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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능호관 이인상(凌壺觀 李麟祥1710-176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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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탄신 300주년 기념전시, 소나무에 뜻을 심다 기 간 : 2010년 9월 14일(화) - 2010년 12월 5일(일)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회화실

 
전시명 : 탄신 300주년 기념전시, 소나무에 뜻을 심다
기  간 : 2010년 9월 14일(화) - 2010년 12월 5일(일)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회화실
 
    검선도 - 개인을 초월한 시대의 자화상인가

이인상(李麟祥, 1710~1760)하면 대표작으로 으레 눈 내리는 바위 계곡을 배경으로 화면을 뚫고 나갈 듯한 기세로 높다랗게 그려진 『설송도(雪松圖)』를 꼽는다. 유명한 그림이다. 엄동 설한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의 상징성도 그렇지만 주변 기록에 전하는 그의 사람 됨됨이 또한 ‘지조가 맑고 절개가 높다’고 해서 그림과 사람이 딱 들어맞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인상 전시에는 모처럼 그의 또다른 걸작이라 할 『검선도(劍仙圖)』가 소개돼있다. 이 그림은 옆으로 굽은 소나무와 똑바로 선 소나무 둥치가 교치하는 지점쯤 등을 댄 선인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상이다. 바닥의 검불에라도 꽂아 놓은 듯 검은 손잡이만 보인다. 곧게 선 소나무에는 뿌리에서 타고 올라간 덩굴이 옆으로 뻗은 가지로 건너가며 몇 가닥 아래쪽으로 곧게 드리워져 있어 화면이 깊은 산중임을 암시하고 있다. 머리에 슬쩍 올려 놓은 두건과 절대 세속인으로 볼 수 없는 긴 구레나룻에 턱 수염까지 옆으로 밀려나고 있어 어디선가(왼쪽에서) 한 줄기 바람이라도 불어오는 찰나를 포착한 듯하다. 붓을 곧게 세워 마치 철사 끝으로 그림을 그린 듯해 전체적으로 맑은 게 이 그림의 특징이다. 붓에 물을 잔뜩 묻혀 옆으로 뉘인채 감정 기복을 여과 없이 담은 그림과는 한 눈에 차이가 난다. 격이 높아 보인다는 말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이 그림 소나무줄기 왼쪽에 「방화인검선도 봉증취설옹 종강우중작(倣華人劍仙圖 奉贈醉雪翁 鐘崗雨中作)」이란 畵記가 적혀 있다. 글의 뜻은 ‘중국 사람의 검선도를 본떠 그려 취설옹에게 삼가 바치며 종강에 비올 때 그리다’이다. 종강은 그가 살던 음죽 근처의 고장을 말하며 취설옹은 유후라는 인물을 가리킨다. 서얼 출신이지만 그 보다는 20세나 연상의 인물이라고 하며 적극적인 교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조선통신사 서기관으로 일본도 다녀온 유능한 인물인 듯하다.그리고 검선하면 흔히 중국 당나라때 시인이자 문신이었다가 신선 종리권을 만나 시험을 통과해 신선이 됐다는 여동빈을 가리킨다.문제는 유후, 이인상, 그리고 검선 여동빈으로 이어지는 삼각 관계이다. 문집속에 나오는 이인상은 아침저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주역을 읽고 경전을 공부할 정도로 유학에 깍듯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검선 그림을 그린 것은 무엇인가.

 
설송도 l 종이에 먹 117.0×53.0㎝  
검선도 l 종이에 먹 117.0×53.0㎝.

애초의 해석은 선인의 인상에서 풍기는 근엄하고 초절한 기품이 이인상의 인물평과 겹쳐지면서 그런 기개와 의지로 살아가는 능호관의 자화상적 이미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취설당이 유후이며 그가 서얼 출신이라는 계급적 성격이 밝혀지면서 서얼 의식이 반영된 자화상적 그림으로 보인다고 해석됐다.

시각을 달리해 보자. 『중국길상도안』을 보면 劍은 삿된 기운을 물리쳐주는 영험이 깃들어 있어 벽사와 길상의 의미로 해설돼있다. 그래서 옛 문인들은 꼭 검술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도 방안에 검을 걸어놓고 정신의 수련과 집중의 도구로 삼았다고 했다. 그래서 단원이 그린 유명한 『포의풍류도』에도 방안 한 켠에 검이 가로놓여 있다. 또 다른 자료인데 국문학자 박희병의 논문에 「조선후기 민간의 유협 숭상과 유협전의 성립」이란 글이 있다. 길지만 설명해보면 조선후기사회가 되면 봉건적 사회질서가 해체되면서 국가 공권력에 대한 민심의 불신을 초래했고 이러한 공적 질서의 해이와 문란은 필연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공적 윤리의 정당성에 회의를 가져오게 했으며 기존의 도덕과 법률을 무시하는 경향을 생기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신 생겨난 것이 유협(遊俠)이며 그가 민간 질서의 새로운 담당자, 즉 私的인 질서 수호자의 역할을 맡는다고 박교수는 말했다.

물론 검선 여동빈과 과거 배오개나 운종가 장바닥의 해결사 유협이 동격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18세기가 되면 세속적 욕망이 일반화 되면서 민간에서는 장수와 오복 그리고 높은 벼슬을 바라는 수·복·록(壽福祿)을 이미지화한 현세 구복적 그림이 많이 그려진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영조 시대(재위 1724~1776 재위)를 꼬박 살았던 이인상 역시 깐깐한 선비이기는 해도 이런 시대적 분위기는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후와의 관계는 가려진 부분이 많다고 하지만 검선도를 주고 받은 두 사람 사이에는 아마 어떤 정신의 공통 분모는 있었을 것이다. 아는 사람만 안다고 하지만 그건 정신 집중과 삿된 것을 물리친다는, 당시 검에 서린 뜻과 사람들 가까이서 새로이 질서와 정의를 지켜주는 유협 신선에 대한 시대적 공감대가 이 두 사람 사이에 그림을 주고 받게 한 바탕은 아니었을까. 다만 짐작해본다.

글/사진 스마트K
업데이트 2024.10.27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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