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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린의 전통공예 이야기] 6. 명확한 계측의 중요성: 입사로 표식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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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길이와 무계를 계측하는 일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이에 관련된 단위 즉 도량형의 통일과 기구 제작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했다. 특히 기구는 정확한 계측을 위해 단위별로 명확하게 표시하는 것에 신경을 썼다.

자를 보면 세종(재위 1418-1450) 때부터 꾸준히 도량형을 정비해 최대한 통일된 단위 길이로 계측하고자 했다. 그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표준 척에 대한 논의가 일찍부터 꾸준히 거론되고 있다.

도량형은 집을 짓는 큰일에서부터 옷을 짓거나 공예품을 만드는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두루 필요했으므로 용도와 용처에 따른 다양한 자가 만들어졌다. 기본적으로는 국가에서 지정한 표준 척이 사용됐지만 특정한 분야에서는 고유의 치수 단위가 반영되기도 해 완전히 통일된 표준 척은 사용되지 않았다.

현재 전해지는 조선시대의 자 유물은 나무, 돌, 뼈, 금속 등 여러 재료로 만들어졌다. 그 중 나무로 제작된 것이 가장 많다. 대나무나 나무에 가열한 인두로 단위를 검게 그을려 표시하는 낙죽(烙竹)이나 음각 기법이 주로 활용됐다. 또 검은 옻칠을 입힌 뒤 자개를 붙이는 나전기법도 쓰였다. 대체적으로 음각을 하거나 색채 대비를 통해 표식 효과가 분명하게 두드러지는 기법이 쓰인 것이 특징이다. 이는 금속, 돌, 뼈로 제작된 유물에서도 동일하게 쓰였다. 재료간의 색채 대비가 뚜렷한 입사기법은 금속으로 제작된 자에 널리 활용됐다.

금속 자는 주로 동이나 철로 만들어지는데 입사 또는 음각으로 새겨 단위를 나타냈다. 입사는 정교한 음각에 장식재를 끼워 넣는 끼움입사와 표면 전체에 마치 그물이나 섬유질처럼 많은 음각을 한 뒤 필요한 곳에 장식재를 박아넣는 쪼음입사가 쓰였다.
끼움입사는 동, 철로 만든 모두 쓰였고 쪼음입사는 철로 제작된 자에만 활용됐다. 입사로 단위를 나타낸 자에는 명문이 있어 정확한 용도는 물론 사용 계층이난 제작 목적이 확인되는 사례도 있다. 명문이 들어 있는 자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국가에서 사용한 도량형 기준으로 쓴 것이나 왕이 하사한 자다. 사례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철제은입사자(鐵製銀入絲尺)>가 있다. 이 자는 정조 20년, 즉 1796년 음력2월 초하루에 정조가 공경대부와 가까운 신하들에게 하사한 자로 추정된다. 국왕이 신하들에게 자를 하사하는 것은 당나라 덕종(재위 779-805)때 중화절(음력 2월 초하루)을 맞아 농사를 살피는데 힘쓰고 농서 편찬에 전력을 다하라는 뜻으로 관료들에게 중화척(中和尺)을 하사한 데서 유래한다.

정조 역시 같은 뜻으로 관료들에게 자를 하사했다. 자에는 눈금과 명문이 끼움입사로 시문돼있다. 자에 새겨진 한 눈금의 길이는 대량 5cm로 큰 단위는 자의 폭을 가로질러 입사하고 세부 단위는 자의 변 끝에 짧게 시문했다. 명문 내용은 정조가 직접 지은 시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御製中和尺

 중화절에 자를 반사하여(頒尺中和節) 조서가 궁궐로부터 내려가네(紅泥下九重)
 북두를 향해 별들이 늘어서고(拱星依紫極) 기장을 포개 황종률에 맞추네 (累黍叶黃鍾)
 한제는 삼척검을 들었고(漢帝提三日) 진군은 백척루에 누웠다(陳君臥百容)
 경들이 오색 실을 마름해(裁來五色線) 내 곤룡포를 깁도록 허락하노라 (許爾補山龍)



<철제 은입사 자> 1746년 국립중앙박물관

또 1741년(영조17)에 제작된 유동제 은입사 자인 <4개 단위를 함께 새긴 자>는 명문을 통해 제작시기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유물이다. 달리 <건륭6년 진유척(乾隆六年 眞鍮尺)>이라고도 부른다. 이 자의 각 면에는 당시 사용되던 4가지 길이 단위가 각기의 기준 눈금에 따라 입사돼있다. 즉 건륭 6년, 즉 1741에 재정비된 영조척(營造尺: 건축에 사용되는 길이 단위)과 포목척(布帛尺: 옷감 길이를 재는데 사용하는 길이 단위) 이 새겨져 있으며 또 건륭 6년 이전의 단위와 중국 주대부터 사용된 주척(周尺)이 각각 새겨져 있다. 각각의 단위는 3.1cm, 2.8cm, 2.3cm, 2.1cm로서 단위별 계측기준의 비교가 가능하다.


<4개 단위를 함께 새긴 자> 1741년 국립중앙박물관

둘째는 민간에서 옷감 길이를 재는데 썼던 포백척(布帛尺)이다. 입사로 단위가 표시된 자는 건축 등에 쓰인 자와 달리 포백척에만 남아있다. 이는 바느질에 쓰인 자라 해 침척(針尺)이라고도 불린다. 송나라 때 ‘삼사포백척’이라는 말이 쓰인 적이 있어 포백척은 중국에서 들어온 말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때 사용기록이 보인다.

1431년(세종13년) 중앙과 지방의 포백척 척도가 통일되지 않아 수정을 하였으며 이후  꾸준히 포백척의 정비가 이뤄졌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전기의 유물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관련학계에서는 『경국대전』에 명시된 길이 단위(1척3촌4분8리)를 고려해 이때의 포백척 길이는 약 46.66㎝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후기인 1740년(영조16년) 기록에는 세종때 만들어진 강원도 삼척부의 척을 바탕으로 포백척을 교정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철제 은입사 포백척> 19세기 독일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속박물관

현재 전하는 조선후기 포백척은 대부분 48cm에서 50cm 사이로 세종 때에 비해 길이가 다소 늘어났다. 입사가 들어간 포백척 가운데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은 대다수가 50.2cm이다. 이를 보면 영조 때 새로운 교정된 길이가 이후 적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3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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