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6일 정준모, 최열, 권근영, 윤철규
윤철규 (이하 윤) 얼마 전 기사를 보니 올해 터너 상 수상 후보 네 명 중 세 명이 글래스고 아트스쿨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우리나라로 치면 지방대와 비슷한 곳일 텐데 현대미술의 중심으로 서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 뉴욕에서는 미술시장이 새로운 기록을 세우면서 시장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한국은 어떤가 살펴보게 됩니다. 서울옥션의 홍콩경매 브로셔를 보면 한국 작가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한국의 미술시장과 작가들이 기운을 내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오늘은 그 원인과 대안에 대해 얘기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정준모 (이하 정) 사실 글래스고는 전통이 있는 명문 학교로 더글러스 고든 등 yBA의 주축을 이루는 작가들을 많이 배출했죠.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의 예민한 문제도 있긴 하지만 워낙 글래스고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공간을 많이 가진 흥미로운 곳입니다. 전통을 유지하면서 자신들만의 미술을 꾸준히 만들어 왔어요. 나름대로의 순수성을 지켰기 때문에 더 터너상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권근영 (이하 권) 터너 상은 가장 주목할 만한 활동을 보인 50세 미만 영국 미술가에게 주는 상이었습니다. 지난해엔 처음으로 비영국인(프랑스 출신의 프루보)에게 수여하는 등 ‘영국서 활동하는’으로 그 대상을 확장중입니다. 그러니 스코틀랜드에서 수상자가 나온다 하여 이상할 것은 없겠죠. 다만 이를 우리의 상황에 비춰 보자는 것이 이번 좌담의 취지인만큼, 지금 활약하는 주요 미술가 중 서울대ㆍ홍대가 아닌 대학 출신이라면 어느 학교가 될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정 한동안 한성대나 경원대 출신이 약진하기도 했죠.
권 한국예술종합학교, 국민대, 건국대는 어떨까요.
정 국민대도 서울대 출신의 교수들이 대부분이고 출신 작가도 많지 않습니다. 제가 보이게 현대에 와서는 기능적으로 유능한 작가보다는 인문학적 베이스가 있는 작가가 나와야 되는데 교육기관에서 이론을 덜 배우는 것 같아요. 실기 중심의 미술대학에는 미술이론 교수가 전임으로 있는 경우가 드뭅니다.
윤 미술문화를 큰 덩어리로 볼 때 미술시장은 그 일부이기도 합니다. 20세기 후반 이후 미술관과 시장은 미술계에 동력을 주는 두 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형식적이긴 해도 미술 인프라에 집중투자되어 다른 아시아국가들에 비해 미술관 박물관은 많이 갖추고 있는데, 시장에서는 전혀 맥을 못추고 뒤떨어지고 있습니다. 미술시장도 사실 화랑이 400여개 있다고 하는데, 동경이나 뉴욕 같은 곳에도 화랑이 400개가 되지는 않아요.
정 겉만 번지르르한 거죠. 미국에서 아무리 시장 파워가 커지더라도 미술계의 중심을 이루는 미술관이 존재하여 균형을 잃지는 않습니다. 일본의 경우 상업화랑 아니면 화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데 우리나라는 대관만 해 주는 공간만 있어도 화랑이라고 해요. 건물주 부인이 그냥 1층에 전시실 하나 만들어 놓고 갤러리라고.... 그런 식으로 양적 팽창만 한 거죠.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해는지. 본령에 충실했는지 따져보면 허술하기 이를 데 없죠.
정 지방정부가 각 지역의 아트페어에 지원하는 예가 수십 개가 됩니다. 왜 아트페어에 공공의 세금을 써야 하는지 고민해 봐야 하는 문제예요.
최 지자체장이 민선시장이 되면서 아트페어와 화랑주, 지역작가들이 연계해서 선거운동 조직 비슷하게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알만한 지역향토작가들이 선거운동원으로 활약하는 셈이죠. 눈에 안 보이지만 몇몇 곳에서 부딪혀본 적이 있어요. 이렇게 되면 시민이 세금을 지자체의 장이 사욕을 위해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죠.
정 정부가 문화정책을 세우고 그것을 집행하기 위해 예산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서가 사업을 하기 위해 돈을 씁니다. 이 사업비, 이권에 작가들이 줄을 서구요.
최 미술계 만의 일은 아니죠.
권 미술정책을 제대로 세우고 집행하긴 쉽지 않겠죠. 미술관 개관만 해도 건립비용, 소장품 구입 비용, 인건비 등 해마다 큰 돈이 들어가는 일일텐데 아트페어라면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생색을 낼 수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죠.
정 문화정책 없이 문화사업만 있다 보니 빈곤의 악순환이 됩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문화정책은 크게 다르지 않아요. 197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든 문화예술진흥법이 다입니다. 문화예술 교육 정책도 부작용만 낳구요.
최 미술관의 질적 발전, 미술시장과 미술계의 활성화, 작가 양성 등 미술계 발전을 위한 토대를 생각해야죠. 이러한 토대 위에 정부 지자체가 정책을 수립하고 예산을 세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권 장샤오강의 스튜디오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상파 화가부터 프랜시스 베이컨에 이르기까지 많은 다른 미술가들의 화집이 곳곳에 쌓여 있는 장면이었어요. 중국의 인물화가로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를 미술사적 맥락에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은 작가들에겐 기본적 출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독창성을 잃지 않기 위해 남의 작품은 안 본다”고 말하는 이도, “작품이 말하도록 해야지 작가가 말하면 안 된다”며 자기 작품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는 이도 많습니다. 과거 문인화가들도 통찰력 있는 화론을 제시했는데, 대체 어디서 이런 ‘전통’이 생긴 걸까요?
최 19세기 이전의 훌륭했던 전통이 20세기 이후 천박하게 변질되었죠. 최고의 작가, 화상, 미술관, 교육기관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토대에서 무지막지한 식민지시대, 독재시대를 겪으면서 무지막지한 자들이 미술계에 포진하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어떤 작가가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대체로 미술대학들의 풍토가 이론교육이 무의미하다는 의식이 팽배하고 이론 수업이 있어도 작가인 교수가 가르쳤습니다. 시대정신, 미술사적 인식이 없는 최악의 상태가 20세기에 만들어지고, 그런 상태에서 정식교육을 거의 받지 않은 박수근 같은 작가들이 오히려 위대한 성취를 얻었던 것은 무지한 시대의 역설이라 할 것입니다.
정 조선말에, 기능 양성 실기중심의 2년제 학교가 생기면서 굳어진 시스템이죠. 실기 기능 중심인 엘리트 미술교육. 그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최 이우환 같은 경우 연구가 되고 존경받고 하는 것이 그가 작품에 대하여 미술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많이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화가들이 작품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과묵해서가 아니라 생각이 없어 말을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에세이 같은 짤막하고 가벼운 글들이 아니라 미학적 성찰이 있는 글을 쓰는 작가가 많지 않습니다. 대학 미술교육 기관을 폐지해 버린 일제강점기와 그 속에서 성장한 작가들이 미술교육기관을 장악한 전후 한국사회 교육정책의 산물이겠지요.
권 작품을 하는 것에는 손으로 그리고 만드는 것 뿐 아니라 작품에 대해 사유하고 글쓰는 것 등 작품을 향한 일련의 과정이 모두가 포함됩니다. 자기 작업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깊이, 많이 생각한 나머지 자기 작품에 대해서라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얘기할 수 있는 게 작가 아닐까요.
최 김종영 등 사유의 깊이가 깊은 몇몇 작가들이 떠오르기는 합니다. 글을 많이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미학으로 그 시대와 어떻게 경합하고 경쟁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권 요새는 많이 나아졌지만, 전시 팸플릿에 단골로 등장하는 평론가가 있었죠. 단어만 몇 개 바꿔서 천편일률적인 발문을 얹고.... 그런 것을 부탁하여 실을 바에야 작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 훨씬 좋을 겁니다. 우리가 보고 싶은 것 또한 그런 뻔한 비평이 아니라 작가의 말이구요.
최 10여 년간 실기 전공 학생들과 이론 수업을 했는데, 그들은 어느 정도 이론에 대해 두려움, 지겨움, 싫은 감정이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얻은 잡다한 지식과 최근에 도는 이야기는 많이 알지만 기본 토대는 너무 약해요. 이론적으로 탄탄한 친구들도 있는데 실기실에 가서 그 학생들의 작품을 보면 감성이 받쳐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조화로운 경우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윤 작가 개인의 문제를 떠나 시스템 차원에서 본다면, 작품의 유통구조를 강화하는 부분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앞서서 화랑에 대한 지원이 비판받았지만, 방식이 제대로만 된다면 유통이 강화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평에 대한 전문가가 있어 많은 작가들 중에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를 골라내어 발전할 수 있게 돕고, 도태될 것은 도태되도록 한다든가 하는 것 말입니다. 미술관 또한 마찬가지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작가를 걸러내고 키워내는 시스템으로 작용할 수 있는데....
정 자본주의에서 시장만큼 정확한 곳이 없죠. 그런데 우리 미술시장은 자기의 기호와 취미로 무엇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루루 따라다니는 쏠림현상이 심해요. 시장이 자생력 자정능력이 있다면 시장에 맡겨도 될 텐데 말입니다. 지방미술관의 경우도 예산 몇 푼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미술관이고 화랑이고, 분야 구분을 못하고 그냥 마구잡이로 하고 있습니다.
최 유통의 시스템으로 기능하는 것을 뭐라할 수는 없지만 미술관은 기본적으로 견지해야 할 틀이 있습니다. 그를 위해서는 관장과 학예사 특히 학예사들이 능력을 갖춰야 하는데 무능하고 무지합니다. 유능한 친구들도 들어가면 무능해지고 눈치를 봅니다. 속으로는 불만만 쌓이겠죠. 구입할 작품이나 전시할 작가를 어떻게 선정하는가를 보세요. 그 시대의 미술을 반영하고 경쟁하고 이끌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유명 화랑들이 모 작가를 띄우며 신나게 장사를 하고 있을 때니 굳이 국립미술관에서까지 그 작가를 전시해야 될 이유가 없는데 큼지막하게 전시를 했죠. 시장과 미술관이 서로 영역을 나누어 경쟁하고 활성화할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정 미술관 큐레이터들이 실력이 없다보니 눈치를 보며 안전한 작가를 찾게 된다는 것이 문제죠. 새로운 작가를 발굴해 낼 생각을 못하고... 판단의 근거가 없기 때문인 듯합니다.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큐레이터들이 왜 이 작가를 선택하고 왜 이 전시를 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관 작가가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10년 내지 20년 후에 한국관에 과연 어떤 작가를 데려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더라구요.
권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선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여기 계신 분들 모두의 머릿 속에 대략 10명 이내의 사람들이 떠오를 겁니다. 그런데 이들이 최근 몇 년간 국내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연 적이 있나요. 실제로 ‘대표선수’로 전시를 연 적이 있나요. 이들마저도 대중과 접점을 확보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미술계 밖에서는 여전히 생소한 이름일 뿐입니다. 이들부터 더 많이 알리고 보여줘야 합니다. ‘뻔한 이들로 몰리고 쏠린다’는 비판은 그 다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 외국에 많은 기회를 만들어 작가들을 데리고 나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 작가들이 그쪽에서 인지도가 없다보니, 그쪽에서 관심이 있어도 우리 쪽에서 어느 정도 예산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해 일이 성사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 지원은 미미하고... 한류화다 뭐다 얘기하지만 실질적인 액션, 플랜이 없어요.
최 국립 박물관 쪽을 보면, 정선 김홍도 김정희 강세황 등 몇몇에 개인전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천년 역사에 그거 밖에 없는 건 아닌데 말입니다.
정 작가의 경우 작품이 한번 미술관에 팔리면 잘 나오지 않으니 미술관에 작품을 팔지 않으려고 하고, 미술관은 작품을 잘 구해오지 못하고 이런 것들도 대규모 회고전에 소극적이 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근대를 보는 눈> 전시의 경우 작품을 98퍼센트 대여해서 했습니다. 이런 사정이니 작품을 빌릴 수 있느냐가 중요한데 미술관 큐레이터는 그런 능력이 부족하니... 컬렉터와 소통하는 큐레이터가 적습니다.
한국 작가들이 외국에서 제대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우리 미술관이 글로벌 스탠다드로, 외국 유수의 미술관과 수준을 나란히 할 수 있고 파트너쉽이 가능할 수 있도록 질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세계적인 미술관들이 서로 네트워크를 가지고 파트너로 상부상조합니다. 각각 공간별로 특성화가 잘 되어 있고.... 우리나라는 이것저것 모두 한군데서 하다보니 분류조차 제대로 안 됩니다. 아직 초보적인 단계인 거죠. 비슷한 급으로 소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최 화랑의 경우는 어떤가요?
윤 화랑이 작가를 관리하고 키우는 화랑 본연의 역할을 하는 것은 국내에 10개 미만인 듯하네요.
정 외국에도 화랑들이 작가를 케어하고 키우는 비중은 크지 않은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작가를 키워낼 수 있는 안목 있는 작은 공간들이 다양하게 많다는 것입니다. 이 공간을 화랑이 지원하는 것이죠.
최 우리나라에도 대안 공간들이 있긴 해도 제대로 굴러가지는 곳이 적습니다. 지원금을 받고 오히려 시들해지는 경우도 많구요. 예전부터 주장하는 바지만 제 생각에 모든 국가적 지원은 사후지원이어야 된다고 봐요. 성과에 대한 평가로서. 사전지원은 특별한 예외로.
정 독일은 작가들이 작더라도 모두 후원회를 가지고 있어서 사회적으로 지원이 됩니다. 예술가 조합이 뜻이 맞는 젊은 작가를 지원하기도 하구요. 조합의 경우 그 사람의 생계에 대해 3~5년 지원하고 그가 열심히 노력해서 작업해서 성과를 얻으면 그 이후에는 회비를 내는 조합원이 되는 거죠. 성과를 못 내어 회비를 낼 수 없게 되면 떨궈지고.
윤 좀비화랑 좀비화가를 퇴치해야 되죠. 적당한 도태가 필요합니다.
최 국가기관의 사후 지원과 작가들마다 개인후원회를 만드는 사회적 풍토를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권 자비로 대관해 여는 전시 같은 경우가 지인들에게 ‘개인후원’을 받는 자리라 할 수 있겠죠. 문화 예술의 국가 지원은 미술에만 국한된 게 아닙니다. 예컨대 런던이나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북페어, 영화제에 나가는 메이저 영화사에 예산이 지원되기도 합니다. 미술에 대한 지원이 부당하다는 말씀이신지요.
정 갑자기 생겨난 지방 도시의 아트페어에 지자체가 무조건적 지원을 한다든가 하는 기준없는 지원은 중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심사가 있어 아무나 참가할 수 없는 바젤 아트 페어에 출품하는 화랑과 작가는 지원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왕에 장학금을 준다면 좋은 대학 들어간 놈을 줘야죠.
최 사실 시장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니 모든 것이 뒤죽박죽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얘기를 하려고 하지만 본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현재 화상들이 대한민국 미술계 트렌드를 좌지우지 하는 권력으로 자리잡은지 10년 이상 되었으므로 이제 자신들의 책무를 생각할 때가 되었다는 말씀은 드리고 싶네요.
정 예전에 한국 현대미술해외순회전을 기획할 때의 얘기인데, 해외의 미술관과 연계해서 반반씩 비용을 부담하여 초대전 형식으로 작품을 가져가는데, 늘 끼느 작가가 낀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박지성이 저번에도 국가대표로 나갔는데 왜 매번 국가대표로 나가느냐는 질문과도 같은 거죠. 큐레이터 들이 위험부담을 지더라도 과감한 베팅이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제 의견을 정리해 보자면 세계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한국에도 외국에 필적할 만한 기관이 생겨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새로운 작가들을 유럽 무대나 미국 무대에 보여줄 수 있는 시스템이 없고 소통하기 어렵다보니 특정 기관 특정 인사가 독점하고... 각각의 영역에서 플레이 할 수 있는 전문적인 미술관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화랑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한 국내 유력 화랑 이사장이 외국 화랑주들과 만나면서 자신은 별 생가없이 그림이나 제값에 팔아보려고 화랑을 했던 건데 외국 화랑주인 중에는 미술사 박사도 있고 미술계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 사람도 많아 비교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윤 관련 정부기관이 정책을, 미술관과 큐레이터가 자신의 영역에서 전문성을 키우고, 화랑도 미술계 내에서의 사회적 책무를 인식하고,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깊은 사유를 해야 하고.... 각 기관이, 또 사람들이 제 역할을 해주는 것이 정답일 수밖에 없겠네요. 한국 사회가 어느 분야든 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지금이 변화의 동력이 가장 강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긴 시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