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정(미술사학자)
최열(미술사학자)
정준모(전시기획자)
윤철규(한국미술정보개발원 대표)
일시
2013년 5월31일(월)
지난 5월 17일부터 26일까지는 국립중앙박물관과 한국박물관협회, 문화체육관광부가 정한 ‘박물관 주간(Museum Week)’이었습니다. 국제박물관협의회가 정한 박물관의 날(5월18일)을 기준으로 정한 이 박물관 주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박물관에서 여러 행사를 가졌습니다.
국내에는 국립중앙박물관과 11개의 소속 국립박물관, 200여 개 국공립, 사립 및 대학 박물관・미술관이 존재합니다. 이 많은 미술관 박물관들은 제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어떤 문제들이 있을까요?
미술계 안에 있으면서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문제점,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는 네 선생님들의 잡담 시간에 이번에는 박물관이야기가 도마에 올랐습니다.
정준모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반가사유상을 미국 메트로폴리탄 신라특별전에 보내려고 했다가 문화재청이 난색을 표했던 것 아시죠? 반가사유상의 국외 반출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저는 박물관의 역할이나 정체성, 독립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할 때가 아닌가 싶었어요. 우리 국립박물관이나 미술관의 경우 정부 산하기관 성격이 강해 보일 때도 많구요.
대학박물관의 위기
조은정 우리나라에서 박물관 미술관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예가 대학박물관이죠. 지금 대학박물관을 없애거나 유물구입비 자체를 없애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고려대학교 같은 곳도 같은 처지죠. 대학 평가라는 내부 문제도 있지만 대학박물관과 미술관에 대한 역할의 문제도 드러납니다. 박물관 내 학예사가 있고 전시가 잘 되고 유지도 잘 되는 곳도 있는데, 명목만 있던 박물관은 문을 닫는 형편이죠.
" 지금 대학박물관은 없애거나 유물구입비 자체를 없애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대학박물관과 미술관에 대한 역할의 문제도 드러납니다."
정준모 대학박물관이 있는 종합대학으로 인정받은 후에는 박물관이라는 곳이 실속없이 돈만 먹으니 당연히 없어지는 거죠.
윤철규 66개의 전국 대학박물관 중 정기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5개 내외에요. 나머지는 실질적 동면상태죠.
정준모 대학박물관과 국공립박물관의 상태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국공립미술관이나 박물관 외에 전시관 형태도 있어요.
조은정 나비전시관 같은 것들이 박물관미술관 진흥법에 모두 포함되는 기관들입니다.
정준모 설립주체가 국가거나 지방정부인 경우 같은 문제를 드러내게 되죠. 초창기에 미술관과 박물관들이 설립되기 시작할 때 관료들이 미술계 인사들에게 자문을 받았어요. 관료들은 당연히 박물관에 대해는 전문가가 아니었고, 미술관 설립의 경우는 화가들한테 조언을 듣는 경우가 많았지만 역시 박물관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989년 이어령씨가 문화부 장관이 되면서 1000개의 박물관미술관을 만들고자 했지만 개념은 세워지지 않은 상태였어요. 지금 어떤 상태인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평가와 반성이 필요할 때입니다.
조은정 현실을 보기 위해서 박물관 미술관이 현재 무엇을 하는가 하는 전시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 보죠. 물론 미술관과 박물관의 역할은 작품의 수집 보존 돌봄 교육 전시 등이 있지만, 눈앞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전시뿐이니까요. 사실 전시는 미술관 업무 중 30%이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전시라는 것이 연구 수집 등을 기반으로 해서 정밀하게 기획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부실이 일어나면 결국 귀한 전시 아이템 하나를 날려버리는 내용 없는 전시로 귀착돼요.
산만한 작품 수집과 소장품의 부실
정준모 먼저 박물관 미술관이 어떤 소장품을 가지느냐, 그 소장품을 중심으로 전시할 것이냐는 것부터 결정해야 할 텐데, 소장품이 부실한 미술관이 다수인게 문제예요. 소장품이 없으니 어떤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든 마찬가지가 되는 거죠.
조은정 내부의 기획이 아닌 외부의 요청이나 간섭이 주효하게 작용하게 되고 말이죠.
최열 제주도의 이중섭미술관, 양구의 박수근미술관, 무주 최북미술관, 양천구립 겸재기념관 등과 같은 미술관도 소장품에 있어서는 턱없이 허술하죠.
조은정 미술관이 일정한 정체성을 가져야한다는 전제 자체가 부족한 듯해요.
정준모 미술관이 건물을 지을 이유가 되는 것이 바로 소장품인건데 말이죠.
최열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한 것은 돈이죠. 국공립이기 때문에 작품구입을 세금으로 해야 하거든요.
정준모 작품의 수집은 예산도 중요하지만 계획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단기와 중장기로, 예를 들면 3년 5년 단위와 매년 작품수집 계획을 가져야 합니다. 계획에 맞게 예산을 운영해야죠. 그런데 그렇게 운영되는 곳이 몇 군데나 될까요?
"작품의 수집은 예산도 중요하지만 계획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계획에 맞게 예산을 운영해야죠."
최열 예전에 모 국립미술관의 신소장품 전람회를 보는데, 너무 한심스러웠던 적이 있어요. 미술관의 위상에 맞지 않게, 실무자의 성향도 아니고 관장의 성향과 의지에 따라 마구잡이로 작품을 구입한 거죠. 소장품에 대한 마인드와 구상이 없는 천박함이 드러났어요.
조은정 맞습니다. 국공립미술관의 경우 지역사회 교육에 대한 책임감이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죠.
최열 적어도 작품수집기조가 분명해야 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모 관장 시절에는 그 수집기조, 기준이 없이 한없이 산만했어요. 학예사의 신중한 회의를 통해 1차 추천 과정을 밟는 엄격한 절차가 있었는데 그 때 그 관장은 자신이 추천하고 나아가 자기가 추천한 건 회의도 없이 구입후보가 되도록 했었죠. 그러다 보니 나중에 큰 문제가 되었었잖아요.
정준모 외국의 경우 퐁피두미술관 정도만 관장 추천권이 인정되죠.
최열 하여튼 수집기조와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기준으로 해야지, 관장이건 학예사건 그 취향으로 해서는 안 되는 거죠.
윤철규 중장기 수집계획의 경우 의무사항이라기보다는 권장사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좋은 미술관 박물관이 되기 위해서는 정체성이 분명해야 하는데 그 개성이라는 것은 소장품을 바탕으로 나타나는 거니까요.
미술관의 필요성이 제기가 되어 ‘자, 만들자!’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언급이 되고 대충 만드는 경우가 안타까워요. 홍콩 엠플러스 등의 경우는 미술관이 만들어지기 전에 ‘설립관장’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사람이 설립될 때까지의 컬렉션과 건물 디자인을 세팅하는 책임을 집니다.
최열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이 9월에 노원에 개관되는데, 어제 일간지에 관장모집공고가 났더군요. 개관에 임박해서야 관장을 뽑는 이상한 행정을 하고 있어요.
정준모 미술관의 목적에 맞게 건물을 지어야 하는데, 서울시립미술관 북서울의 경우 안타까운 점이 많습니다. 집을 짓는다면 누가 어떻게 살지를 생각해서 건물을 설계해야 하는데, 그냥 마구잡이로 설계를 공모하는 것과 같아요. 싱가폴의 경우 내쇼널 갤러리 오브 아트라는 미술관을 만들고 있는데 근 15년 동안 작품을 사고 그 소장품들에 맞는 리노베이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는 제주현대미술관의 경우 소장품을 고려하지 않고 박물관을 지어 문제가 생긴 적도 있죠.
지금까지 지방자치단체장이 철학이나 개념이 없이 치적용으로만 미술관을 짓고, 문화적 소양을 드러낼 수 있는 액세사리로 생각했던 것이 오늘날 미술관 박물관의 문제가 된 거죠.
예산 문제, 그리고 미술관 평가에 따른 지원
정준모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이 안좋으니, 지자체의 예산으로 운영되는 미술관 박물관도 당연히 파산 직전인 곳이 많아요. 인천의 경우에 인천시립미술관을 만들고자 했으나 지금 반대에 부딪힌 상태에요. 많은 곳이 BTL(임대형 민간투자) 방식으로 미술관을 짓습니다. 예산이 없는 곳은 짓고도 거기에 미술관이 들어서면 임대료를 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민간업자들이 이익을 위해 미술관 건물에 예식장이나 식당 사업을 하는 곳도 있습니다.
윤철규 미술관 박물관이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받는다는 것은 어떤 사회든지 힘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쓰는 재원을 이용해서 짓고 운영하는 국공립미술관의 경우는 공동의 이익에 맞게 운영되어야 하죠. 공동의 목표는 정해져있지만 결국 몇몇 사람의 목적으로 이 재원과 자원이 쓰여진다면 공정하지 못한 것이죠. 이를 막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정준모 여러 장치들이 제안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박물관 미술관에 개인이 기부를 할 때 세금 혜택을 주는데, 인증위원회가 미술관을 평가해서 인증 받은 곳만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거죠. 현재 박물관미술관 법을 박물관법으로 개정해서 인증제도를 넣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윤철규 보조금도 잘하는 곳과 못하는 것을 일률적으로 주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문제는 평가가 공정하게 될 것인가에 있겠죠.
정준모 탐욕스런 재벌들은 기증을 잘 안하지만 보이지 않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귀한 소장품을 기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동원이나 수정 기증품처럼 핵심적인 작품들이 기증된 예가 많아요. 이건 세제 혜택 때문이 아니죠.
사회적인 감사의 표시가 기증이나 기탁, 유증(죽은 뒤 몇 년 뒤에 기증하도록 함)인데 사회 분위기나 구조가 기탁을 하고 싶어도 하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모 시립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고 싶다고 해도 그 미술관에 항온항습 장치가 없어요. 양구 박수근미술관에 개인이 박수근 작품을 기탁을 했다가 도로 찾아온 예도 있습니다. 관리를 못하고 있는게 안타까워서요. 요즘은 또 에너지 절감정책 때문에 수장고는 밤에 에어컨을 끄는 경우도 많다고 해요.
윤철규 아이스케키 장사가 밤에 퇴근하면서 냉장고 끄고 가는 셈이네요.(웃음)
정준모 한인 미교포가 가지고 있던 휴버트 보스의 고종황제 초상도 ‘근대를 보는 눈’ 전람회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에 장기기탁받아 있었는데 여러 이유로 다시 가져가버렸죠.
조은정 국회의원들이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가 적은데 이런 걸 왜 기탁받았냐고 항의해서 미국으로 돌려보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한 나라의 황제 초상이 쫓겨나버리는 황당한 사태가 된 거죠.
최열 휘트니의 경우 자신의 소장품들을 기증하려고 했지만 받을만한 곳이 없어서 자기가 미술관을 만들어버린 거잖습니까. 받는 자들의 태도나 인문적 사유의 깊이가 부족하다면 올바른 기증이 어렵겠죠.
조은정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기증하고 싶어하는 게 사실이에요. 지역사회에 여러 인간적 측면들이 있긴 하겠지만 예술사적 위치에서 의미 있는 작품을 기증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가 어려워서 컬렉션되지 않아야 되는 것들을 기증받게 됩니다.
정준모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장품 인수인계를 받은 적이 있어요. 당시 소장품이 1118점 이었는데, 많게 봐야 500점 정도가 쓸 만한 작품이고 나머지는 쓰레기였어요. 전기세가 아까울 정도였죠. 지방에서는 아직도, 군수나 시장이 미술관 착공식에서 “집은 저희가 지어드릴 테니 미술인들이 많이 기증을 해서..”라고 말합니다. 미술관의 개념이 그냥 전시하는 장소 정도의 개념인 거죠.
윤철규 해방후 근대미술교육 수준이 그런 거겠죠.
조은정 지역 작가들이 공공의 미술관에 자신의 작품을 보관시킴으로써 미술관의 한 방을 차지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죠. 소위 알박기라고 하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천경자나 제주도립미술관의 장리석 같은 경우가 그와 비슷해요.
정준모 장리석의 경우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이 불발되어 제주도에 미술관을 짓기로 했는데,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도립미술관의 한 방을 차지하게 된 겁니다.
조은정 아무리 작가가 훌륭하더라도 미술관 박물관 성격에 맞지 않으면 많은 수의 작품을 기증받지 말아야 합니다.
최열 현재 상황에서는 여러 가지로 불가능한 이야기들인 것 같습니다. 잡다하게 지어진 공립미술관은 국립 산하미술관으로 통합하고 없애야 할 것은 없애야 해요. 크기만 크고 예산은 작으니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가 없죠.
"잡다하게 지어진 공립미술관은 국립 산하미술관으로 통합되어야 해요."
정준모 통폐합을 통해 규모는 키우고 유닛화해서 모던 컨템퍼러리 등 장르별 특화된 미술관으로의 변신이 필요합니다. 중심잡는 놈 있고, 까부는 놈 있고 하도록.
미술관의 문화적 기능, 예술적 측면, 교육적 측면, 관광적 측면, 도시개발적 측면의 종합적 검토를 통해 정체성을 만들어가야죠.
윤철규 우리 미술관 박물관이 그간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런 논의들을 통해 좀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국가의 문화적 수준이 그대로 보여지는 게 미술관 박물관이니까요. 긴 시간 논의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