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지리학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지도첩 「십육성분도(十六省分圖)」가 발견되었다. 「십육성분도」는 중국 전역을 그린 지도이지만 중국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제작된 것이다. 중국의 각 성을 나누어 정교하게 그리고, 각 면에 성에 대한 설명을 써 넣은 ‘분성도(分省圖)’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단순히 지역의 영역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각 면에 부분적으로 채색을 넣어 회화적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이 지도첩은 조선에서 창조적으로 제작된 것은 아니고, 이미 청나라에 존재했던 지도를 바탕으로 이본을 만든 것이다.
「십육성분도」는 청나라에서 제작된 유명한 지도첩인 「대청분성도(大清分省圖)」를 바탕으로 제작된 이본이다. 「대청분성도」는 청나라 건륭 19년에서 25년(1754–1760)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19면으로 된 청대의 대표적인 지도첩이다. 「대청분성도」는 조선·일본·중국을 아우른 지도 1면, 청 초기의 수도인 심양의 지도 1면, 이후의 수도인 연경 부분의 지도 1면과 중국의 16개성을 그린 16면 모두 합쳐 19면으로 이루어진 지도첩이다.
이번에 발견된 「십육성분도」는 청의 「대청분성도」의 체제를 대부분 본받고 있는데, 여기에 조선인이 관심이 많은 ‘열하(熱河)’ 지역을 추가하여 총 20면으로 이루어진 필사본이다. 지도를 그린 그림 솜씨가 매우 뛰어나고 채색 또한 그림에 익숙한 사람의 솜씨로 보여 당시 화업에 종사했던 사람이 그린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각 성의 지도에 설명을 기록한 글씨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솜씨로 이루어져 있다. 이 또한 글씨를 전문적으로 쓰는 사자관이나 당대 최고 수준의 서예가가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십육성분도」 표지
「십육성분도」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인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둘째 아들로 검서관(檢書官)을 지낸 유본예(柳本藝, 1777-1842) 소장본이다. 유본예는 서울의 주요 사적을 정리한 「한경지략(漢京識略)」을 저술할 정도로 지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실학자이다. 그의 아버지 유득공 또한 개성·평양·공주 등과 같은 국내의 옛 도읍지를 유람하였고, 두 차례에 걸쳐 연행(燕行)하고 돌아왔다. 그는 연행과 직접 관련된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 「연대재유록(燕臺再游錄)」을 쓰기도 하였다. 유득공이 중국 기행에 관한 글을 남긴 것이나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와 같은 서술을 남긴 것으로 보아 그 또한 역사·지리에 밝은 실학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본예가 유득공에 이어 검서관에 오르고, 지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모두 부친의 영향이 지대했을 것이다.
「십육성분도」의 앞뒤에 적혀 있는 ‘십육성분도(十六省分圖)’라는 글씨는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일원으로 유명하였던 중인 출신의 시인인 왕태(王太, ?-?)의 글씨이다. 글씨의 마지막 부분에 ‘옥경산방(玉磬山房)’이란 인장이 찍혀 있는데, ‘옥경산방’은 왕태의 당호이다. 왕태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술집의 중노미를 지내는 처지였으나 특별히 시문에 뛰어났다고 한다. 천수경(千壽慶)을 중심으로 장혼(張混) ·김낙서(金洛瑞) ·조수삼(趙秀三) ·박윤묵(朴允默) ·차좌일(車佐一) 등과 함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일원으로 시를 지었다. 그의 재주를 알고 있었던 윤행임(尹行恁)의 천거로 어전에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 지도첩 내지에 글씨를 쓴 것으로 보아 그는 시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던 예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십육성분도」는 「대청분성도」의 체제와 19면이 일치한다. 체제는 다음과 같다.
「십육성분도」와「대청분성도」비교표
19면의 내용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당시 청나라에서 들어온 「대청분성도」를 참고하여 이본을 만들고, 그 뒤에 <열하전도>를 추가 한 것으로 보인다. 제책을 하며 앞뒤에 유본예의 중인 선배였던 왕태에게 제를 받고, 자신이 제첨을 더하여 지도첩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지질은 조선에서 만든 장지 계열의 고급 한지를 사용하였으며, 표지를 포함한 제책도 조선의 솜씨 좋은 장인에게 맡긴 고급스러운 첩이다.
「십육성분도」의 앞뒷면에 있는 왕태의 글씨
「십육성분도」 여지총람 부분 「대청분성도」 여지총람 부분
「십육성분도」 직예 부분 「대청분성도」 직예 부분
「십육성분도」의 가장 특별한 점은 마지막에 16성 외에 <열하전도(熱河全圖)> 부분을 추가하고 있는 점이다. 열하 지역은 청나라 황제의 피서지로 황제의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는 곳이다. 정조 4년 1780년에 박지원(朴趾源)은 청나라 건륭(乾隆)황제의 7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한 외교사절단에 참가하여 중국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 해 음력 5월 말 한양을 출발해서 압록강을 건넌 뒤 요동(遼東) 벌판을 거쳐, 8월 초 드디어 북경에 도착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건륭황제의 특명이 내려, 만리장성을 넘어 열하까지 갔다가,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약 한 달 동안 머문 뒤 그해 10월 말에 귀국한다. 당시 박지원은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발전한 청나라의 실상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생생하게 기록한 여행기를 남기는데, 그 것이 바로 「열하일기(熱河日記)」다.
박지원이 열하에 대한 기록을 남긴 후 그의 사상을 이은 후배 학자들 사이에 ‘열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열하’는 청나라의 선진 문명을 상징하는 곳이었으며, 조선 학자들이 가장 찾기를 원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실학자들의 의식이 「십육성분도」를 엮으면서 자연스럽게 투영된 듯하다.
「십육성분도」 열하전도 부분
청나라의 영향으로 중국의 선진 문물이 유입되자 이에 경도된 조선의 학자들은 중국이란 나라의 실체에 관심이 증폭되었다. 많은 이들이 사행의 일원이 되거나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중국을 다녀왔으며, 이들을 통해 많은 중국 문물이 유입되었다. 이 때 들어 온 것 중에 이와 유사한 「대청분성도」도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지도에 관심이 많았던 유본예와 같은 실학자가 화사 등을 고용하여 이본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십육성분도」는 비록 조선을 그린 것이 아닌 중국 지역의 세부도이지만,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세계에 대한 의식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 후기 다른 지도들에 비해 섬세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고, 설명으로 달린 글씨 또한 단정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조선에서 제작된 지도첩 중에서는 이러한 양식은 처음 발견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면에서 「십육성분도」는 지리학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실학사적· 미술사적인 의미도 매우 크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