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노암(세종문화회관 시각예술전문위원)
<백남준 그루브 흥>이라는 전시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다. 2016년 1월29일(백남준 기일)까지 열리는 전시이다. 작품 중에는 백남준이 병으로 쓰러지기 전 왕성한 활동을 하던 1995년도 작품인 <피버 옵티크(Phiber Optik)>도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제목이 무슨 뜻인지 뚜렷한 설명이 없었다. 작품의 소장자 자료에도 재료나 제작시기, 크기 정도에 약간의 추상적이고 모호한 설명만이 덧붙어있을 뿐이다.
전시 가이드북을 만들어야 하는 기획자로서는 이만저만 곤란한 상황이 아니게 됐다. 여러 경로와 자료를 통해 어찌어찌 그 의미를 풀어보니 이 제목에는 매우 흥미로운 비사(秘史)가 담겨져 있었다. 피버 옵티크란 예술 분야에서는 완전히 무명이지만 컴퓨터 프로그래밍 역사에서는 정말 유명한 인물의 아이디였던 것이다. 그러니 현대미술쪽을 제아무리 뒤져도 그 정체가 붙잡히지 않고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물론 사람들이 별로 궁금해 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피버 옵티크(Phiber Optik)’란 광섬유를 뜻하는 파이버 옵틱(Fiber optic)을 패러디한 이름으로 1990년대초 미국사회를 요란하게 만들었던 해커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의 아이디이다. 해커는 본래 MIT대학의 인공지능연구소(Artificial Intelligence Lab.)에서 대규모의 메인 프레임을 다루는 컴퓨터 달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말하자면 해커란 전자정보사회의 마스터 또는 마술사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당시 유명한 해커였던 ‘피버 옵티크’는 백남준이 일찍이 예견한 ‘일렉트로닉 슈퍼 하이웨이’를 자유롭게 유목하는 주인공인 셈이다.
피버 옵티크(Phiber Optik) 206×147×224cm 혼합기법 1995 장흥아트파크 소장
피버 옵티크와 관련된 해킹전쟁의 전모는 다음과 같다. 피버 옵티크는 1984년 렉스 루더(Lex Luthor)가 창립한 유명한 크래커(불법적 활동을 하는 해커) 그룹이던 ‘파멸의 군대(LOD, Legion of Doom)’의 한 멤버였다. 그는 멤버들과의 불화로 이 그룹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는 친구들과 또다른 해커 그룹을 결성해 자신을 쫓아냈던 ‘파멸의 군대’와 1990년부터 2년에 걸쳐 불꽃 튀는 온라인 전쟁을 벌였다. 상대방 전화선을 먹통으로 만들거나 도청을 하고 컴퓨터에 침입해 끝내 사회 문제로까지 확대되기에 이르렀고 결국 연방정부가 피버 옵티크와 그의 친구들을 구속하면서 이 사건은 막을 내렸다.
작품 <피버 옵티크>는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이 <칭기스칸의 복권> <훈족의 왕 아틸라> <마르코 폴로> 라고 명명한 것들과 같은 계열의 작품이다. 이는 동서 문화의 연결자(미디움)였던 스키타이족을 상징한다. 그러니 이 작품은 백남준이 미국의 클린턴 정부가 자신의 ‘일렉트로닉 슈퍼 하이웨이’라는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호기롭게 주장했던 일화와 함께 동양과 서양의 정보 교류가 교통과 통신이 결합된 문화사의 맥락으로 가로지르면서 이루어졌다는 백남준의 통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백남준은 자신의 ‘일렉트로닉 슈퍼 하이웨이’ 개념을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자신이 직접 큐레이팅한 기획전 <인포아트>에서 실현하였다. 그런데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것은 제제목으로 빌려온 피버 옵티크와 그의 친구들이 만든 해커그룹 이름이 바로 ‘왕사기꾼(MOD, the Master of Deception)’이라는 사실이다.
‘예술은 고등사기’라고 일갈했던 백남준의 통찰과 피버 옵티크의 ‘왕사기꾼’이란 해커그룹은 쌍둥이처럼 닮지 않았나? 절로 무릎을 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