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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계雜담] 인사동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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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31일(목) 조은정 최열 정준모 권근영 황정수 윤철규

윤철규(이하 윤)  인사동이 전통과 현대미술을 아우르는 문화특구처럼 여겨져왔다가 근래 그 모습이 바뀌었죠. 화랑도 최근 많이 빠져나가고 고미술전문점들도 사라져서 식당과 까페와 쇼핑을 위한 공간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서 뭔가 대안을 제시하자거나 논쟁을 하자는 것은 아니고 있는 그대로 인사동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눠보면 어떨까 해서 모셨습니다. 


조은정(이하 조)  인사동의 추억인가요?(웃음)

정준모(이하 정)  지금 20년 넘게 인사동을 지키고 있는 터주대감이 어느 정도일까요?

 한양화랑이 오래됐죠.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있는 곳은 그 외에 동산방, 선화랑 등이 떠오르네요. 자리를 옮겼지만 노화랑, 공화랑, 가람화랑 등도 남아 있습니다.  

 가나도 있죠. 덕원화랑 앞이 중심이었는데 인사동의 중심이 많이 이동한 듯합니다.

 성하빌딩 지하에 화랑이 여럿 있었고... 버드나무가 유명했던 동네였죠. 지금은 버드나무가 잘 눈에 띄지도 않아요. 


 백송 등이 남아있고.. 

 창덕궁 앞으로 스무 곳 쯤이 이사갔죠.

황정수(이하 황)  이명박 정권 때 그 지역을 지원해준다는 말이 있어서 그곳으로 많이 갔는데, 그쪽이 특별히 살아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아이옥션도 그쪽으로 갔죠.


 예전 돈화문앞 주유소 땅을 국가에서 사서 국악공연장을 만든다고 합니다. 

 요즘 그쪽에 관광객이 많으니까...

 우리나라 관광객들 국악공연 공짜로 볼 수 있는 곳이 많잖아요. 남산 한옥마을 등등. 유료 국악공연장이 경쟁력이 있을까 싶네요. 

 인사동 쪽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그렇게 많지만, 관광 상품이라고 펼쳐놓고 파는 것이 중국에서 비슷하게 만든 것들이어서 혀를 차게 됩니다.


 전국단위 민속공예품 전국대회가 있습니다. 그 대회가 열린 지 20년이 넘어서 그 도록들을 봤는데 너무 똑같아서 아연실색했어요.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시장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자문을 하느라 ‘서울성곽’ 주제를 준 적 있는데, 싸구려로 대량생산해야 되어 곤란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울성곽에서만 팔 수 있는 거는 안된다고... 그런데 그 곳에서만 살 수 있는 공예품이 나와야 좋은 거 아닙니까? 나오시마에 가면 미술관이 수십 개 있지만 이우환의 그림이 인쇄된 에코백은 이우환미술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인사동 마케팅도 다품종 다량생산 소액상품이 아니라, 특별한 것, 중저가와 고가를 다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통인가게도 남아 있군요. 그런데 외관을 고쳐서 옛 맛이 사라졌어요. 근대 그 시기의 양식이라면 양식이었는데. 


최열(이하 최) 한옥이 많이 남아 있나요? 경인미술관 정도?

 제대로 된 한옥은 없는 셈이죠. 근대 양식으로 민가다헌 정도 떠오르고...

 사간동에서 내려오는 미술관 벨트가 있죠. 국립민속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그쪽의 화랑들. 국립고궁박물관, 역사박물관, 일민미술관... 그런데 인사동 쪽으로 오면 갑자기 중국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풍문여고 자리에 박물관이 생긴다고 하는데 그쪽은 또 어떤 분위기가 될지....

 그 옆에 대한항공이 보유하고 있는 미 대사관 숙소부지 터도, 호텔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니...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풍문여고 담벼락이 문화재라고 합니다. 풍문여고 지을 때 그쪽에 예전부터 담으로 사용하던 돌을 써서 만들었다고 해요. 담을 헐고 자연스럽게 길과 연결되어 전통 공방 겸 가게 같은 것으로 연결되게 하면 좋겠는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옛날 거라고 하면 모든 걸 문화재로 지정하고 금지옥엽처럼 하는데, 사실 후손인 우리도 이 시대에 좋은 것을 만들어 후대에 문화재가 될 수 있는 걸 남길 수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인식은 부족한 듯 해요. 문화재 ‘복원’은 사실 말이 안 된다고 봐요. 재건이 맞지. 인사동도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전통과 근대화 한옥들이 음식점으로 바뀌는 것이라 제대로 된 보존도 아닙니다. 절충주의식 편의성에 의존한 건축문화라고 볼 수 밖에요.


 인사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떤 인사동이었는지 그런 이야기를 좀더 해보았으면 합니다. 

 백탑파 동인이 모임을 가졌던 파고다공원이 그 근본 아닐까요.

 연암그룹 등의 중인들이 그 쪽에 살았었죠. 그러나 인사동은 1930년대에 와서야 생긴다고 봐야죠. 요정들이 무교동 청진동 등에 있었고. 그 동네가 사실 전부 중인들의 터죠. 기술직들. 피맛골도 그렇고. 
1900년 무렵 러일,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생활이 어려워진 북촌 대감님들이 물건을 내놔서 팔아야 생계가 이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나까마 거간들을 시켜 자기 물건을 내주어 팔도록 했죠. 안국동 로터리, 지금의 종로경찰서 앞쪽에 노점상으로 전을 벌였습니다. 청계천은 너무 싸구려고.... 그런 거간들 중 한남서림 통문관 등이 가게 자리를 얻어 열기 시작했던 것이 인사동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1930년대에 집중적으로 모여들었죠. 30년대에 소설가나 기자들이 비싼 충무로 쪽으로는 못 나가니까 그쪽에 모이기도 했고...

 기자들은 아마 관철동이었을 겁니다.

 인사동 관철동 등을 우리는 다 아울러 얘기하지만 일제강점기 기록들을 보면 얼마 멀지 않은 장소들도 동네가 완전히 다른 것처럼 적혀져 있어요. 모두들 걸어다녔으니... 지금은 우리가 얘기하는 인사동 영역이 넓지만 조금 좁혀 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2~3년 전에 경기도박물관에서 오레곤주립대에 있던 십장생 병풍을 추적했는데, 스카라극장 앞에서 1910년대에 구입했다고 해요. 구하산방 상인이셨던 홍기대선생님(1921-)께 들은 얘기로는 열 몇 살 때 충무로에서 골동상 가게 생활을 시작했다고 했고, 인사동으로 옮겨온 것은 전쟁 이후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새마을운동 지방에서 오래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올 때 1970년대에 고미술상 소위 나까마가 많이 오가며 인사동이 북적거렸죠.

권근영(이하 권)  골동 중개상, 소위 나까마가 현대미술과 접목되는 시점이겠네요. 액자집도 늘어나고요.


 파고다 아케이드에 그런 것들이 있었죠. 그쪽에 반도 아케이드 다음으로 미제물건들, 넥타이, 셔츠, 고급스런 관광기념품들을 파는 곳이 많았구요. 최열 선생이 쓴 화랑 약사에 나옵니다. 김환기 화백도 화랑을 했었는데...

 종로에서 했는데 금방 접었죠. 

 72년에 현대화랑이 이사하고... 

 인사동 고미술 전성기는 언제라고 봐야 할까요?

  70년대라고 봐야 될 거 같습니다. 

  아파트가 널리 보급되는 시점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주거 형태의 변화가 집에 소장하는 그림의 양식과 크기를 바꾼 예죠. 

  70년대에 경매라고 하는 개념이 확산됐습니다. 신세계 경매가 유명했고. 고미술관계자들이 한 경매가 20여 번 지속되어서 그때 판매된 것이 양이 많고 작품 수준이 좋았습니다. 도록이 확보되지 않아 실상을 정확히 알 수는 없는데 요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양이 많았다고 해요. 요즘은 경매에서 유행에 따라 작품이 판매되는 경향이 크지만 그때는 가치로 평가되어 상당히 수준이 높았습니다. 그 때의 좋은 작품을 그린 작가들이 잊혀진 예가 많습니다. 
 
 당시 경매의 인기 작품들은 어땠네요? 골동이나 한국화 쪽이었나요? 

 당시 경매는 고미술과 현대 다 다뤘죠. 근대 작가 중 특별한 것들을 다루어서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는 성향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규상 작품이 처음 매물로 나왔을 때 당시 삼성에서 사갔는데, 김환기 작품의 몇 배 가격으로 팔렸어요. 그런데 그 이후 이규상 같은 존재는 사라져버렸어요. 공예 쪽도 강창원 같은 이의 작품은 대표 미술품으로 다뤘는데 요즘 강창원은 잘 기억하지 못해요.

 경매는 일제강점기에도 있었쟎아요. 70년대 경매의 모습은 어떻게 달랐나요?

 일제강점기와 비슷했어요. 요즘은 누구나 다 개인이 가지만 그 때에는 회원제로 해서 교환회 비슷한 분위기였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인사동에 85년에 고미술협회가 창립 기념 전시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원 1학기 때였는데 당시 대학원 등록금이 90만원인 시기였는데 겸재 작품이 600만원 정도였어요. 큰 맘 먹고 저도 20만원짜리 작품을 하나 샀는데. 지금은 아무도 안 살 듯합니다. 보증서를 써줘서 보니 고미술협회라고 해서 무슨 협회가 있나 했더니, 인사동 골동품상들이 모여 만든 것이었죠.


 고미술상의 협회는 여러 차례 생겼었죠. 그 중 하나였을 겁니다.

 고미술협회는 장기간 있었고 주체들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현재의 인사동을 만든 것이 인사전통문화보존회의 역할이 크다는 의견들이 많죠. 무슨 가든인가 불고기집이 있던 자리에 쌈지가 생기면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된 거 아닌가요?

최  인사전통문화보존회는 90년대 후반 가나의 이호재 회장이 보존회장을 맡고부터 활성화, 상업화가 진행되었다고 봅니다.


 <인사전통문화보존회  연혁>
 1987. 6. 1     전통문화보존회 창립  
 1997. 4. 13    토,일요일 차없는 거리
 2000. 2. 28    사단법인 허가 (인사전통문화보존회)
 2000. 10. 14   역사문화 탐방로 조성
 2002. 4. 24     한국최초 문화지구 지정선포
 2003.~현재    인사동 문화학교 운영
                    문화업소 저금리 융자지원(정부)
 1987.~현재    인사전통문화축제 주최
                    고미술축제,화랑,공예전시,전통 차 시음회 개최


 인사동을 통해 우리 사회의 변화상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구한말 지배층의 몰락에서부터 거간의 등장, 상업화 지금은 국제적 상업화 안에서 노출. 무한의 이익을 추구. 위기감....

 제가 가나에 입사한 것이 97년입니다. 당시 인사전통문화보존회도 풍물 같은 축제 행사를 했었죠. 문화예술의 대중화 보편화가 안 된 때라 인사동이 5시면 절간으로 변했었어요. 1982년 그쪽에서 살 때까지도. 이호재 회장이 보존회장을 맡으면서 문화특구를 제안하고 종로구청 서울시청과 함께 문화예술의 지역으로 키워나가자는 제안을 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었죠.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70년대부터 기억하는데 그때는 진짜로 버드나무가 컸고 인사동에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낮에 갤러리, 화랑 같은 곳에 들어가면 아무도 없었고 그 화랑들은 아주 작았습니다. 그 때 기억에 반닫이 백자 라일락 등이 그려진 도상봉 그림이 어느 화랑에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때 현대미술이라고 유통되던 작가는 몇 명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박항섭 장리석 도상봉... 

 그때만 해도 서양화가 우리나라 미술의 중심이 아니고 동양화가 중심이었어요. 괜찮다 하는 화랑이 다뤘던 화가들이 동양화가인 남천 송수남, 지목 이영찬, 대산 김동수 등으로, 동산방 현대화랑 등에서 주요 작가로 다뤘습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나라 전통을 계승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잊혀질 수 있는지 안타깝습니다. 중국의 경우는 제백석 등 전통을 이은 작가에 대한 높은 관심과 평가가 있고 일본도 그런 분위기가 있는데, 우리는 그 시대에 다뤘던 동양화가 중 살아남은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조선시대 남종화 영향을 받아 제일 현대에 맞게 구현한 화가로 젊어서부터 나이들어서까지 작품수준을 유지한 사람은 누굴까 생각해 보면 대산 김동수가 떠오릅니다. 청전이나 소정에 뒤지지 않을 정도인데 지금 그를 잘 기억하지 못해요. 요즘 인사동의 모습은 그런 변화에서 나온 결과라고 보여집니다.

 그런 분위기가 시작된 것이 일제강점기에서부터겠죠. 10대가 6대가 논의하면서 어떻게 판매하느냐를 중심으로 한국화를 그렇게 바라봐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대산, 지목도 산수가 참 좋았어요. 지목의 작품이 청와대 집무실 양쪽에 지금도 걸려 있기도 한데, 그런 분들이 싸그리 가버린 것입니다.

  인사동에 화가들이 작업실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생산과 유통이 함께 되었던 것입니다. 인사동이라는 구조 자체가 재미있는 것이 화가들도 그림 그리러 드나들고 판매상도 있고.

 필방도 있고...

 재료구입에서 판매까지 모든 게 되는 공간이었죠.

 작업실 갖고 있는 분이 꽤 있었죠. 지금도 인사동 언저리 해영빌딩 건국빌딩 수운회관 등에 교수님 등 작업실 가지신 분이 계시긴 할 겁니다.

  오피스텔형 건물들에 서실이나 화실 형태로 작업실을 운영하는 분들이 계셨고요. 

 유한부인들이 그림을 배우러 인사동에 나오고, 그리고 사 가기도 하고. 그리고 선생님들을 이모집 등에서 식사대접 하고..(웃음)

 백화점 문화센터로 모두 이동하신 건가요.(웃음)

 우리나라 아파트문화와 미술의 변화에 대해 정체모를 말이 돌았죠. 아파트에는 동양화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어디서 근거한 것인지는 모릅니다. 하얀 벽면에 동양화 나부랭이를 걸면 칙칙해 보이고 집값 떨어진다는. 그러면서 황규백 판화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합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어느 집이나 식탁 옆에 걸려있다고 할 정도로 무지하게 팔려 나갔습니다. 그 당시 이삼백을 호가하던 작품들이 세월이 많이 흘러 요즘 나오는데 오십만원에도 팔리지 않습니다. 왜냐. 너무 많으니까. 
 
 아파트에서 주상복합으로 주거 형식이 확대되면서 김종학의 꽃그림 같이 강하고 큰 유화가 잘 팔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황규백은 식탁 옆, 거실에는 장리석, 박항섭 등 구상적 멤버들... 구현대아파트에서 신현대아파트로 가면서 그림이 바뀌기도 했어요. 박서보, 윤형근, 이우환, 김창열... 주상복합의 경우는 벽이 대리석이어서 그림이 세지 않으면 죽어버리지요. 그래서 컬러풀한 것들이 붙게 됩니다.

 어느 시대 어느 도시나 창작촌이라는 것이 부동산의 흐름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죠. 싼 아틀리에에 있다가 그곳이 비싸지면 옮겨갈 수 밖에 없으니.. 외국의 예도 그렇고, 삼청동도 인사동도 그 중의 하나일 거예요. 문제는 밀려난 다음 어디로 움직였느냐입니다.

 고미술은 장한평, 답십리로 옮겨가는 정책을 썼죠. 80년대에 저리 융자를 해 주면서.

  화랑주인이 건물주인 경우만 남고 세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화랑은 움직였죠. 인사동에서 아쉬운 것은, 기획을 하는 화랑들이 전속 작가들을 전시기획하고 힘을 가지고 미술을 선도하던 시대에는 의미 있었지만 화랑이 가지고 있는 힘이 약해지면서 더욱더 버틸 힘이 없어진 것입니다. 

 관광객이 늘고 그에 따라 영업집이 늘어나면 집세가 올라갈 수 밖에 없죠. 버티는 집은 세종화랑 관훈갤러리...

 관훈과 동덕미술관은 가로로 큰 공간에 현대미술 작가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좋았어요. 설치미술을 처음 본 곳이 관훈이었습니다. 작가들이 새로운 미술 시도를 할 공간이 인사동에 있었다는 이야기죠.

 잠깐 반짝 살아났던 것이 sk지하에 금호미술관을 만들었을 때라고 기억되요. 이준희 박영택 있을 때 90년대 초.

 인사동 학고재가 있을 때 좋은 기억이 많습니다. 초창기 좋은 전시가 많았어요.

 원화랑도 백남준 전람회를 했었죠. 

 81년 백남준 판화전을 했죠. 조그마한 네모난 방에서.

 7~80년대의 인사동이 한국미술의 현대성을 보여주는 현장 역할을 하고. 90년대 들어서는 조금 약화되었죠. 이름만 남고 실체는 없어지는 현상이 드러나고 있어요. 없어지던 북촌한옥마을 살아나고 하는 것도 그렇고 좋은 기회를 맞게 되는데, 제대로 잘 살아날 수 있도록 큰 시야를 가지고 인사동을 지켜봤으면 좋겠습니다. 구청직원도 문화쪽 관계자도.


 외국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밤에 사람이 잘 수 있는 곳으로 도심을 재창조하자는 바람이 불고 있어요. 인사동 골목길을 개발하려고 해도 땅 주인들이 양보하려고 하지 않죠. 대승적 차원에서 서로의 이익을 추구했으면 좋겠어요. 시나 중앙정부에 요구하기만 하지 말고. 
인사동 건물들이 노후되니 시설을 현대화하기 위해 저리 융자 달라는 등의 요구를 해 왔는데, 결국은 그런 식으로 해서 순기능 한 부분도 있지만 성형수술을 너무 많이 한 듯한 모습도 많습니다. 

 중국 유리창에 가서 보면 메인 도로는 별로 재미없지만 뒷골목에 갔더니 옛 청나라풍의 건물들이 있고, 일상생활이 이뤄지면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인사동의 경우 큰 도로는 까페가 되고 옷가게가 되고, 사람이 살지 않는 그저 관광용 상업공간이 되어 버리니, 우리 동네에서 생필품을 사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 됩니다. 예전에 거기에 작가들이 있고 화실이 있고 재료를 사고 그랬을 때 분위기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으니, 인사동이 좀더 조화로운 삶의 일부가 되게, 꿈꾸는 문화적 공간으로 지속될 수 있게 노력했으면 좋겠어요.

 도심 재창조 차원의 장기적 마스터플랜을 가졌으면 합니다. 지금처럼 찔끔찔끔 여기 좀 고쳐라 허가내주면 선풍기아줌마가 됩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건 우리가 거기에 땅뙈기 한 줌 없기 때문이겠죠.(웃음)

 지금 인사동에 오는 사람들이 누군가에 맞춰야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곳으로, 우리가 관심을 가진 쪽으로 뭔가를 만든다면, 미술애호가들이 출입하는 곳이 될 수는 있겠지만 과연 지금 인사동을 찾는 젊은이들이 여전히 올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인사동이 이제 과거의 추억을 가지고 변화시키기에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달라졌습니다. 북촌, 원서동, 돈화문 맞은편, 서촌 등 양쪽 다 화랑들 생기고 새로운 분위기이지만 점점 인사동처럼 되어갑니다. 


 인사동은 포기랄까... 황선생이 말한 것처럼 우리 뜻대로 맞추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금 있는 그 상태를 좀더 정교하게 연구해서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가능하겠죠.

 팔 것만 아니라 체험도 아니고 만들기도 하고 공방이 살아났으면 좋겠어요.

 정말 체험하는 게 아니라 체험하는 척 하는 것이 문제죠. 

 쌈지길엔 트릭아트미술관도 들어섰지요. 옛 인사동을 드나드는 이들과, 지금의 인사동 방문객들의 기호 차이를 보여주는 예랄까요. 

 미술 체험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어서 주의해야 하는데..

 인사동에서 좋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깝죠. 재료상들도 가게 세 때문에 기념품 파는 가게로 전락하고 있어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죠. 문제는 사라지고 밀려나는 이들이 어디로 가느냐입니다.

 인사동에 젊은이들과 외국인들이 방문하는 곳은, 중심부 가운데 큰길과 음식점 정도만 해당됩니다. 아직 수백 개의 화랑이 골목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중국물건을 파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그림 좋아하는 사람들이 월급을 아껴 그림을 사던 화랑들이 없어지고 주말에 시간을 내서 미술품을 구경하고 자기 취향에 맞는 작품을 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다는 것이 있습니다. 취향에 따라 각기 다른 작품들을 파는 화랑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가게들이 없습니다. 화랑에서 다루는 물건이 대동소이해서 전부 경매회사에서 다루는 특정작가들 것 뿐이고, 자신들만의 주요품목이라는 것이 없어요. 어떻게 경매회사에서 다루는 것만 가치 있고 비싼 작품만 가치가 있겠습니까. 싸도 가치 있는 것들이 있는데 획일화되어 버려 미술품이 딱 두 가지로 나뉩니다. 경매회사에서 다루는 작품과 안 다루는 작품. 경매회사에서 다루지 않는 작가의 작품을 구하는 사람들은 인사동에 나오지 않습니다. 매상을 많이 못 올리는 손님이니 인사동에 나와서도 대접을 못 받습니다. 화랑들이 경매회사에서 다루는 작품만 하다 보니 굳이 귀찮게 일반인과 장사하지 않고 경매회사와만 장사하고 싶어 하죠. 애호가가 나오지 않으니 화랑 굳이 운영 안 해도 되고. 개인 사무실과 전화기 하나만 가지고 화랑을 해도 되는 거죠.

 경매사의 나까마로군요. 단순히 개인 사업의 실패, 골목상권 침해를 말할 게 아니라 저변 상실을 고민할 때입니다.

황  인사동이 고민해야 할 것은 정말 미술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일 겁니다.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경매회사에서 다루지 않는 좋은 작품도 많다는 것을 알리고... 예전에 미술 공부를 할 때 제일 많이 도움이 되었던 것은 화랑과 미술잡지였어요. 거기에는 다양하고 명쾌하게 제시된 작품 중에 내 취향대로 선택할 수가 있었죠. 요즘은 미술잡지 필진들이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듯합니다. 서양의 것을 옮기는 수준이랄까, 특별한 지침을 주지 못합니다 . 현재 경매회사 파는 물건만 공부하면 제일 빨리 작품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을 정도예요. 전국 화랑들이 동시에 전시해도 경매 한 번에 못미칠 걸요.
 
 감상을 위해서, 좋아서가 아니라 투자 개념으로 미술품을 보는 것이죠.

 꼭 투자는 아니라도 심미안조차도 세뇌가 된다는 점이죠. 그게 좋은 줄 아는 겁니다. 스스로 선택할 능력이 없어졌어요. 

  자본이 욕망과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와 더불어 자신의 의무와 사명을 당연시 생각해야 되는데 그게 없습니다. 현실이 그러므로 놔둘 수 밖에요.

  아마도 연극인들이 이 자리에 모여 대학로의 추억과 실정을 얘기해도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뮤지컬과 연극이 기업화되고, 대학로에는 삐끼만 있고 운운. 문화의 트렌드도, 중심지도 변하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퇴로는 어디인가, 어디로 가는가가 될 듯해요. 인사동의 변화는 고미술의 몰락과 그 흐름을 같이 한다고 보면 될까요. 골동은 오늘에 재생산되는 것이 아닌지라, 더이상 좋은 작품이 널리 공개되지 않으면서 시장의 동인을 잃은 걸까요. 여러가지 내부적 문제로 수요자들의 관심과 신뢰를 잃은 걸까요. 인사동의 한창 때보다 미술 시장의 규모는 분명 커졌는데, 그 시절 이 ‘골목상권’에 있던 저변은 어디로 간 걸까요. 

 장소가 갖는 기억은 사람에게 중요한 부분이죠. 인사동에 각자 개인적인 기억이 있겠고, 미술계 전체로 보면 그 장소에 존재하던 특별한 정서 같은 것이 훼손되고 없어지는 것이 아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로 되돌리자, 정책을 만들자 그런 말은 아니지만 그저 인사동에 대해 짚어보자면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됩니다.

 인사동에 가면 옛날미술 근대 현대미술 다 볼 수 있었고, 함께 있어서 자양분이 되고 서로 시너지 효과가 있었을 텐데 다 찢어지고 사라져 아쉽습니다. 하나하나 살아남으려면 프로모션이 필요하게 되고... 그런 식으로 변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근대인으로서, 너무 자본주의화되는 것들이 아쉽네요.



 인사동을 복원할 방법은 없지만, 우리가 우리 식의 추억을 가졌다면 우리 아이들이나 후세도 추억을 가질 만한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소비자가 요즘 젊은이들이니까 그에 맞게.

 대로 말고 한가한 안쪽으로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30대 후반~40대가 중심이 되어서 실제 미술품을 보고 좋아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중앙일보 정재숙 기자가 “간송 전형필 또 없습니까” 칼럼을 썼던데, “인사동 또 없습니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다시 그와 같은 곳이 나올 수는 없겠죠. 자본이 사회적 책임을 갖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국가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만들어 미래가 다시 시작되었는데 그들이 책임을 다 하고 또 흐름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미국 소호의 예를 들면 함께 이동해서 그것을 이어가는데, 우리는 이동이 아니라 해체가 된다는 것이 아쉬워요. 인사동 스캔들이라는 영화도 있고, 갤러리 페이크 중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 거리로 인사동만 얘기됩니다. 인사동이 해체되면 과연 우리를 대표하는 미술지구는 어디일까요.

 사회가 변하고 도시가 변화하고 다양화되면서 당연한 변화겠죠. 바라건대 인사동이 예전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우리 문화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곳으로 남아주고 발전해 갔으면 하고 바래 봅니다.

 

정리 SmartK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4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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