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이만익 - 별을 그리는 마음>전
전시기간 : 2022.9.2 ~ 2023. 2.5
전시장소 : 소마미술관
글/ 김진녕
<이만익 - 별을 그리는 마음>전(2022.9.2 - 2023. 2.5)이 소마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만익(1938-2012)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경험한 세대라면 ‘88올림픽’이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시각 이미지를 만든 작가다. 88올림픽 조직위원회에 미술감독으로 참여해 한국 현대사에 잊을 수 없는 시각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올림픽 이벤트>전에 그가 작업했던 개폐회식 계획안이 등장하기도 하는 등 한국 현대회화사에서 분기점으로 기록되는 88올림픽에 미술감독으로 직접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한국 현대 미술사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위치를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만익이 세상을 뜬지 10주년을 기리기도 하는 이번 전시는 이만익이 올림픽 이벤트 만으로 기억하기에는 아까운 작가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만익이 세상을 뜬지 10주년을 기리기도 하는 이번 전시는 이만익이 올림픽 이벤트 만으로 기억하기에는 아까운 작가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는 1부와 2부, 아카이브 전으로 꾸려졌다. 1부는 드로잉과 자화상, 1960년대를 전후해 한국의 현실을 표현주의적 기법으로 담은 청계천변 풍경과 관전풍 초상화 등 파리 유학을 가기 이전의 이만익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대합실 사람들, 88x115cm, 캔버스에 유채, 1958
2부에서는 뒷날 이만익의 시그니처가 된 작품들, 즉 한국 전통 설화에서 소재를 취하고 목판화나 벽화를 연상시키는 윤곽선과 전통 채색화의 색감을 닮은 채색으로 완성한 70년대 후반 이후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아카이브실에는 드로잉과 스케치, 그 밖의 사진, 도서 등의 자료와 함께 1988년 서울올림픽 미술감독을 맡아 제작했던 다양한 자료가 나와 있다.
1부에서 눈에 띄는 작품은 그의 60년대 대표작인 <청계천 풍경>(1964) 등 그의 초기작과 자화상과 초상화다. 특히 이만익의 서울대 시절 은사인 장욱진을 그린 초상화가 눈길을 끈다. 그 자신을 그린 여러 점의 자화상은 물론 장욱진이 파이프를 든 모습을 비스듬히 그린 작품은 그가 인물화에서도 탁월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장욱진 초상은 드로잉으로도 한 점 더 전시돼 있다. 이만익은 장욱진이 별세한 뒤 그가 80년대 후반 이후 완성한 그만의 양식으로 다시 한번 장욱진의 초상을 남기기도 했지만 그 작품은 이번 전시장에는 나오지 않았다.
청계천, 128x205cm, 캔버스에 유채, 1964
2부 전시는 이만익이 1980년대에 자신만의 스타일로 완성한 한국적인 회화의 세계를 볼 수 있다. 이때 한국적이라는 것은 소재뿐만 아니라 표현하는 방법까지를 아우른다고 할 수 있다.
이만익은 한국인의 근원과 원류를 찾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던 화가였다. 1973년 파리 유학을 다녀온 뒤 그의 관심사는 한국인인 그만이 할 수 있는 세계를 찾아나가는 것이었다. 이후 제작된 그의 작품에는 전통적 가족애, 국가와 고향, 나아가 건국신화와 종교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근원을 주된 소재로 삼아 왔다. 이와 관련해 그는 “그림이 어렵고 모호해져서 공허한 논리로 옹호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림을 보는 이가 직관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는 얘기다.
해후, 170x330cm,캔버스에 유채, 1990
그는 1981년 <현대문학> 11월호부터 1984년 12월호까지 <그림으로 보는 삼국유사>를 연재하고 1985년 이를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을 기념해 선화랑에서 제10회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의 이런 모색은 1988년 서울올림픽 미술감독을 맡으면서 형식적으로 더욱 완성됐던 것 같다. 88올림픽 이후 1990년대에 고구려 건국신화에서 소재를 차용해 제작한 주몽 시리즈나 유화부인 시리즈는 거칠 것 없는 호쾌한 화면 운용을 보여준다.
어디서 빌려왔을 것이라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내용과 형식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이만익의 작품은 어쩌면 ‘일본식 근대’가 강제 주입되던 1930년대부터 불붙기 시작한 ‘향토색 논쟁’이 근 50년 만에 일단락되는 신호탄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얼씨구 차차차, 113x162cm, 캔버스에 유채, 2010
그가 <그림으로 보는 삼국유사>를 연재하던 1981년을 돌아보면 동시다발적으로 ‘한국적인 것’에 대한 내부적인 요구가 들끓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윤(1946-1986)이 민화적인 요소와 동학 관련된 내용을 섞어 목판의 선으로 오윤 스타일을 확립해 작품을 쏟아내던 게 타계 직전인 80년대 초반부터 5년 동안이었고, 박생광(1904-1985)이 전봉준과 민화, 무속의 세계를 오방색을 전면에 내세운 현대 한국화(채색화)를 세상에 선보인 게 1981년이다. 또 1970년대 대학가에서 일어났던 민주화와 민족주의, 민속학에 대한 관심과 열기를 제도권에서 끌어안으려는 시도를 했던 관제 축제인 ‘국풍 81’이 5일 간의 행사 기간에 1,000만명을 동원했던 것도 1981년의 일이다.
박생광이나 이만익, 오윤 모두 다른 세대다. 다만 공통적으로 80년대에 작가 인생의 절정을 달렸고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 것’(전통)을 현대화하는 방법을 모색했고 각기 그들만의 방식을 선보이며 호응을 끌어냈다. 아마도 이들의 교차 영역에 ‘한국적인 것’에 대한 대중의 공감대가 실렸을 것이다. 이만익은 세 명 중 가장 큰 미디어(88올림픽이라는 매개체)를 확보해 한국 대중과 만났고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주몽, 160x300cm, 캔버스에 유채, 1999
2부 전시에는 이만익의 인간적인 면모, 개인적인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작품도 있다. 윤동주나 김소월, 박목월, 이중섭 등 문학가와 선배 화가를 오마주한 작품이 그것. 화가 김정의 회고에 따르면 이만익이 여흥 자리에서도 시 암송을 즐겼다고 한다. “이만익은 시인 정지용, 윤동주, 박목월, 김소월 등 시 열수를 계속 달달 외운다. 음료수를 마시곤 또 십 여 수, 모두 25수를 외곤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다. 강 위를 달리는 기차를 배경으로 한 윤동주, 소담한 목련화 배경의 박목월은 모두 시를 사랑한 화가의 상상력일 것이다. 이번 전시 제목으로 쓰인 ‘별을 그리는 마음’도 윤동주와 관련된 것이다. 이만익은 생전에 윤동주 시인의 작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 구절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부분을 좋아했고 자주 되새겼다고 한다. 윤동주에게 별이란 단지 하늘에 떠있는 형체를 넘어서는 존재였을 것이다. 주최측에선 ‘우리의 얼굴로 우리의 모습을 그리고 싶다’ 말했던 이만익에게 별은 민족적 정기의 상징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전시 제목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 에서 ‘노래하는’을 ‘그리는’으로 바꿔 “별을 그리는 마음”이 되었다고 한다.
시인(윤동주 예찬), 162.2x112cm, 캔버스에 유채, 1991
전시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프랑스에서 귀국한 뒤 70년대 중후반부터 88올림픽 이전까지 10여 년간의 세계가 듬성듬성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만익의 세계를 좀 더 정교하게 보여줄 수 있는 전시를 기대하게 된다. 이만익은 20세기 한국 사회의 흐름이나 한국 현대회화의 흐름을 보여줄 수 있는 작가라는 것을 이번 전시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