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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녕의 사람, 예술] 광장의 예술, 이하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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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진녕

2016년 겨울 한국 사회는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발산하는 에너지를 경험했다.
이 ‘춧불을 든 시민들’의 에너지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변혁 운동으로 이어졌다.
한국 사회가 광장에 모인 피플 파워로 정치적 변혁을 이끌어 낸 것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쟁취에 이어 이번 ‘촛불 탄핵’이 두 번째인 셈이다.
 
두 번의 변혁 운동에서 예술은 어디에 있었을까.
1970년대 중후반에 세력화하기 시작한 이른바 민중미술 진영은 1980년대 내내 변혁운동 진영에 에너지를 주기도 하고, 에너지를 받기도 하며 80년대 한국 변혁 운동의 한 축이었다. 그리고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국내 대형 상업화랑에서도 대규모 기획전을 열 정도로 한국 미술의 주요 흐름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치 경제적 흐름에 극히 민감한 국내 상업 화랑에서 민중미술을 주요 아이템으로 만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민중미술’ 또는 리얼리즘 계열의 1980년대 작품이 더 이상 현재형의 뜨거운 이념 논쟁을 동반하지 않는 ‘안전한 제품’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측면이 있다.
 
1980년대에 그랬듯이 2016년 광장에 모인 시민에게 에너지를 주기도 하고, 광장에 모인 시민의 에너지에서 영감을 받는 작가나 작품이 존재한다. 이런 작품은 1980년대의 민중미술이 그랬던 것처럼 국공립 미술관이나 상업화랑에서 번듯한 전시를 할 기회를 잡지 못하지만 광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물론 1980년대에도, 지금에도 여전히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반영하는 작품을 내놓고 있는 현역작가도 있다.
2016년 광장에 모인 수많은 익명이 시민은 ‘사립돌연사박물관’, ‘장수풍뎅이연구회’ 같은 나만의 깃발을 들고 모였고, 소녀상 풍선과 고래 풍선이 이들과 함께 했다.
시민이 광장에 모이는 동안 ‘블랙리스트’에 오른 전업 작가 중 일부는 광장에서 노숙을 하거나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병신무란 하야제>(11.19~12.9)에 작품을 출품하며 변혁 운동에 참여했다.

이 전시에는 신학철이 신작 한 점을 내놨고 박불똥이나 장경호, 배인석, 류우종, 김기호, 조문호, 김사빈, 이하 등이 참여해 1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됐다. 관객 참여 퍼포먼스, 사진, 판화, 꼴라쥬, 프린팅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등장했다. 대부분의 작품은 핀으로 벽면에 고정시키거나 비닐 커버만 씌운 상태로 전시됐다. 장경호 작가는 “급하게 작가들이 뜻을 모아 연 게릴라 전시다. 그래도 원로인 신학철 작가의 신작은 나무 프레임 안에 모시는 예우를 했다”며 웃었다.


신학철


류우종

이번 <병신무란 하야제>에는 80년대 현실참여미술에서 꼭이라고 할만큼 자주 등장했던 ‘공장의 불빛’이나 ‘황토 위에 발딛고 선 농민’이 보이지 않는다. 시대가 바뀌고 시민들의 서식 환경이 변한 것이다. 이 전시회에 가장 벽면을 많이 차지한 작가는 이하다. 지금 대중에게 가장 낯익은 현실참여 작가가 이하라는 얘기도 된다.
 


나무화랑 '이하'의 작품 벽면

이하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지금의 현실 참여 미술을 들춰보자.
‘이하’라는 이름이 일반 대중에게도 알려진 계기는 2012년 5월과 6월 신문 사회면을 통해서였다.
그는 그해 5월17일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린 전두환 포스터를 서울 연희동 전두환의 집 주변에 붙이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어 6월28일엔 부산의 버스 정거장에 백설공주 옷을 입은 당시 새누리당 대통령 유력 후보인 박근혜 후보의 풍자 포스터 150장을 붙이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림을 예쁘게 그려서인지 그곳 어르신들이 이 포스터를 여당 홍보 포스터로 여기기도 했다”고 이하 작가는 말했다.

하지만 공권력은 이를 옥외광고물법 위반과 선거법 위반으로 사법처리를 시도했고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가는 기나긴 법정 다툼 끝에 무죄라는 판결이 나왔다.
이하 작가는 “이런 퍼포먼스 자체를 공권력이 경범죄로 걸어 사법처리하려는 시도와 그 과정도 퍼포먼스(예술)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이 퍼포먼스는 법리적으로도, 예술의 관점으로도 무죄다. 이건 헌법에 보장된 표현과 예술의 자유”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재물손괴 논란을 의식해 포스터를 부착할 때도 언제든 뗄 수 있게 테이프를 이용해 붙였고, 스프레이를 사용하는 그래피티 작업도 하지 않았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터진 뒤 그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그가 그린 그림을 전국의 108명과 공유해 전국에 뿌리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이 퍼포먼스에 함께했던 그와 일면식도 없던 강릉에 살던 사람을 경찰은 옥외광고물법 위반이라는 혐의로 사법처리를 시도했다. 그는 “공권력은 이 풍자 퍼포먼스에 참여한 이를 집요하게 찾아내 고발했다. ‘예술’을 경범죄같은 하위법으로 처벌한 목적은 대통령 풍자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풍자 대상을 조롱하지 않는다.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기 위해 이미지를 만든 적이 없다.
굉장히 예쁘게 그려준다. 검찰 조사를 받다보면 그들은 내가 예술을 빙자해 정치를 한다고 보는 것 같았다. ‘물론 표현의 자유, 예술의 자유는 존중하지만 다음 공천은 어느 당에서 받을 것이냐’라고 묻는 식이다. 하지만 내 입장은 정치를 갖고 예술의 영역으로 갖고 와서 갖고 노는 것이다. 그게 먼저다. 예술이 가진 여러 기능 중에 나는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주목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인 자본주의가 가진 메시지, 대통령이 가진 메시지 이런 여러 메시지가 시민들에게 건너가면서 갖게 되는 의식이 있다. 나는 그 의식을 정리해서 조형성을 띤 미술 작품으로 만든다. 풍자의 형식을 띤. 그게 나는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라고 본다. 일베 사용자들이 노무현과 코알라를 합성하는 ‘장난’을 친다. 내가 장난삼아 뭔가를 그런 식으로 합성했다면 나는 진작에 박살났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일베 식의 장난질도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는 시민의 표현물에 대한 법적인 제재는 최소한이어야 한다. 두 번째는 법보다 무서운 게 각성한 시민의 냉철한 평가이다. 어떤 표현물, 풍자를 하려면, 이것에 대한 책임까지 지어야 한다. 나는 그런 두려움을 갖고 저런 풍자작품을 만든다. 이게 정말 합리적인 이유가 있고, 논리가 있는 작품인가 고민을 하고 만든다.”
 
탄핵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던 지난 여름에도 그는 대중과 소통하는 현장형 이벤트를 벌였다.
‘이하의 아트 트럭’.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포먼스 취지를 설명하고 이에 동조하는 시민의 모금으로 중고 1톤 트럭을 사서 8월20일부터 9월10일까지 경기 충남 경남 경북 등 전국을 돌았다. 유명 정치인을 소재로 그가 그린 풍자화로 랩핑을 한 트럭을 길가에 세우고 그는 ‘50초-500원 캐리커쳐’ 퍼포먼스를 벌였다. 수백명이 그림을 받아간 날도 많았다. 아트트럭이 고속도로 휴게소나 중소 도시에 정차하면 줄이 길게 섰다. “50초만에 그려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대부분 재미있게 그려주려고 했고 줄을 선 이들도 재미있게 그려주기를 원했다.”


이하의 아트트럭 ⓒ이하


그러다 10월 말 들어 탄핵정국이 펼쳐졌다.
그는 평소처럼 소셜미디어를 통해 그가 그린 풍자화를 ‘공유’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그에게 풍자화 스티커를 요청한 일면식이 없는 시민들에게 2만장이 넘는 풍자화 스티커를 보내줬다. 인사동 초입에서 아트트럭을 타고 등장해 깜짝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하고 11월 들어선 ‘현 정부가 만들었다고 추정되는’ 예술인 블랙리스트 상위권에 오르는 ‘영광’(?)도 누린만큼 이순신 장군 동상 뒤에 차려진 예술인 노숙 캠프에서 하룻밤 자기도 했다. “뼛 속까지 시려서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이하는 경희대 미대 88학번이다. 조각을 전공했고 학부 시절에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에 열중해야 했고 학생운동에는 별관심이 없던 ‘빈둥대는 대학생’이었다고 한다. 사회에 나와서 그는 신문의 시사만화가로도 활동했고 컴퓨터 그래픽 프로덕션을 운영하기도 했다. 200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대신 그는 미국 체류 기간을 통해 다시 ‘그림을 하겠다’는 의지가 되살아났다.

2012년께 귀국하면서 그는 화이트 큐브가 선호하는 미술을 할 것인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그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골랐고 ‘3년만 해보고 끝내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하’라는 풍자화가로 대중에 이름을 각인시켰다. 물론 그의 퍼포먼스와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시각 작품이 미술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앞으로 수십년 뒤에나 냉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해 돈벌고 출세하고 유명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판화처럼 원본이 있다면 그림값이 비싸질 수 밖에 없다. 컴퓨터를 이용해 그리는 내 그림은 무한정 뽑을 수 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작품 주문을 받으면 충무로 전문 출력소에서 출력해 에디션 넘버를 찍은 작품을 만들기도 하지만 스티커를 만들어 뿌리기도 하고 내 그림을 살 수 없는 분도 내 그림을 가질 수 있다.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보면 미술 작품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이 참 많다. 집에 그림하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
나는 미술이 애매한 위치에 있다고 본다. 자본주의에서는 정치나 경제가 중요한 장르다. 이 세상에 돈이 사라지고 작가의 작품이 화폐가 된다면 작가가 최고의 권력자일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가는 자본을 생산할 능력이 없다. 예술은 늘 역사의 뒤안길을 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예술이 권력이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하에서, 그게 더 활동하는데 유리할 수 있다. 권력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다. 어떤 조직에 들어간다거나, 유명화가가 돼서, 돈을 많이 번다거나, 그러면 자기 작품을 할 수가 없다.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활동하기 자유롭다. 그래서 나는 자유롭고 축복받은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예술가가 그래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긴 하지만.”

이하는 그의 방식으로, 그가 생각하는 예술을 들고 사람들과 만나왔다. 그는 원본에 희소가치를 부여하는 전통적인 미술 시장의 규칙보다는 광장이나 길가에서 사람을 만나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그의 작품을 소통하고 공유하며 확산하는 길을 택했다. 그의 이미지 구현 방식이나 소통 방식은 산발적, 자발적, 비조직적으로 광장에 모여 ‘민주묘총’과 ‘전견련’, ‘범야옹연대’ 깃발에 환호하며 사회 변혁을 이끌어낸 오늘의 시민과 어떤 식으로든 통했던 것으로 보이고, 그는 시민의 반응에 즐거워하고 있다.

글/ 김진녕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3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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