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한국에서 가장 많이 보는/볼 수 있는 조각 작품 <소녀상>의 작가 김서경-김운성
- 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현실에 대한 발언
흙 속에서 인물을 끄집어내는 순간
- 오윤과 김광석이 어른거리는 임진강변의 풍경
부부조각가 김서경-김운성의 작품은 요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작품일 것이다. 위안부 희생자를 기리는 ‘소녀상’이 바로 이들 부부의 작품이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 최근 '10억엔 짜리' 철거 시비에 휘말렸다.
2011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 놓여진 1호 소녀상은 이후 전국적으로 50여 곳에 세워졌고, 이중 38점이 김서경-김운성 작가의 작품이다. 이들 부부는 1호 소녀상과 똑같이 만들지는 않고 세워지는 장소와 지역 단체 등 세우려는 이들의 뜻을 반영해 조금씩 소녀상의 외형을 수정해 6가지 유형의 소녀상을 만들었다. 이들 부부의 소녀상은 미국 글렌데일, 호주 시드니, 캐나다 토론토, 중국 상하이(예정) 등 해외에도 세워졌다.
지난해 가을 성북동 초입에 놓인 김씨부부와 중국작가가 함께 작업한 한중합작 소녀상. 조만간 이 작품과 짝을 이루는 작품이 중국 상하이에 설치된다.
이들 부부가 만든 설치작품이 대중의 눈앞에 등장한 것은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3년 2월 방영된 MBC정치드라마 <제3공화국>은 오프닝 타이틀 장면에서 미니어쳐 조각작품을 등장시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때 한국 드라마에서 이런 시도는 처음이었다. 이 조각상 제작자로 오프닝 타이틀에 ‘김운성’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부부의 공동 작업이었다.
1994년 정읍에 세운 동학백주년 무명열사위령탑을 시작으로 서울 강서구 허준로의 허준상, 가로 길이만 40미터만 되는 동티모르 파병군인 기념비(육군 특전사 교육대 소재), 서울 서대문형무소의 독립운동가 기념 조형물, 2010년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설치한 <전차와 지각생>, 최근에는 서울 강북구가 서울 4.19국립묘지 입구에 세운 근현대사기념관에 김구 선생과 민주와 통일을 위해 몸바친 선열을 기리는 조형물을 광복절에 제막식을 가지기도 했다.
제3공화국 오프닝 타이틀
이들 부부의 최근 작업 범위에 미군 사격 연습장으로 쓰였던 ‘매향리’를 추가했다. 1951년부터 2005년까지 경기도 화성시 매향리 농섬 주변 갯벌은 미 공군이 사격연습장으로 쓰였고 1980년대 말부터 지역주민과 시민단체의 사격연습장 폐쇄 운동이 벌어졌고 2005년 지역 주민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매향리에 떨어진 포격 연습용 탄피로 만든 아메리칸 캡틴.
이 매향리에서 파낸 연습용 포탄 1천여 점이 김서경-김운성 부부의 손끝에서 예술품으로 되살아났다. 지난 2016년 7월22일부터 사흘 동안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칼을 쳐서 보습으로-전쟁없는 세상을 위한 프로젝트 전’이라는 대규모 전시가 열렸다. 그리고 이 전시는 규모를 약간 줄여 화이트 큐브 속으로 들어왔다.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1~3층에서 열리는 <전쟁없는 세상을 위한 Art’s Eye View전>(8월2일~8월30일)이 열리고 있는 것. 부부는 전시회에 맞춰 <빈 의자에 새긴 약속>이라는 책도 펴냈다.
“500kg이 넘는 대형작품 네 점과 반복적인 소형작품을 빼고는 시청 앞 광장에서 전시했던 작품은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김운성)
이들의 매향리 시리즈는 지난해 초부터 작업이 시작됐다.
“아내(김서경)랑 작품 구상을 하다가 매향리에 한번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작품의 방향과 스케치 등을 들고 전만규 전 매향리 주민대책위원회장을 찾아갔다. 그 분께 죽음의 무기인 포탄이 새싹도 나고, 새도 앉는 생명과 평화로 풀어내는 작품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전 위원장이 흔쾌히 작품의 취지에 공감하고 매향리에서 수거한 포피 1천 여 점을 내줬다. 그걸 일산의 작업실로 옮기는 것도 큰 일이었다.”
부부는 더 효과적인 살상을 연습하기 위해 갯벌에 투하됐던 크고 작은 포탄껍질에 애초 이 물건들이 공장에서 생산될 때와는 전혀 다른 쓰임을 선물했다. 큰 포탄은 악어나 도마뱀 같은 대형 양서류나 말로 변했고, 작은 포탄은 벌이나 나비, 새로 변했고, 초록의 싹을 디밀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의 하나이고, 휴전 상태인 한국에서 미군 주둔과 관련된 매향리 이슈는 매향리 사격장이 폐쇄됐다고는 하나 여전히 민감한 이슈다. 이런 휘발성이 강한 사회적 이슈를 작품의 테마로 삼는 것은 단점도 있고 장점도 있을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를 기리는 소녀상은 2006년 내가 만든 ‘소녀의 꿈’이라는 작품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위안부 기념비를 만든 것은 아니다. 이슈를 위해서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나는 대중과 호흡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을 무시하는 예술도 싫고 생명을 훼손하는 예술도 싫다. 포탄을 갖고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도 그런 맥락이다.”(김서경)
이들 부부가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해준 것은 대학이었다.
한국에서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의 기간은 한베이비 붐의 절정 구간으로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일어났다. 베이비 붐 세대가 대학에 입학하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말까지 한국의 대학은 양적 팽창 기간이었고 대학이라는 간판만 달면 입시 때마다 수십대1의 경쟁률은 기본이었다. 지금처럼 사학 운영자들이 신입생 모집에 노심초사하며 운영난을 걱정하는 시기가 아니었다.
84학번으로 중앙대 미대 조소과 1회 동기인 이들 부부가 대학에 들어가 맞이한 현실은 팽창기 ‘사학 산업’의 민낯이었다.
84학번으로 중앙대 미대 조소과 1회 동기인 이들 부부가 대학에 들어가 맞이한 현실은 팽창기 ‘사학 산업’의 민낯이었다.
“입학을 하고 보니 실기 작업을 할 수 있는 아무런 시설도 준비돼 있지 않았다. 학생부터 뽑고 본 것이다. 학교의 열악한 시설이 사회에 대한 눈을 뜨게 해줬고 오늘의 나를 만든 셈이다.”(김서경)
게다가 80년대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의 절정기였다. 중앙대도 그랬다.
“그때 안성캠퍼스의 예술대는 문예창작과, 연극영화과나 무용과 할 것 없이 모두가 운동권이었다.”(김운성)
김운성은 예술대 총학생회장을 맡았고 조소과 2년 후배인 이래창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이 1989년 8월 의문사하면서 이들의 80년대는 내내 뜨거웠다.
“1986년 ‘민중의 땅’이란 기획전에 참여하면서부터 사회적 이슈를 풀어내는 작업을 고민했다. 2006년에 만든 ‘소녀의 꿈’은 만들 당시는 정대협과는 상관없었지만, 위안부를 염두에 두고 ‘못다핀 꽃’이라는 의미에서 만든 작업이다. 소녀가 꿈을 꾸는 형상으로, 위안부로 끌려가기 전에 얼마나 많은 꿈이 있고, 미래를 꿈꿨겠나? 그 작업이 2011년에 위안부 소녀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김서경)
오윤에 대한 오마쥬격인 <매삼치다>
이들 부부, 특히 김서경 작품의 기원을 따라가다 보면 80년대라는 경제적인 낙관과 정치적인 절망이 교차하는 혼돈이 잉태한 에너지와 1980년대 한국 변혁운동의 시각적 아이콘인 화가 오윤(1946~1986)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1983년 김서경은 고3이었고 미대 조소과 입학을 희망했다. 그때 홍은동에 살던 김서경은 서대문 로터리 명화극장 옆에 있던 서대문미술학원을 다니며 조소과 입학을 위한 입시용 미술을 배웠다. 서대문미술학원은 1982년 석형산, 김호득, 오윤이 함께 세운 학원.
이 학원에서 김서경을 가르친 이가 오윤이었다.
“오 선생님에게 1년 동안 조소를 배웠다. 조소를 가르치실 때 첨삭 같은 걸 잘하지 않으셨는데 유독 손이 검은색의 뱀 피부 같았던 게 기억난다. 마치 손에 흑연을 바른 듯 했다. 그때도 건강이 안좋으셨는지 결강도 많이 하셨다. 유독 제자들이 학원으로 많이 찾아와 속으로 ‘저 선생님이 인기가 참 많으시구나’라고 했다. 오 선생님이 대단한 분인 것은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알았다. 대학 다니면서 오 선생님 작업을 많이 따라했다. 판화패에도 들어가고, 만화도 그려보고. 그때 ‘짱돌’이란 만화도 그렸다. ‘민중의 땅’이라는 기획전에 참여하게 된 것도 그 연장선이다. 특히 오윤 선생의 토우가 좋아서 많이 찾아보기도 했다. 80년대에 내가 세상을 눈을 뜨지 않았더라면 로댕이나 카미유 클로델을 롤 모델로 들 수 있겠지만 내 안에 들어있는 것은 오윤 선생의 작업이나 일상적으로 봤던 돌부처 같은 그런 익숙한 것들이었다.”(김서경)
이번 아라아트센터 전시에도 출품한 2009년작 <매삼치다>는 화가 지망생 김서경이 학원에서 짧게 배운 뒤 거리에서, 가슴 속에서 오랫동안 사숙해온 오윤 작가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매삼치다>는 김서경 작가의 단독 작업이다. 김서경-김운성 부부는 1989년 결혼 이후 대부분의 작업을 공동작업으로 해왔지만 일산 살림집 옆의 작업실에서 각자의 작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소녀상의 원형격인 2006년작 <소녀의 꿈>은 김서경 작가의 단독 작업이지만 2011년 작 소녀상은 김서경-김운성 작가가 함께 기획하고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만들어낸 작업이다.
김운성 솔로 작품 3학년5반
아라아트센터 전시에 네 명의 소년이 ‘앞으로 나란히’를 하며 개구진 모습을 보여주는 <3학년 5반>이라는 작업은 김운성 작가의 단독 작품이기도 하다.
두 작가의 작업에 아이들의 웃음이 스며든 것은 부부가 결혼하고 아이를 출산한 90년대 이후다. 부부에겐 아이가 둘이다. 큰 아들은 27세의 대안학교 교사이고 16세의 딸은 중학생이다. 아이들은 부부에게 선물을 줬다. 1993년 첫 부부합동전을 치른 이래 꿈꾸는 소녀상이나 아이들 소재의 작품이 개인 컬렉터들의 관심을 끌고 있기도 하거니와 딸은 소녀상의 모델 노릇도 하고 소녀상의 그림자에 할머니를 담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이들의 공동 작업 형태는 작품 컨셉과 기획은 공동으로 하되 찰흙에서 모양을 끄집어내는 조소 작업은 김서경 작가가 주도하는 형태다.
부부의 표현 방식은 약간 다르다. 김서경 작가는 흙으로 주로 작업하고, 김운성 작가는 플라스틱이나 금속 나무 등 다양한 소재를 이용한다. 소녀상의 경우 김서경 작가가 얼굴 표정 등 디테일을 책임졌다. 김서경 작가는 “남편은 아이디어가 좋다. 기획과 아이디어가 많다”고 말했다. 부부간에 의견이 갈리는 경우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김운성 작가는 “부딪히는 것도 있지만 조율해 낸다. 아니 바로 해결된다. 내가 포기하고 바로 방으로 들어간다(웃음)”고 밝혔다.
작업 스타일은 정반대다.
김운성 작가는 작업할 때 음악같은 외부의 소리를 일체 단절시킨다. “귀로 들어오는 소리는 정신에 바로 바로 와서 박혀서 혼란스러워진다. 좋은 음악은 좋은데, 싫으면 싫은대로. 그래서 음악은 무조건 끈다.”(김운성)
반면 김서경 작가는 음악에 몸을 맡기고 작업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작업실에 갇혀 있을 때 세상을 향해 유일하게 열려있는 통로가 라디오다. 팟캐스트도 듣고 음악FM도 듣는다. 그거라도 들어야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되니까. 듣다보면 ‘전투력’만 늘어난다.(웃음)”(김서경)
음악을 즐기는 김서경 작가지만 기계의 스위치를 자주 눌러줘야 하는 CD 플레이어 등은 잘 사용안한다. 손에 흙을 잔뜩 뭍힌채로 기계조작을 하기 쉽지 않은 까닭이다.
김서경 작가는 “음악을 들으면서 작업을 하면 감정이입이 잘된다”고 말했다.
“작업에 몰입 하다보면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고 화날 때도 있다. 흙속에서 캐릭터의 표정을 끄집어내야 할 때 나도 그 표정을 짓고 작업을 한다. 그때 그런 음악이 나오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소녀상 만들 때는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 생각하면서 작업을 했는데 끌려갈 당시의 소녀들 생각을 하니까 되게 속상하고 화도 나고, 무척 복잡한 감정이었다. 매일매일 많이 울고 소리도 치고 그랬다. 답답해서. 이 작업이 감정이입을 안하면 작업이 안된다.”(김서경)
김서경 작가는 클레이 작업의 얼굴 표정을 완성하던 날 소녀상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고 한다.
작업의 반려자라고 할 수 있는 음악에 대해 김서경 작가는 기억을 아이러니하게도 잘 기억을 하지 못한다. “나는 진짜 가사를 못외운다. 어릴 때부터 만화책을 좋아하고, 사람 표정을 좋아했다. 그런 표정을 읽는게 좋았다. 눈으로 배웠고 세상만물을 이미지로 캐치한다. 그렇게 눈으로 각인한 것은 괜찮은데 다른 건 힘들다. 사람 이름도, 노래 가사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김서경)
그래도 대략 어떤 노래를 즐겨 듣냐고 물었더니 그와 동시대를 통과했던 “지금은 들으면 아련해지는 80년대 운동가요들”과 “음색 자체에 서글픔과 축축함이 묻어나는 김광석의 노래, 그 중에서도 <서른 즈음에>”, “84학번이라 정태춘 박은옥 노래를 제일 많이 들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소라와 안치환, 김민기의 이름도 등장했다.
그가 최근에 가장 집중해서 부른 노래는 <임진강>.
양희은이 부른 <임진강>을 듣고 지난해 말 작품 기행을 갔던 베트남 다낭의 한강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가사를 미리 휴대폰에 내려받았지만 울어버려서 끝내 마치지를 못했다.
<임진강>은 월북 시인 박세영이 노랫말을 만든 북한의 대중 가요로, 일본 조총련 사회에 먼져 전해졌고 이어 일본 가수가 불러 일본 사회에 유명해졌고 이를 일본에서 활동한 한국 트로트 가수가 불러 한국에 전해졌다. 이를 양희은이 다시 불러 한국 사회에 널리 퍼졌고 2000년대에 나온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도 삽입곡으로 쓰였다.
그 가사는 이렇다.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 내리고
뭇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강 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 울고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벌 이삭 바다 물결 우에 춤추니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베트남은 작품을 위해 간 것이다. 일단 양민학살 현장을 가서 보고 듣고 느끼자는 생각이었다. 가보니 그들이 통일을 이뤘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거기서 북한 사람들의 공연을 식당에서 봤는데 그게 너무 슬펐다. 우리가 만나는 장소가 이런데 밖에 없구나 그래서 슬펐다.”(김서경)
세윌호의 소년 소녀를 기리는 <대한민국>. 소녀상과 반대로 발 앞꿈치가 들린 것은 배가 기운 급박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이 절박한 기다림을 김서경.김운성 작가는 FRP로 형상화시켰다.
김서경-김운성 작가의 작업은 소녀상을 거쳐서 세월호의 소년 소녀(<대한민국>)와 천안함의 병사(<연평도 피에타>), 매향리 주민의 비명, 베트남의 학살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작업(<베트남 피에타>)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아픈 것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기억을 계속 해내야 정리가 될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것을 계속 끄집어내고 기억하자고 미술로 기록하고 있다. 이슈가 돼서 이런 작업을 하는 게 아니다. 이 시점에 그걸 해야 된다고 믿으니까 하는 것이다. 매향리에서 수거한 포탄으로 하는 작업도 우연한 인연이 실현된 것이다. 그 포탄 껍질에 포탄에서 연꽃 속에 어머니와 아이가 나오는 그런 그림을 새기려고 하기도 했다. 매향리에서 어떤 임신 중인 엄마가 조개를 캐다가 죽은 사례가 있었다. 그 남편도 결국 술먹고 죽고.”(김서경)
김서경과 김운성이 세상을 눈을 뜨기 시작하던 1980년대의 사회 변혁운동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프레임이 겹쳐진 시기였다. 김서경-김운성 부부 작가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소녀상은 ‘제국주의 일본의 피해자 한국’이라는 민족주의 프레임이 아닌 ‘전쟁에 의한 소수자의 희생’이라는 인권과 페미니즘 운동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래서 피해 당사자인 한국이나 중국, 동남아를 넘어서 미국이나 유럽쪽에서도 지지를 받고 있다.
연평도 피에타
김서경-김운성 부부의 1990년대 이후 작업은 소수자의 희생에 대한 연민과 공감, 연대로 이어지고 있다. 전쟁터에 끌려나가 신발은 벗겨지고 두 손을 꼭쥐고 뒷꿈치를 들고 긴장하고 있는 소녀는 상하이에서 중국 위안부 소녀와 만났고, 장산곶 앞바다에서 희생당한 젊은 병사를 심청이 건져올린 <연평도 피에타>는 전쟁통에 희생당한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를 형상화한 <베트남 피에타>로 이어지고 있다.
베트남 피에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