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메뉴타이틀
  • 한국미술 전시리뷰
  • 공예 전시리뷰
  • 한국미술 도서리뷰
  • 미술계 이야기
  • On View
  • 학술논문 브리핑
타이틀
  • ‘창작’과 ‘싫증’의 연대기, 오천룡 회고전
  • 233      
-서양미술의 본류 속에서 오천룡만의 ‘선線’을 찾아낸 50여 년간의 탐험과 모색

전시명 : 오천룡 회고전 《창작과 싫증》
전시기간 : 2023.3.23 - 2023.4.23
전시장소 : 가나아트센터
글/ 김진녕

1971년 이후 프랑스에서 살면서 작품 활동을 펴고 있는 오천룡(Chunryong ÔH, b. 1941)의 회고전 《창작과 싫증》전( - 4.23)이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는 오천룡의 60년 화업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의 작업을 비롯해 1960년대 초반의 인물화와 60년대 중후반 그가 몰두했던 추상 회화와 1971년 도불 이후 지금까지 이어온 구상 작업을 망라해 그의 회화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1941년 서울에서 태어난 오 작가는 1965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짧게 중학교 미술교사 기간을 거쳐 전업작가의 길을 택하고 1971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프랑스로 가기 직전까지 추상 회화를 그렸던 그는 그때 서양 미술의 본거지로 불리던 프랑스로 떠나 아카데미 그랑 드 쇼미에르와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대학 신입생으로 돌아가 다시 배우고 그렸다.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부터 북해 연안의 플란더스 지방까지 직접 찾아다니며 원시 동굴 벽화부터 르네상스, 인상파와 큐비즘까지 그게 왜 거기서 발생했고 그들이 왜 그런 색을 썼는지, 형태를 해체하기 시작했는지, 또 다른 방법론을 모색했는지를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대지와 하늘과 습기를 직접 체험하며 서양미술사를 체화시키는 한편 그만의 방법론을 찾아내기 위한 작업을 이어갔다.

전시장은 1960년대 서울 시절의 작업이 걸린 1 전시장, 도불 이후 추상 작업을 놓고 구상으로 회귀한 1970년대와 1990년대 작품이 걸린 2 전시장, 2000년대 이후 그의 특징 ‘오 라인(Ô Line)’으로 단순화된 작품들을 보여주는 3 전시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2 전시장에 걸린 작품을 보면 독특한 선(線)이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다. 1993년 작 <이른 봄에>나 데칼코마니 같은 구성의 양면화 green house and garden(1994)을 보면 목판화의 선 같기도 하고, 칠보공예를 연상시키는 질감의 작품이 등장한다. 파낸 듯이 또렷한 질감의 선.

오천룡 식의 이 선(線)은 2000년대에 나이프로 굵게 그은 흰색의 선 중앙에 홈을 파고, 그 위에 상감으로 새겨 넣듯이 짙은 색 물감을 넣어 선이 면과 공간을 암시하는 형태로 발전하면서 ‘오 라인(Ô Line)’이란 이름을 얻었다. 오 작가는 오 라인이 “1984년부터 작품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제 3 전시실에 걸린 작품은 그가 50년 동안의 프랑스 활동에서 얻은 오 라인이 전면에 등장하는 2000년대 이후의 작품 위주로 걸려있다. 단색의 바탕 위에 단순하지만 존재감이 뚜렷한 선으로 구현된〈hand in hand〉(2007), 〈bassist〉(2015), 〈embrace〉(2016) 등은 파낸 선에 색을 부여해 미묘한 색채의 리듬감을 불러낸다. 섬세하고 색채주의적인 표현으로 독일 작곡가와는 확실히 다른 미감의 라벨이나 드뷔시 등 20세기 전반의 프랑스 음악을 연상시킨다. 동양적이고 서예적인 선으로 거기까지 들어간 것이다.

“내 작품은 결국 오 라인에 귀결된 것이다. 동양 미술은 라인이고 서양 미술은 명암이다. 1560년대에 카라바조가 명암이라는 걸 명확히 결정했다. 동양화는 다 선이다. 내가 프랑스에 그렇게 오래 살았어도 나의 오리진은 선이었다. 그러니까 그 선에 도달하기 위해서 서양 미술을 다 훑어본 셈이다. 내가 동양인이기에 선으로 해서 역사에 남는 작가가 되고 싶은 게 나의 꿈이다. 그렇게 될지 안 될지는 몰라도. 그러니까 이렇게 선으로 묘사를 아주 쉽게 한 것 같지만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다. 이제 또 싫증이 나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이번 전시의 제목이 ‘창작과 싫증’이다. 한국적 관습으로 보면, 팔순이 넘은 작가의 화업 60년을 돌아보는 전시에 ‘싫증’이란 사적인 또는 ‘가벼워 보이는’ 고백을 담아낸 말을 쓴 것이 낯설다.



“그거 처음에 내가 그렇게 짓는다고 그랬더니 여기 큐레이터나 화랑주가 ‘싫증’이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그래서 다른 걸로 고쳤다가 결국은 그들이 생각을 해보니까 내가 (주장한)이유가 있다고 인정하고 원래 제목으로 갔다.”

이 ‘싫증’이란 말 속에는 그가 그만의 세계를 찾아가는 모색과 회의를 담긴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쓴 책과 전시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2002년 여름부터 내가 새로 그리는 그림은 붓으로 그리는 그림이지만, 나는 그 이전 18년 동안은 붓을 사용하지 않았다. 앞서 나는 내 작업이 추상에서 구상으로 전환되고, 그 후 나의 색채를 다 버리고 씁쓸한 단색조의 작업을 했었고, 그런 후에 색채를 다시 꺼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색채를 다시 꺼냈을 때 또 다른 커다란 고민에 부딪혔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 나의 작품이 더욱 독창적이어야 하겠다는 문제였다. ‘한 번 친 피아노 음으로 쇼팽임을 즉시 알아보게 하는 것’같은 독창성을 원했다. 작품에 보인 사인을 보고 난 후에 작가가 누구로구나, 알아보게 하기 보다 피아노 한 음만 듣고도 그것이 쇼팽임을 알도록 했듯이 나의 색 한 점에서 ‘오(Ô)’임을 알도록 하는 방법 말이다.”(오천룡, <서울의 햇빛, 파리의 색채>, 131쪽)


2000년 이후의 근작을 걸어놓은 제3전시실 들머리엔 <노트르담>(2008) 이 걸려있다. 이 작품엔 목판 부조의 질감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감이 뚜렷한 선이 보인다. 작가는 고흐에 대한 오마주이자 서예의 획을 도입한 것이라고 했다. 이 작품 옆에는 그의 글이 써있다.

“거의 5년 간 잎새 그리기에 열중했건만, 그만 그 잎새 구성하는 데 제풀에 지치고 말았다. 1977년 세잔느 회고전 이후 세 번째로 딜레마에 빠진 나는 그 높은 담을 넘지 못해 어찌할 줄 모르게 된다. 그림을 잠시 중단하고 한참동안 놀까 보다 했으나, 그냥 노는 것은 오히려 더욱 괴로울 것만 같았다. 시간을 공 없이 허무하게 흘려보내기보다는 아무 일이라도 해보자고 생각한 나는, 머리를 짜내지 않고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구상화 시대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해버린다.


그림이란 '자연의 묘사다'라는 대명제에서부터 다시 출발해보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그림을 다시 그려 보고자 한 것이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나는 보이는 대로 이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비로소 그림 그리는 일이 다시 행복해졌다.”

오천룡에게 ‘창작’과 ‘싫증’이 동행하는 이유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2.02 08:04

  

SNS 댓글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