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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립미술관의 블록버스터 전시
최열 이중섭 박수근전 같은 경우를 보면 사람이 꽤 많았어요. 김환기 전시도 그렇고. 그런데 이러한 전시들이 개인 소유 갤러리에서 이뤄졌잖아요. 국공립미술관들로서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정준모 전시를 위해 작품을 빌려오고 빌려주고 하는 문제가 복잡해서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림 소장 정보도 개인적으로만 알 수 있고... 근대미술 전시를 하는 경우는 인적 네트워크와 신뢰가 있어야만 그림을 대여해 올 수 있어요. 소장자-컬렉터-화상-비평가의 미술계와 미술관의 네트워크가 약하다고 해야 할까.
조은정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있었던 <미국미술 300년전>을 보면서 든 생각이 있어요. ‘왜 국립박물관에서 미국미술전을 하지? 왜 내가 미국의 역사를 여기서 공부를 해야 하지?’ 그 전시도 많은 사람들이 찾은 데다 평도 좋아 나만 불쾌했나 싶어서 놀라웠습니다. 마음을 울리는 작품이나 명화는 보이지 않았는데.
정준모 저는 견해가 조금 다릅니다. <미국미술전> 자체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미국의 현대미술 이전의 미국 미술의 새로운 모습이나 역사에 대해 잘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대관’전시를 한다는 것입니다. 낸 세금을 돌려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서울시립미술관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블록버스터만을 접하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서울시립미술관이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관으로 여겨지고 있을 걸요.
조은정 <팀 버튼>전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야겠어요. 재미는 있었지만 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팀 버튼인가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팀 버튼’에서 기대하는 시각적인 작품들조차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구요. 영화자료 전시 같은 것을 굳이 미술관에서 해야 했을까요?
정준모 MoMA에서 열렸던 팀 버튼전 일부만 들여와서 더 그런 느낌이었을 겁니다. 전세계적으로 미술관에서 하는 영역이 넓어진 것이 사실이잖아요. 팀 버튼 전이 원래의 기획대로 제대로 보여졌다면 나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 식으로 보여줘 놓고도 마치 대단한 새로운 것을 한 것처럼 마케팅하는 회사가 문제인 거죠. 우리나라 관람객들이 적어도 내가 가볼 전시에 대해서 자기의 판단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매스컴과 주변의 영향으로 보게 되는 경향도 문제인 듯해요. 소비자로서 관람객들이 물건을 보는 안목이 없는.
조은정 미술관이 있는 지역이 경제적으로 살아난 것 정도가 순기능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위치가 직장인들만 많아 주말이 되면 조용한 동네였는데, 사람들이 주말에도 줄을 서서 전시를 보기 시작하면서 주변 상권이 살아났다고 하더라구요. 주말에 놀 거리로 전시회를 보러 간다는 것도 어찌 되었거나 좋은 일이구요.
최열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예술의전당이나 컨벤션센터 빌려 블록버스터 전시를 하는 것은 뭐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국공립미술관이 블록버스터 전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문제죠. 미술관이 정책적으로 본연의 과제를 지속적으로 해결해내는 과정에서 중간 중간 블록버스터가 배치되는 것 정도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시립미술관이 블록버스터 대관을 매년 하게 된다면 이름이 부끄러운 것이 되죠. 미술이라고 하는 우아한 이름을 붙여놓고 대중추수적이고 대중지향적인 상품으로만 활용하고, 더 많은 물량으로 더 많은 이익을 얻는 데 이용하려고만 하는 셈이니까요. 시립미술관의 소장품을 보면 끔찍할 지경인데 이런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할 기미가 없고... 쇼를 연출해서 우아함을 팔아먹는 데에 집중하고 있는 거죠. 국립현대미술관도 그런 전례를 밟게 될지도 모릅니다. 개관을 앞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분관을 보면, 그렇게 될 인프라가 환상적으로 구축돼 있어요. 북촌 사간동 일대는 조선시대 이래 최고의 명당 아닌가요. 전시관도 7개라는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조감도
권근영 미술관들이 대형 전시에 대한 압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경우 그런 이미지로 굳어져 이제 블록버스터 대관전을 안 할 수도 없을 거에요.
조은정 고갱전만 하고 안하겠다고 했는데.
최열 앞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는 정책적으로 판단해서 잘 배치했으면 합니다.
정준모 처음이 중요하죠. 고양문화재단 아람누리 미술관의 경우엔 지역적 요구가 엄청나게 많은데도 지금까지 그런 데에 휘둘린 적이 없어요. 처음에 잘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죠. 이에 반해 최근의 어떤 미술관은 예술원 전람회를 해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어요.
블록버스터만이 살길인가
권근영 우리 미술관들이 더 많은 관객을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품이 즐비하다는 루브르나 메트로폴리탄만 해도 재방문을 늘리려는 미술관들의 노력이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관광객으로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미술품을 보기 위해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을 늘리기 위해서요.
조은정 미술관 자체적으로 역할을 키워나가고자 하는 긍정적인 노력이 필요하죠.
권근영 얼마 전 서울미술관의 박찬호전을 보고 왔는데, 참신한 기획에 다양한 볼거리도 있고, 여러 면에서 좋았어요. 미술관의 기획력이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정준모 기획이 참신하면 사람이 옵니다. 다만, 이슈가 될 만한 소재에 왔다 갔다 하기보다는 한 미술관이 자기 정체성을 가지려는 노력이 필요하죠.
권근영 반 고흐전은 많이 하면서 이우환 전은 왜 안할까요. 제대로 백남준 전을 해내는 서울시내 미술관이 없지 않았나요?
정준모 사실 국내 작가의 경우 진행에 장애물이 있어요. 또 일이년 준비해서 전시를 할 수 있는, 그런 기획을 할 시스템이 안 되어 있구요.
조은정 자체 기획으로 블록버스터에 준할 전시를 할 자금과 작품 동원 능력 등이 부족한 거죠. 학계나 미술관 측에서는 미술시장의 콜렉터와 관계를 갖는 것을 그다지 바람직하게 보지 않아요. 이미 미술시장은 형성이 되어 있는데, 미술관 예산은 적지, 작품은 가지고 있지 않지... 미술시장과의 협업 체계를 갖추고 있어야 가능해요.
정준모 소장자가 자신의 작품을 선뜻 내어주지 않는 것에 있어서는 또 다른 장벽이 있어요. 명품가방이나 외제차 사람들이 질시의 대상이었던 때가 있었던 것처럼 그림을 가진 사람이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의심을 받기도 하니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경우도 많거든요.
권근영 그런 사람들을 달래서 전시를 하게 하는 것조차도 대단한 거네요.
정준모 만약 블록버스터 기획사를 끼지 않고 미술관이 자체기획 자체예산으로 흥행 가능한 주제를 다루는 기획전을 한다면 여러 가지가 좋아질 겁니다. 입장료도 내려갈 거구요.
조은정 기획사가 주관을 하는 전시들은 대개 작품들이 횡설수설하는 느낌이에요. 미술사적 맥락에서 어긋나 있어서, 이 작품이 왜 여기 끼어있나 싶을 때가 많습니다. 장사가 되게 하려고 급조한 흔적이 역력한 거죠. 좋은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관객 수도 제한해야 하는데 이윤이 목적인 기획사가 운영하다보면 약간은 여유있게 잡게 되죠. 이러한 것들이 자본의 문제로 느껴져 전시를 보다보면 아주 불편합니다.
정준모 기획사에서 전시를 들여오다 보면 비용이 높게 잡히게 마련이라 5억이 들 전시가 12억이 잡히기도 합니다. 높은 비용 때문에 적자가 나면 전시가 끝난 후에 소송에 걸리기도 하구요. 돈을 벌기 위한 투자로 생각하고 전시 이벤트를 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예요. ‘먹튀’라는 느낌이 들 때도 있고.
조은정 외국의 유명 미술관이나 순회전에 서로 경쟁이 되어서 가격이 올라가기도 하잖아요.
정준모 클림트 전시의 경우, 예외적이긴 하지만 멜데베레미술관과 우리나라 사이에 7개의 기획사들이 붙어서 가격이 계속 올라갔어요. 얘기를 들어보면 노르웨이에 있는 뭉크 작품들은 2018년까지 기다려야 대여가 가능하다는데 전시를 하기 위해 한국의 업자들이 수없이 왔다간다고 해요. 다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이죠. 일본의 경우를 보면 전문 전시기획사가 두 세 개 뿐이에요. 메이저가 자리잡아 대를 물려서 하기 때문에 그 인맥이 아주 튼튼하죠.
권근영 미술관이 기획사의 전시에 대관을 해주고 남의 일처럼 여기는 게 아니라 주체가 되어서 수요 파악이나 흥행, 기획 면에서 좋은 전시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준모 컨템퍼러리 미술은 아무래도 근대 유명작가의 블록버스터 전시회만큼 흥행이 안 되겠지만, 미술관으로서는 시대정신을 구현한 작가들의 전시도 함께 가야 맞습니다. 블록버스터 전시를 하는 것이 문제라기보다는 거기에 무게중심이 쏠려있는 현상이 문제일 수 있죠. 미술관들이 각자 뒷심 있게 자신의 주 메뉴를 찾아 정체성을 세워야 문화의 종 다양성을 만들어가겠죠.
윤철규 주체의 일부인 미술관 자체의 기획력을 키우고 예산을 확보해야 합니다.
정준모 대규모 전시를 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니까 여러 미술관이 협력해서 순회전시를 하기도 합니다. 싱가폴, 타이페이시립, 일본 등 5개 미술관이 2억씩 내어서 전시를 하자고 추진하기도 했었어요. 고양문화재단의 모딜리아니 전시도 일본의 미술관 세 곳과 순회로 미리 기획된 겁니다.
조은정 그러한 것이 좋은 방향이 될 수 있겠네요. 블록버스터 전시를 보다 보면 그렇게 많이 돈들이고 저거 밖에 안 되냐 싶어 아까워요. 국부도 유출하지 않고 더 좋은 전시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면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정준모 변명 같은 얘기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뭔가 가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는 건데... 우리 미술관이 빌려줄 좋은 작품이 많지 않아서 외국에서 좋은 작품을 빌려오기가 힘들다니까요.
권근영 <팀 버튼> 전을 찾아 즐거워했던 많은 관객들을 생각하면. 미술과 영화와의 만남이랄지, 컨템퍼러리 전시도 다른 분야와 접점을 두고 흥미롭게 기획해서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같은 전시에 수십만 관객이 몰린다는 사실을, ‘좋은 전시의 잠재 수요’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블록버스터의 흥행이 훌륭한 기획전으로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전시에 대한 비평, 미술관에 대한 평가 시스템
윤철규 엔터테인먼트성을 지닌 그런 전시들이 시대적인 수요가 있는 거라 어차피 진행되게 마련이라면, 검증 시스템만이라도 제대로 돌아가길 바라게 됩니다. 오는 사람이 있으므로 필요하다가 아니라 잘 된 기획 외에는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도록 말이죠.
정준모 현재 진행되는 미술관 기부금 및 세제혜택 관련 요구를 살펴보면, 등록된 미술관을 매년 평가해서 세제혜택을 부여받는 미술관과 아닌 미술관이 나뉘어지도록 하자고 합니다. 먼저 미술관 박물관에 대한 평가가 있어야 합니다. 블록버스터 전시 자체를 평가하긴 어려워요.
윤철규 적어도 ‘불량’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정준모 제대로 된 비평, 비평을 위한 매체가 있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많이 부족한 상태죠.
최열 문화체육관광부나 지자체 문화국에서 산하 국공립미술관을 평가할 때 관객수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정준모 당연히 절대적이죠.
조은정 지방의 경우는 눈에 보여지는 관람객 수 때문에 전시를 50번 한 경우도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제대로 역할을 할 것인가 미술계 내의 논의와 관심 필요합니다. 미술계 전체 시스템 문제기도 한데, 미술관 평가가 관객 수에 달려 있고 그 유혹에 노출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최열 국공립미술관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 시스템이 시급하다고 보여지네요. 국공립미술관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지나친 대관전시로 자기의 역할을 잃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