 잘 모르는 이야기죠. 붐은 사라질 수도 있고, 그런 가운데서도 다시 민화를 찾을 사람은 있습니다. 민화를 그리는 사람들에 의해 그것이 어떻게 이어질지에 대한 얘기는 차치하고, 한쪽으로 치우쳤던 일반 미술사의 잘못된 시각에 대한 변화 조짐이 있는 듯합니다. 좀 더 욕심을 낸다면 전통 회화에 대해 보다 더 천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우리의 미적 본질, 연구 성과, 특징을 이론적으로 세워 나가야 합니다. 이에는 작가가 아닌 학자와 평론가들의 역할이 중요하겠지요. 미술사학자들이 많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긍정적인 요소인데, 현대미술에서 다루고 있으니 편입시키지 않을 수 없죠. 안개 낀 것 같은 상황은 수많은 학자들의 공동작업 통해 벗겨낼 수 있다고 봅니다.
조 민화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전시들이 조명받는 것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었겠지만 우리 사회가 완전히 자본주의 시스템에 들어간 결과라는 생각도 합니다. 민화는 현대인의 욕망 노출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예술이라고 하면 교양, 성찰, 억제, 승화, 숭고 이런 부분이 깔려 있었는데 거기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는. 나의 욕망구조를 예술의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는. 즐거운. 그래서 이 시대에 민화가 각광받고 조명받는 면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J. 김 우리가 수입해 온 외국의 사조들과는 달리 자생적인 문화 흐름이라는 데에 주목합니다. 시장 내부의 수요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기점이 아닐까 합니다. 70년대 목판화, 프로파간다 형의 걸개그림에 민화의 영향이 있었구요. 앞으로 의미 있는 발전을 위해서라도 이들을 하대하고 무시할 게 아니라 상에 늘어놓아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생활을 관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요.
윤 어려운 주제였는데 좋은 이야기 많이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화 속에 그 시대와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부분이 큰 것은 사실입니다. 미술사 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학적 틀을 통해서도 과거의 민화와 현재의 재생산과 관련된 현상에서 한국의 문화적 성격을 정리해낼 수 있게 된다면 큰 자산이 되겠지요.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