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2일
최열, 조은정, 김진녕
조은정(이하 조)
2016년, 다들 다사다난했던 한해라고 하는데, 문화계 전체가 국정에 시달렸던 만큼 미술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미술계 전체, 미술․문화정책, 용산 미군부지 활용문제 등등 그간 우리가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해왔는데요, 2016년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주요 미술관의 전시나 정책, 미술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넘어가도록 해보죠. 먼저 떠오르는 전시 있으면 말씀 부탁드려요.
최열(이하 최)
먼저 호림박물관에서 있었던 <근대회화의 거장들>전이 떠오릅니다.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어서 한국 고전회화, 특히 근대의 고전회화들이 관심에서 제껴지고 있는 상황이죠.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뤄야 할 것들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인데요. 만약 우리에게 국립근대미술관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상설전이나 기획전으로 만날 수 있는 전시와 작품들인데, 거꾸로 사립의 한 미술관에서, 그것도 개인 소장품으로 근대의 회화 전시를 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안타까움이 먼저 들었죠. 전시 자체에 대한 생각보다는 한국의 모든 미술관과 박물관들의 관심이 세계화나 심지어 서구중심주의로 달려나가는 우리 미술계와 같은 모습이 아닌가 싶었던 것입니다. 자아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폐기해 나가는 모습이 어쩌면 박근혜 정부와 비슷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같은 근대 시기의 전시로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그나마 괜찮은 실적을 보였습니다. 과거 배순훈 관장 체제에서 국현의 3관 체제를 폐기했다가 정형민 관장이 오면서 다시 살리면서 덕수궁이 근대미술관처럼 운영되도록 하면서 나온 결과물이 올해의 변월룡-이중섭-유영국, 탄생 100주년을 맞은 세 명의 근대 화가 전시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역사상 최고의 시리즈 전시였던 것으로 평가하고 싶어요.
세 작가가 각각 성격도 다른데 마침 1916년 탄생한 세 명을 잘 고른 것 같습니다. 수묵채색화를 하는 작가가 마땅치 않아서 조금 아쉽구요. 변월룡 전시는 당시 입소문이 굉장히 좋았고, 이중섭전은 한국 개인 작가로 단일 전시에서 25만을 동원한 유일한 전시로 기록됐습니다. 한국 작가로서 블록버스터의 가능성 보여주어 긍정적이죠.
이들을 보며 탄생이나 서거 등을 기념할 만한 수묵채색화 분야의 작가가 누가 있는지를 생각해 봤어요. 1919년이 안중식이 사망한 해여서, 덕수궁에서 2019년 안중식 서거 100주년 기념전 기획을 하면 좋겠더군요.
조
1919년 3․1운동도 있었고, 2019년에 그와 더불어 많은 기획이 있으면 좋겠는데, 국립현대미술관은 외국인 관장이라 그런 생각이 없으실 듯한데, 지금 2019년의 기획이 들어가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김진녕(이하 김)
규모 있는 상업 갤러리나 미술관은 3년 정도 계획을 하게 마련인데, 외부 인력을 들여서라도 2019년의 계획을 진행하고 있을 수도 있겠죠.
조
국립현대미술관이 이미 결정된 전시만 진행하느라 관장의 기획이 드러나지 않았다고들 하니까, 앞으로의 것에 대해서 준비해서 보여 줄 수 있어야겠죠. 다음 사람이 그 전시를 진행하게 되더라도 말이죠. 다음 사람은 이전에 준비해 놓은 전시들을 진행한다고 해야 하는데. 1919년 기념 기획이 안 되어 있으면 그건 누구 책임일까요.
최
한국전쟁 50주년도 그렇고 국가의 대표 미술기관이 해야 되는 역사적인 기획을 잘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김
거의 역사적인 이슈를 불러 오는 것에는 무신경한 것에 가깝습니다.
조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빠지는 것도 문제지만, 국립이라는 상징성을 주지하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 반성하고 배우고 상기시키는 게 대중 전시의 역할인데 국립의 연구 및 전시 기관에서 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해야겠죠.
김
이슈와 연관되어서는 미리 주눅이 들어서 그런지도 모르죠.
최
국가주의와 상관없이 공동체에게는 중요한 것인데, 기관 내의 사람들 역사의식이 부족한 탓이죠.
김
외국, 특히 서양 문물을 활용한 아이콘 마케팅이 활발하고 그게 또 먹히는 걸 보면서, 국내에서 이슈를 새로이 만들어 내는 능력이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시류에 영합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국가 전체로 의미있었던 일의 10주년, 50주년 등의 적절한 시기 터닝 포인트에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에 대해 이슈를 제기할 만하고,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질 방법도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호응관계를 위해서는 일단 미술관에서 관심을 가지고 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무신경한 면이 있죠.
조
미술관 박물관에서 작품들을 영구 수장하고 보존하는 것의 목적은 결국 공동체의 미래 유산 가치 창조인데, 현재 자신들의 관심에만 집중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선생님 말씀대로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공공의 가치이고, 우리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에서는 세금을 내는 주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역할 안에 우리에게 이어져 온 것을 제 때 잘 조명해야 하는 것이 맞겠죠.
김
올해 국공립미술관 전시 중 고맙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것은 청동시대 제기에 관한 전시가 드문드문 있었는데 서로 연결되지 못했던 것이었어요. 우연인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7월에는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 8월에 <흙으로 빚은 조선의 제기> 테마전에서도 청동 제기 등을 볼 수 있었고, 현재 진행중인 <옛 중국인의 생활과 공예품>전에 화상석 탑본이 나왔고,,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그 사이에 <산동-서울 국제교류전 공자와 그의 고향>전에서도 산동성 뮤지엄에서 온 상주시대 청동제기와 화상석 등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국박 자체 컬렉션에도 상대 청동제기가 있더군요. 한성백제박물관은 물론 시립이지만 국박이 중심이 되어 이들 전시나 유물들을 잘 꿰어 놓으면 적어도 동아시아의 고대 유물들을 스펙터클하고 재미있게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 거죠. 각각의 전시가 다 조각조각나서 임팩트가 부족했어요. 어차피 우연이라도 올해 안에 이렇게 쏟아낼 거면 종합하여 빈틈없이 구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 거죠. 물론 실행이 쉽지는 않았겠지만.
조
그렇네요. 갑자기 중국 청동기들이 많이 등장한 어떤 배경이 있었던가요?
김
글쎄요. 드라마 <도깨비> 등도 그렇고, 어쩌면 사람들의 관심이 트렌드처럼 옮겨다녀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고..... 그런 점에서 굳이 국가주의 내세우지 않더라도 과거와 연결된 문화와의 교류를 재미있게 구성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웠습니다. 확실히 국립중앙박물관에 경주박물관에 계시던 분이 오신 후로는 유물이 강조된 느낌이 큽니다. 개인적으로는 관장님마다 다른 색깔을 보여주시는 거는 좋다고 생각해요.
조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중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의 경우 관객이 많이 든 전시였고, 학생들을 데려가 함께 많이 봤습니다. 과거와 근대, 현대까지를 이어서 다루고 있는데, 학생들의 리포트를 받아 보니, 근대는 조금 억지스러웠다는 감상평이 많았어요.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 테마 자체가 굉장히 흥미 있잖아요. 근대 도시 부분을 보여주면서 현재 진행형의 관객들을 얘기하는데, 그 방식이 굉장히 거칠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시와 미술에 대한 연구가 100년 이상 축적되었고, 관객들은 굉장한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는데 보여주는 방식은 다소 생뚱맞았다고나 할까.
김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마지막 파트에서 볼 수 있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일제 강점기 젊은 사람들은 어떤 것을 보고 어떤 것들을 그렸는가를 따로 조명할 수도 있고, 도쿄미술학교 유학생 부분은 따로 모던보이 등의 시각으로 조명했으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기도 하고.... 국립현대미술관과 협업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조
근대가 양념처럼 들어가다보니 전체 전시 중에서 맥락이 잘 맞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국박에서 큰 전시를 한다는 것은 순회 가능한 테마로 잡고 잘 구성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좋은 테마를 가지고 한번 딱 펼치고 접어버리는 것이 너무 아까워요. 연구자 입장에서는 동경예대 자료들 쉽게 볼 수 있어서 좋긴 했습니다만, 좋은 테마가 너무 아깝게 소진되었습니다.
김
<경기감영도> 등을 보면 그림 안에 가마나 말은 있지만 마차가 등장하지 않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연행도>나 <고소번화도>에는 마차가 등장하지만요. 이런 그림들을 통해 3국의 도시 모습을 알 수 있죠. 당시 우리나라 도로사정이나 경제상황이 열악했던 것을 씁쓸하게나마 보여주는 점이기는 하죠. <백납병> 등을 보면서는 지금의 우리나라 토산품 부채 등이 19세기 그 수준에서 머물러 있나보다 하는 느낌도 받았구요.
조
자, 그러면 이번에는 백남준 10주기를 맞은 올해, 기념전들에 대해 얘기해볼까요?
김
저는 백남준 전시를 세 개 정도 봤어요. 시립미술관 <백남준 플럭서스>가 가장 나았고, 갤러리 현대 등의 전시는 재고 전 느낌이라고나 할까 별 감흥을 받지 못했습니다.
조
백남준이 우리나라 작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하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니 저러니 말들 많아도 미국 유명 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한 것은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에서 교육받고 독일과 미국에서 활동한 세계적인 작가로, 말년에 굿이나 비빔밥 등 한국적인 요소를 작품에 넣었다고 해서 꼭 우리나라 미술가라고 할 수는 없죠. 세계 미술사에 위치시키는 것이 맞고. 백남준을 기념하는 전시들이 올해 꽤 많았지만 전체적으로 작품세계를 조망하는 데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고 보여지네요.
김
백남준이야말로 한국이란 키워드와 연관된 가장 유명한 작가죠.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한데 제가 기억하는 백남준 전시만 해도 5개가 넘지만 모두 각개격파 격이어서 전체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했죠. 백남준이 이만큼 활동하면서 유명하게 된 미술사적 맥락이 있었을 텐데, 이를 연구하고 해외작품들도 함께 초청해서 국내 들어와 있는 백남준 컬렉션과 잘 버무려 백남준을 스타로 만들 큰 기획도 가능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조
거시적 안목이 부족했죠.
최
백남준이야말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제대로 뭔가 했으면 좋았겠죠. 나머지 다른 곳들이야 나름대로 기념전을 연 것이고.
김
백남준이 유명하다는 것만 알고 그가 왜 그런 식의 주장을 했고 이미지가 소비되고 해석되었는지 사실 우리와는 동떨어진 부분이 많습니다. 한 백남준 기념전에서 본 동영상 중에 국내 쇼 프로그램에서 백남준을 인터뷰하는 내용을 보았는데, 사람들은 소위 국뽕 같은 질문들만 해대고 그런 답을 끌어내려고 하고, 백남준은 나름 통찰력 있는 얘기를 툭툭 던지는데 전혀 주파수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84년 <굿모닝 미스터오웰>, 86년 <바이바이 키플링>, 88년 <손에 손잡고> 등을 보면 뒤로 갈수록 아예 주문자 맞춤형으로 변화한 것도 볼 수 있구요.
조
국공립 미술관들 얘기가 중심이 되었는데, 그러면 이번에는 올해 있었던 세 개의 비엔날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김
비엔날레의 성격규정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에서 서소문본관 메인홀에 빅 반 데르 폴의 구조물을 완전한 토핑으로 갖다 놨습니다. 빅 반 데르 폴은 광주비엔날레에서도 3전시실에 꽤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미디어시티서울에 전시된 최저임금위원회를 다룬 차재민의 작품 <12>도, 작품 자체는 괜찮았지만 광주에도 또 나옵니다. 성격이 달라야 하는 두 비엔날레에 왜 작가가 겹치게 되었는지 이유를 모르겠고, 정체성이 혼란한 듯 보였어요.
조
예술감독이 다르니.. 작가 선별은 예술 감독 고유의 권한이구요.
최
어쩌다 겹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방향이나 소재, 주제가 얼마나 뚜렷했는지가 아닐까요. 어느 쪽이 잘못한 것은 아닌지 점검은 해야겠죠.
김
빅 반 데르 폴의 경우 서울은 철, 광주는 천 프레임이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이뤄가는 행위, 퍼포먼스에 주목한다고 하는 작품의 접근 방식은 같습니다. 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치유센터인지 미술관적 매핑으로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인지에 따라 다를 수는 있었겠지요. 미디어시티 서울만 국한해서 얘기하자면 전시가 너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었다는 느낌입니다. 북서울, 남서울, 본관에 같은 작가 작품이 이쪽과 저쪽에 보이기도 하고, 남서울미술관과 본관에서 따로 캠핑 프로젝트를 가지고... 차라리 한쪽에 몰아서 보여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서울의 고른 지역에 향유할 수 있도록 분산시킨 것인지도 모르겠지만요.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 행사들이 좀 그런 경향이 있는데... 예를 들면 부산국제영화제의 경우도, 유럽이나 미국 쪽, 선댄스 칸 베니스 등에서 화제가 되었던 신작을 모아서 보여주는 것이 관객들로부터 꽤 호응을 받으니 자꾸 그런 쪽에 집중하게 되죠.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미디어시티 서울에서도 동시대미술의 경향을 선보인다는 의미로 나바로나 신시아 마르셀 등 화제가 되었던 작품을 모아다 보여주는 나이브한 기획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주목받았던 이유는 외국의 주요 작품을 빨리 보여주는 창이어서가 아니라 아시아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아시아 영화의 창 노릇을 했다는 것에 있듯이, 우리의 비엔날레도 한국 또는 아시아 미술의 현주소를 보여주기 위한 독창적인 노력을 더 해야만 하는 것 아닐까요.
조
특히 미디어라는 매체를 중심으로 한 비엔날레는 단편영화제 등 영화제와 비교되게 마련인데, 미디어시티 서울은 정체성을 재논의할 때가 된 것이라고 봅니다. 처음 시작할 때와는 미술 환경이나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잖아요. 컴퓨터나 미디어에 대한 접근과 관심도 다르고. 이제 1인 미디어 시대가 왔는데 말이죠.
김
출품작도 vimeo 같은 곳에서 감상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 미술관 속에서의 영상, 미디어 전시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영화관은 컨텐츠만 보지만, 미술관은 공간과 영상이 같이 결합되는 곳이죠. 서울독립영화제나 미장센영화제에서 보지 않고 왜 화이트큐브 미술관에서 보아야 할까. 공간적 배려가 있었는가. 등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최
다양한 비엔날레가 생기는 것에 대해서는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국제용, 국내용, 지역중심... 단 성격을 잘 살렸을 때 그렇다는 거죠. 광주 비엔날레는 이제 20주년이 되었는데, 이 비엔날레가 왜 출범을 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처음 창설했을 때의 기조로 선언에 포함되었던 “광주정신” 같은 것이죠. 베니스비엔날레나 카셀도큐멘타 등도 나름의 성격이 있죠, 그것이 시장의 쇼윈도 역할이라도,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쌓이고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광주 20년을 거치면서 광주 정신은 어떻게 되고 전통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광주 비엔날레를 볼 때마다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민선 시장인, 시민운동 출신인 광주비엔날레의 이사장이, 광주 시민들의 시민정신 광주 정신, 518 정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지난 비엔날레에서 작품을 자체 검열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현대사에서 독재 정권에 저항했던 정신, 자유민주주의의 가치, 인권, 평화, 반전 등의 가치를 옹호하는, 그러한 것을 과제로 제시하고 거기에 해당하는 커미셔너나 총감독을 선정했어야 하는 것이죠. 처음에도 국제 현대미술의 첨단을 소개하는 안내 전시를 구성한 뒤에 광주 주제를 슬쩍 끼워 넣은 것도 코메디였지만, 그 이후에는 그런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산 비엔날레는 왜 부산인가가 명확치 않으니 끊임없이 출렁입니다. 국제적인 건지 국내지향인지도 알 수 없고. 중요한 것은 이 비엔날레들이 국민 세금으로 운영하는 거대한 미술행사라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 과제와 의무가 있는데, 그 비엔날레를 통해 성장한 작가가 있는지 생각해보세요. 매번 외국 거장 모셔다가 대접해 보내는 시골 촌뜨기 짓을 한 건 아닌지 하루 빨리 성찰을 해야 합니다.
조
커미셔너들이 굉장히 많은 보수를 받으면서 일종의 세계를 향한 교두보로 삼았을 뿐 아닌가 싶기도 하죠. “왜, 여기서”라고 물었을 때 그에 대한 부분이 결국은 제대로 답해지지 않았던 겁니다. 적어도 광주 비엔날레는 인권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김
홍성담의 <세월오월>의 경우는 굉장히 훌륭한 마케팅 스캔들이었죠. 만약 비엔날레 이사장이 작품 철거 대신 이에 대해 ‘검열은 없다’ 식으로 의연하게 대처하고 브랜드 마케팅을 했으면 크게 성공했을 것 같습니다.
조
박물관 미술관의 정체성 안에서 서울서예박물관의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문자도·책거리> 전시도 화제가 되었던 전시 중 하나죠. 서예박물관 입장에서는 개관이래 최고의 인파가 모여든 성공적인 전시였습니다. LA 순회전도 한다고 하구요. 이에 반해 서예계에서는 서예박물관이 서예가 아닌 것을 전시한다며, 대중 영합주의적 서예관 운영방침을 거부하는 서명운동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최
민화전이지만 문자도가 포함되어 있으니 나름 연관을 있었던 전시였는데, 전체적인 장르가 회화였던 것이 문제였던 거죠.
김
비슷한 논란이 국악계에도 있습니다. 완창 판소리를 보러 다니시는 분들은 피아노 반주에 서양 드레스를 입고 연주하는 창작 창극을 두고 이게 무슨 창극이냐고 화를 내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전체 장르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중들이 그 장르를 즐길 수 있어야 하죠. 전통미술도, 서예도 그렇습니다. 장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것을 함께 봐주고 흥을 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 변화는 감수할 필요가 있습니다. 100년, 200년 전 기준으로 너무 좁게만 보아서는 안되겠죠. 서예박물관의 모든 전시가 그렇게 변화하는 것도 아닐 것이고 조금 색다른 전시를 통해 “우린 이런 것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면 궁금증도 생기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계기도 될 겁니다.
조
십만명이 들었다면 그 동안 서울에 서예박물관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사람들도 방문했을 거예요. 이들이 재미있는 전시를 통해 또 다음 전시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관객 유치, 예상 관객 확보라는 점에서 도움 될 것 같습니다.
최
자체로 좋은 전시였고 아무 문제 되지 않는 일일 텐데, 단지 자신들이 생각하는 서예의 한계에 묶인 사람들 일부의 생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서예계에서 힘 있는 분들이셨겠죠. 넓은 시각으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조
서예작품 심사 하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는데, 마지막으로 한자를 제대로 썼는지 점검하시더군요. 한자 서예라 하면 그 뜻을 새겨 쓰는 것일 텐데, 글자를 틀릴 정도라면 그냥 외형만 외워 썼다는 얘기겠죠. 한자 자체가 젊은 사람들에게는 어렵고, 또 붓과는 거리가 멀어진 문화가 되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서예를 일상화하고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또 고전 문구를 새기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서예가 젊은이들에게 더 친숙해 지는 것은 아주 좋은 현상이라고 봐요.
김
잘 모르는 노래는 가사가 들려야 집중하고 따라가죠. 그림은 즉자성이 있지만 서예는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가 중요하죠.
조
서예박물관의 대중화는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지켜야 할 고귀한 무엇인가가 늘 있다는 것, 또 그 부분에서 우려된다는 것은 이해되지만요.
(II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