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탄신 300주년 기념전시, 소나무에 뜻을 심다
기 간 : 2010년 9월 14일(화) - 2010년 12월 5일(일)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회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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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대부는 자신의 몸이 어디에 있던 정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이상향을 늘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사대부의 붓에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을 때 제일 먼저 그려진 것도 바로 그 이상향이었다. 가슴속 산수, 즉 흉중의 구학이란 산수화가 그것일 것이다. 실제도 그랬다. 조선에서 옛 선비는 자신의 행위 중에 진퇴의 큰 의미를 부여해 벼슬에 물러나기를 깨끗이 했다. 또 물러나서는 조용히 정신의 자유를 누리고 더 높은 경지로의 심적 수련을 위해 자연 속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문인 화가의 그림에 정자, 누옥이 다수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인상 역시 3년 남짓한 음죽 현감을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나게 되며 자신이 머물 은거지로 음죽현 인근의 설성(雪城)을 택했다. 그리고 그곳에 작은 정자를 지어 종강모루(鐘岡茅樓, 종강의 띠풀 누각)라고 이름했다. 이후의 그림에는 이와 연유한 낙관을 많이 찍었다. 하지만 여러 기록이나 그리고 남아 있는 그림을 보면 그가 종당 자신의 은거처로, 정신의 수양과 자유를 누릴 이상향으로 여긴 곳은 단양처럼 물이 흐르고 굽이치는 물가였던 것 같다. 이인상을 소개하는 글에는 그가 단양에 3번이나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설성에 지은 정자에 붙인 이름을 보면 물가와는 거리가 멀다. 鐘岡이란 말 그대로라면 쇠 북처럼 불뚝 솟아있는 언덕이다. 이런 이름으로는 물가와 연관짓기 힘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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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간추일도(南澗秋日圖) l 종이에 엷은 색 25.0 x 63.0c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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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추강도(茅亭秋江圖) l 종이에 엷은 색 23.7 x 65.0cm | | |
하지만 그는 이번 전시에도 소개됐듯이 물가의 정자 그림을 여럿 그렸다. 전시중인 《남간추일도(南澗秋日圖)》나《모정추강도(茅亭秋江圖)》는 강 이편에 띠풀로 인 정자가 있고 굽이지는 강 흐름 건너 저편에는 먼 산 자락이 보이는 그림이다. ‘저물녁에 긴 강물은 더욱 멀어져 보이고, 먼데 산은 그 사이로 보이락 말락 하네’라는 시귀와 함께 해거름의 길게 펼쳐져 있는 강가 모습을 그린 《일막장강도(日暯長江圖)》도 띠풀 정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먼 산쪽에 이층 누각이 보여 그것으로 정자를 대신할 수는 있는 셈이다. 또 중국 화본을 보고 그렸음직한 《강남춘의도》에서도 물가의 정자를 그렸다.
이인상의 마음속 이상향은 아마 이처럼 물가의 띠풀 정자였을 것이다. 그는 친구인 이윤영에게 그려준 그림속에 이런 말을 적었다고 한다. ‘옛부터 누정에 거처하길 원했지만 가지지 못할 경우 그런 마음을 그림으로 그려 정신의 자유를 즐기고 그것을 신루라고 불렀다(古有喜樓居而不得 托之繪事而遊神, 謂之神樓者)’. 그려준 그림은 분명 이인상 마음속의 정자, 물가의 정자였을 것이다.
이인상의 神樓와 관련해 일본 그림 하나가 생각나 적어본다. 이인상보다 훨씬 올라가는 무로마치 시대의 수묵화에 《계음소축도(溪陰小築圖)》란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교토 난젠지(南禪寺) 절의 순자박(純子璞)이란 중이 자신의 서재도를 그려 받았다며 여러 선승들에게 축하의 찬을 받아 남긴 그림이다. 그중 한 스님은 “절집에 몸을 두고 있으면서 자신의 서재 이름을 ‘계음’이라고 지은 것은 ‘시장을 門으로 삼고 물을 마음으로 삼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 진나라 시대의 도원경이나 이 그림의 이상향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는 마음속에 품은 것을 그린 그림이며 마음밖에 실제 경치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그림은 마땅히 마음의 그림, 心畵라고 해야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조용한 절집에서 조차 더 자유로운 정신의 은거처를 찾으려한 일본의 心畵나 평생 자신이 꿈꿔온 이상향으로 물가의 정자를 생각했을 법한 이인상의 神樓는 格에 있어 하나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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