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제7회 추사작품전시회-추사파의 글씨 기 간 : 2010년 11월 5일(금) ~ 2010년 11월 14일(일) 장 소 : 과천시민회관 2층 전시실
전시명 : 제7회 추사작품전시회-추사파의 글씨
기 간 : 2010년 11월 5일(금) ~ 2010년 11월 14일(일)
장 소 : 과천시민회관 2층 전시실
“청고고아, 문자향 서권기(淸高古雅, 文字香 書卷氣)”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에는 마음 속에 맑고 높으며 옛스럽고 우아함을 가져야하고 청고고아는 문자의 향기와 책의 기운을 통해 팔뚝과 손끝으로 발현된다.
김상무ㅣ 천관산제영(天冠山題詠) ㅣ26.6x506.5cmㅣ 과천시 소장
추사 김정희가 즐겨썼던 원(元) 조맹부의 천관산제영(天冠山題詠)을 아들 김상무가 임모했다.
마음속에 담고 있는 맑고 높으며 옛스럽고 우아함(淸高古雅)은 그림이나 글을 쓸 때 그냥 그린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학문과 인격수양에 꾸준히 정진하여 얻은 문자의 향기와 책의 기운을 통해 비로소 그림이나 글에 묻어난다는 말이다. 이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가 아들 상무에게 보내는 편지내용 중 예서를 쓰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김정희가 시서화 작품 제작에 임하는 기본정신을 알 수 있는 구절이다.
옛 선비들은 단순히 글씨 쓰기와 그림 그리기의 숱한 연습만이 명필, 명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닦고 뜻을 맑게 하여 그 도(道)를 깨쳐 어느 경지에 이르게 되면 자연히 우러나온다고 하였다. 옛 선비들과 마찬가지로 김정희 또한 그러하였다. 이러한 자기 나름의 확고한 서예예술론에 입각한 김정희는 당대 조선조에서 유행하였던 서체를 뛰어넘어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만들어 내어 오늘날까지 한국인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김정희ㅣ 문학·금석대련(文學·金石對聯)ㅣ95.8x13.5cmㅣ개인 소장
과천시민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추사 김정희 전시는 그가 노년을 과천에서 보냈던 인연으로 매년 이곳에서 새로운 테마로 개최되고 있다. 올해는 7번째로서 “추사파의 글씨”라는 주제로 7개의 섹션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1부 ‘추사 글씨의 여러 모습’에서는 전성기로 가는 과정의 추사 글씨와 노년의 소탈한 글씨를 보여준다.
김정희ㅣ 원각가람(圓覺伽藍) ㅣ 82.0 x 62.5cm ㅣ개인소장
원만하게 깨달은 경지란 뜻의 원각가람(圓覺伽藍)은 조형의 통일성, 예서와 행서의 적절한 배치 등이 전성기의 작품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대흥사 스님에게 써 준 초사구(楚辭句)는 기본을 쉬이 여기는 제자들에게 필획구사의 중요성을 몸서 보여줬다는 일화가 있는 작품이다. 제주도 귀양시절 연습으로 쓰던 행서ㆍ초서도 주목할 만하다.
옹방강ㅣ 임사·독서 대련(臨事·讀書 對聯) ㅣ 130.0 x 29.2cm ㅣ개인소장 (좌)
완원ㅣ 체악·죽오 대련(棣萼·竹梧 對聯) ㅣ 82.0 x 62.5cm ㅣ개인소장 (우)
2부 ’스승’은 추사와 추사의 스승이 쓴 당호와 독서대련 등으로, 글씨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들 작품을 접한다는 자체가 영광이고 큰 배움이다. 추사는 중국에서 청대 대학자인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고 연경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견문과 학식을 넓힌다. 이러한 청대의 앞선 학문을 경험하고 조선으로 돌아온 추사는 거듭되는 연구를 통해 자신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만들게 된다. 이 섹션에서는 이러한 추사의 결정체를 이뤄낼 수 있었던 계기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부연이지만 중국을 다녀온 후 더 널리 불리우게 되는 추사의 또 다른 호인 완당(阮堂)은 완원이 내려준 것이고 자신의 서재인 보담재(寶覃齋:담계 옹방강을 보배롭게 받드는 서재)도 옹방강이 “소동파를 보배롭게 받드는 서재“라는 보소재(寶蘇齋)에서 따온 것이다. 추사의 중국행은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여러 흔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김상무ㅣ 백억화신불(百億化身佛) ㅣ 38.0 x 149.2cm ㅣ개인소장
3부 ‘추사 가문 사람들’에서는 이들의 글 솜씨를 알아볼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추사 가문의 사람들은 필력이 그리 좋지 않았으나 추사로 인해 학문에 정진한 결과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고 그 중 상무의 ‘백억화신불’(百億化身佛)은 추사의 아들이 쓴 글로 손색이 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광진ㅣ 강산여화(江山如畵) ㅣ 28.0 x 99.0cm ㅣ개인소장
지두(손가락)로 쓴 글씨에 추사의 발문이 부기돼 있다
신위ㅣ 칠언시(七言詩) ㅣ 30.8 x 126.0cmㅣ개인소장
권돈인ㅣ 함진재(涵鎭齋) ㅣ30.5 x 119.5cmㅣ개인소장
4부 ’종유(從遊)’에는 추사와 함께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와 동년배인 조광진은 추사를 만나 그 기량을 더욱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묵란으로 뜻이 통한 신위나 가장 절친이었던 권돈인 등 추사와 평생을 함께한 이들의 작품을 모았다.
조면호ㅣ 유당(留堂) ㅣ 40.5 x 65.8cm ㅣ개인소장
신관호ㅣ 담박영정(澹泊寧靜) ㅣ 45.6 x 168.0cm ㅣ개인소장
5부 ’추사학파’에서는 추사를 따른 제자들의 여러 글씨와 시를 전시하였다. 글과 시로 널리 이름을 알린 조면호의 ‘유당’(留堂), 신관호가 쓴 큰 글씨 ‘담박영정’(澹泊寧靜), 추사 정신을 무던히 닮으려 애썼던 서승보의 ‘방완당서’(倣阮堂書)에서는 추사체를 본받으려는 그들의 부단한 노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오세장ㅣ 행서(行書) ㅣ 130.0 x 30.0cm ㅣ개인소장
이병직ㅣ 선면(扇面) ㅣ 45.5 x 12.7cm ㅣ개인소장
6부 ‘사숙’(私淑)은 추사 생전 뵙고 배우지 못했으나 사후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한 것을 말한다. 대원군을 도와 고종 등극에 일조한 조영하와 객관적으로 추사 예술을 논한 오세창, 현대적 시각을 곁들여 추사체를 체계적으로 수집 연구한 이한복, 손재형을 비롯 서화 감식과 서화 수장가로 유명한 이병직 등의 글씨에서 추사는 영원불멸의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김정희ㅣ 묵란(墨蘭) ㅣ 22.5 x 26.0cm ㅣ개인소장
추사는 추사체 못지않게 추사가 이루어놓은 높은 경지의 예술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묵란이다. 7부 ‘묵란’(墨蘭)은 추사가 스물여섯 나이에 그린 작품으로 자연스레 휘날리는 난 잎의 표현이 빼어난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추사의 묵란은 예서와 같이 모가 나 있고 굳셈, 예스러움을 가졌고 그의 글씨의 연장선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추사의 영향을 받아 청람의 경지에 이른 대원군의 난초와 예술적 감각을 타고난 조희롱의 분란, 허련의 묵란을 비롯 추사가 배우고 익힌 방윤명의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