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로 가장 많이 장식된 마구는 발걸이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1에서 다뤘던 통일신라시대의 화려한 조형과 장식보다는 발을 딛는 실용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양상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사용하는 사람의 신분과 위계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 엿보인다. 이번 글에서는 입사장식을 사용하는 신분을 통해 마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에는 『전록통고(典錄通考)』 등 법전을 통해 입사장식을 사용할 수 있는 신분과 관직의 품등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규정했다. 조선의 법제가 기본적으로는 고려시대의 법제를 계승해 개량한 것이기 때문에 이전시대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전시대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현재 법전에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조선시대이다.
조정의 관원 가운데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로서 은입사(銀入絲)를 사용한 자. 전투용 군마(軍馬)에는 금지하지 않는다. 『전록통고』(1706)
당하관의 말안장에 은입사(銀入絲)를 사용하는 자, 당하관이 교자(轎子)를 탄 경우에는 남기율로 시행한다. 연경으로 사행을 가는 서장관, 통신사, 종사관은 논죄하지 않는다. 『대전통편』(1785), 『대전회통』(1865)
조선 전 시대에 걸쳐 시행된 다음의 기록들을 보면 정3품 이하의 관리들은 기본적으로 입사장식을 사용할 수 없었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는데 군사, 외교 관련 물품 및 종사하는 관리들의 사용은 품등을 제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공적인 의례나 외교관계에서 밖으로 보여지는 위세 및 격식과도 관계가 깊다. 그렇지만 당시 물적 가치와 위계가 높았던 금과 은을 사용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군사 및 외교에서는 품등의 제한이 없다고 명시되었어도 실질적으로는 존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실제 조선시대 입사 발걸이를 살펴보면 이는 더욱 명확하게 확인된다. 경기도 가평에서 출토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철제은입사용마문발걸이>는 유물의 형태와 통일신라시대 <철제금은입사기린문말갖춤>, 13-14세기 고려의 입사수법과 전반적인 문양의 표현이 유사해 조선 전기인 15-16세기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심에는 금으로 전체적인 형태를 도금하고 윤곽을 입사했다. 중심문의 세부 형태 표현 및 운문 등의 보조문양은 은입사로 화려하게 장식해 왕실 또는 사대부, 군의 최상류층에서 사용한 등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1. <철제은입사용마문발걸이>, 15-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 가평 출토
그 외에 철로 제작된 다수의 고리형 발걸이도 확인된다. 기본적인 형태는 동일하나, 장식재 및 문양의 소재에서 차이를 보인다. 말박물관 소장 <철제금입사등자>(조선후기)와 같이 금으로 화문 및 당초문을 기면 전면에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하고, 육군박물관 소장 <철제은입사등자>(조선후기)처럼 기면에 기물의 형태를 선으로만 표현해 장식하는 경우도 있다. 금과 은의 혼입 또는 금이나 은의 단독사용하는 등 유물에 따라 재료에서 차이를 보이며, 입사 외에 부분이나 전체적으로 도금을 한 흔적이 확인되는 유물도 있다. 이를 통해 사용자의 계층이나 용처, 용도에 따라 장식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등자 유물의 대부분은 철로 제작되어 쪼음입사 시문되었으며 박쥐문, 문자문, 사군자문, 화문, 당초문 등 다양한 문양 소재가 확인된다.
도2. <철제은입사발걸이>, 17-18세기, 육군박물관
도3. <철제은입사발걸이>, 18-19세기, 독일 라이프치히그라시민속박물관
한편 등자와 안장과 같은 입사로 장식된 마구는 중국과의 교류에서도 사용되는 중요한 물품 중 하나였다. 완성된 것을 보내는 경우가 보통이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을 통해보면 때때로 중국 사신이 도안(조선시대에는 그림으로 그린 도안은 화본[畫本] 또는 실물형태로 제작한 견본은 견양[見樣]이라 불렸다)을 가져와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달라고 한 후 귀국할 때 가져가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군사, 외교적 용도로 입사 마구의 다양한 용례가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