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갤러리 《재현과 재연 Seeing Beyond》
- Spotlight (회화전) 본점, 2022. 09. 01 ~ 10. 27
- Highlight (회화전) 동탄점, 2022.09.02 - 10. 30
- Limelight (조각전) 인천점, 2022. 09. 01 - 11. 2
글/ 조은정(전시기획,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빈센트 반 고흐가 ‘눈에 보이는 대상을 똑같이 그리는 것은 더 이상 미술의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그의 시대에 사진이 일상화 된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시대 작가들은 눈앞 사물이 캔버스 위에 손으로 옮겨지는 사이에 하나 더 과정을 추가하였다. 작가인 나와 세상이 만나는 아주 얇은 막과 같은 지점인 ‘인상’이라는 스펙트럼을 공식화한 것이다.
헌데 일찍이 세상을 이해하는 대로 표현해내는 것이 전통인 동양에서 정작 서양화에 매료되었던 이유는 대상을 눈에 보이는 대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양에서는 눈에 본 사물의 그림자조차 그릴 필요가 없었다. 모름지기 그림이란 뜻 즉 관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아무리 똑같이 그렸다 한들 그것은 실재가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물론 오래 전부터 원근법이나 자연에 의거한 채색 등의 원칙이 동양화에서도 적용되었고, 초상화에서는 ‘털 한오라기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을 그린 것이 아니라는(一毫不似 便時他人)’ 원칙도 있었다.
순수 감상을 위하여 세계를 재현하는 형상을 재현하는 미술 즉 구상미술은 근대의 소산이었다. 수학과 과학, 해부학까지 동원되어 대상을 도해하는 태도는 서구 근대 과학의 모습으로 비쳤다. 그렇게 구상미술의 재현성은 우월한 지식체계의 모습으로 닮음과 닮지 않음을 작품의 평가기준으로 작동시켰다. 191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기생을 모델로 하여 작품을 제작하였을 때, 신문에서 모델 사진과 고희동이 그린 그림을 나란히 게재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사진과 서양화는 나를 둘러싼 눈에 보이는 형상을 네모난 캔버스나 종이 안에서 ‘다시 보여주고’ 있었고, 화가는 놀랍게도 사진을 구현해내는 존재로 비쳐지기도 하였다.
대상의 재현은 대상에 대한 시각적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의 형태, 질감, 공간에서의 분위기를 파악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태도는 지나치게 외형 묘사에 힘쓰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대상의 본질에만 집중한 결과 뜻과 의미가 정형화한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외부의 자양분이었다. 사물이 진실을 추구하는 전통, 여기에 보는 것의 의미를 확장시킨 지식은 100년 동안의 한국 회화의 변화상뿐만 아니라 삶의 변화상을 노정한다.
상품의 낙원에 온 미술
사진이 일상화 되고, 각국 생산품의 우수성을 홍보하는 박람회와 새로운 상품들로 채워진 공간인 백화점, 그 새로움을 알리기 위한 광고가 넘쳐나던 시기에 미술의 모습이 변화한 것은 당연하다. 세계에 대한 여행과 소식이 널리 퍼지고, 수없이 많은 잡지가 창간되고, 사람들은 도시를 산책하였다. 박태원(朴泰遠, 1909~1986)의 「구보씨의 일일」에서 주인공은 저절로 백화점에 들어서기조차 한다.
“...그리고 저도 모를 사이에 그의 발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기조차 하였다. 젊은 내외가 너덧 살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그곳에 가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식당으로 가서 그들의 오찬을 즐길 것이다. 흘낏 구보를 본 그들 내외의 눈에는 자기네들의 행복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엿보였는지도 모른다.”
백화점은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주는 곳이었다. 상품진열대와 상냥한 직원이 있는 장소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밝고 쾌적하였으며, 카페는 낭만적인 대화가 오가기에 하기에 충분한 공기로 가득했다. “한 장소에서 소요의 여러 가지 물건을 살 수 있는 것, 상품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 종일을 두고 보고만 나와도 꾸지람하는 이가 없는 것, 휴게, 음식, 용변 그 밖에 조금의 불편도 없을 만한 설비”(『신동아』, 1932년) 등은 문화적 공간으로 손색이 없는 조건이었다. 새로운 상품들이 가득한 곳에서 근대기 사람들은 작품도 보았다. 백화점의 갤러리는 소비되는 상품과 달리 예술작품이 얼마나 근대생활을 멋지게 만들어줄 수 있는지를 확인시켜주었다.
《재현과 재연》전은 바로 백화점이 한국 미술 전시의 요람이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미술작품을 보는 일이 식자층의 감평문화에서 감상의 문화로 이동한 것은 불특정다수인 대중의 탄생에 기반한다. 대중의 문화적인 시설로서 백화점은 ‘새로움’의 수용공간으로서 인간의 가장 새로운 것 즉 창조성에 기반한 것들을 보여주는 영역 또한 포괄하고 있었다. 변변한 미술 전시장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때에 백화점 화랑은 근대 전시공간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기존의 제도에 대한 대항으로서의 전시가 열린 곳도 백화점이었다. 1927년 봄 충무로의 한 백화점에서 《조선미술전람회》 낙선작 전시를 하였다니 얼마나 신박한 일인가.
천경자 <정(靜)> 1955, 종이에 수묵 채색, 166x90cm, 대한미술협회 대통령상 수상작
민정기 <통의동 백송> 2021, 캔버스에 유채, 162x130.3cm
재현의 신비로움
구상회화의 세계를 지켜낸 작가들의 작품은 전통적인 소재라고 할 수 있는 정물, 풍경, 인물과 더불어 근대적인 생활상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다. 자연을 화실로 끌어들여 탁자 위 꽃병을 두는 일, 자연을 작가의 마음대로 재배치하여 화면 안에서 창조하는 것은 암울했던 시절의 작가들에게 희열감마저 주는 행위였을 것이다. 근대화에 따른 도시의 발달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잡아내는 산과 고궁의 풍경은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향수의 표현이다. 구상회화는 그 형태의 명확성으로 인하여 변화하는 정치, 사회적 상황 속에서 당대의 사회적 고민을 담고 있기도 하다. 강원도 양구에 소재한 박수근(朴壽根, 1914~1965) 묘지의 묘비석에 새겨진 아이 업은 아낙을 묘사한 소묘는 간결한 선 안에서 전후 가정을 책임졌던 강인한 어머니의 힘이 표상되고 있는 것처럼 다소 낭만적으로 보이는 작품 안에서 우리는 시대를 만난다.
20세기 초반부터 지금까지 100여 년 동안의 한국 구상회화를 통해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은 한국미술의 정체성이다. 대상을 보이는 대로 작품화 하는 태도라는 변하지 않는 조건에 부합한 구상미술도 작가들이 추구한 세계는 시간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다. 미술은 시대를 비켜갈 수 없는 사람과 제도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전시 출품작은 작가소장이나 유족, 콜렉터 등의 개인 소장품이다. 시대 안에서 어떤 이유에서건 개인이 선택한 작품들은 대중의 삶, 예술가의 삶을 담보할 수밖에 없다. 크기가 어찌 되었든 개인의 소소한 것들이 모인 100년 동안의 작품은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변화하거나 변화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반영한다.
《재현과 재연》에서는 어느 날 산책을 나선 1934년의 무기력한 지식인 구보씨의 걸음을 좇는 나를 발견하게 할 것이다. 근대 도시의 골목길, 통속적인 잡지와 서양식 꽃병이 놓인 카페 모퉁이, 다소곳이 앉아 책을 읽는 여인이 있는 유리창 너머의 집. 그러다가 문득 2022년 가을날 어느 날 아침에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무심코 전원 버튼을 누른 뒤 나타난 컴퓨터 바탕화면의 쨍한 사물들의 세계로 훅 빠져 들어가게 한다. 너무도 생생하지만 평평한 사물들에 매혹당한 나의 눈은 사물의 표면을 훑고 훑다가 문득 깨닫는다. 광대한 우주에서 탄생한 별먼지에 불과한 인간이 세상의 진실을 마주하는 열쇠를 손에 쥐는 순간의 광채를 이미 보았음을.
세상을 생각하는 관념에서 바라보는 눈으로 이해의 방식을 옮겨왔을 때, 사물의 진실이 곧 세상의 진실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완벽히 객관적인 시각이나 기법이란 존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대상을 묘사해내는 ‘재현’은 구상미술의 가장 큰 특징이다. 하지만 근대 작가들은 고흐의 사진에 대비되는 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내릴 필요는 없었다. 아카데미즘에 기반한 인상주의를 받아들였던 근대기 미술은 전적으로 닮기보다는 작가의 시각, 해석이 동반된 작가의 눈을 따라 재현된 세계를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재현으로서 구상미술은 근대의 소산이므로 감상자인 우리 뇌리에서는 근대가 주는 묘한 감각이 작품 감상에 동원되는 경험을 한다.
재연의 창조성
현대화가 진행되고 도시가 일상이 된 풍경은 네온사인과 넘치는 상품들이 반짝이는 장소였다. 하이퍼리얼리즘은 도시를 기반으로 눈에 보이는 세계에 대한 현혹을 기반으로 한다. 추상미술이 한창일 때 정밀한 묘사를 기반으로 한 하이퍼리얼리즘 작품은 서구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예를 들어 마치 손에 잡힐 듯 화면에 구현된 모래에 시멘트를 짓이겨 만든 건축자재인 블록은 서울이라는 도시의 풍경이기도 했다. 공터가 없어지고, 건축 붐이 일던 도시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던 모래가 두툴두툴 드러나 보이는 블록은, 발전하는 미래의 상징이자 무너져가는 과거의 회상이기도 했다. 한국의 구상회화는 특유의 사회,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서구와 형식이 같다고 해서 같은 미술의 양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술은 순수한 것’이라는 신념에도 불구하고 변화하는 정치, 사회가 작품에 담기는 것은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인간으로서 작가가 위치하기 때문이다.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구상회화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본다는 것이 인체의 물리적 작동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식임을 알아챈 결과는 사실적으로 그린다는 것의 개념조차 변화시켰다. 물론 주변부의 것들에 관심을 갖고 회화적 그리기의 엄격성에서 벗어나 일러스트, 사진이나 포스터 등도 그리기의 방식으로 채택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도 있었다. 하지만 핸드폰과 컴퓨터의 보급은 보는 방식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필름을 아껴가며 렌즈의 포커스로 맞추어지던 카메라 뷰파인더 속의 세상은 이제 원본의 개념조차 언급할 필요를 못 느끼게 한다. 말 그대로 무한복제가 가능할뿐만 아니라 심사숙고할 필요없이 셔터를 누를 수 있는 저장방식으로 수많은 순간들이 디지털 카메라 안에 잡혀 들어왔다. 그것은 크롭하여 픽셀이 깨질 때까지 확대하여 세부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세상이다. 작은 것들이 큰 것의 부분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같음을, 미시 세계를 통해 거대한 전체를 파악하는 세계로 눈과 사유는 변화한 것이다.
평평한 디지털 화면 안에서 보는 세상은 태양광에 의해 산란된 색채에 의해 인지된 사물의 세상과는 확실히 다르다. 대상은 모두 발광(發光)하는 존재이며, 선명하고,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색채는 상상력을 배가시켰다. 본다는 것은 이제 시각의 촉각성마저 의미한다. 아틀리에 탁자 위에서 구도에 맞추어 정물을 늘어놓던 작가들은 세상을 여기저기에서 따와 결합하고 왜곡시키고 재배열하였다. ‘눈에 보이는 대로’는 ‘내가 보는 방식으로’ 변화하였으며, 캔버스는 몸이 속한 현재와 정신 속 창조의 통로가 아니라 캔버스 자체가 창조된 세계가 되었다. 더불어 테크몰로지의 수용은 다양한 기법과 재료의 사용을 부추기게 되어 기법 자체가 작가의 양식이 되게 하였다. 이토록 매혹적인 모니터 안에 창조한 세계가 예술과 기술 어느 쪽의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NFT 아트가 장르가 된 초현대에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면에 걸린 캔버스, 종이, 천에 ‘그려진’ 작품 앞에서 우리의 시선은 표면을 훑고 표면의 막 안에 들어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으려 발걸음을 멈춘다.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쓸모없는 미술이 인류 역사에서 이토록 소중한 것은 인간이 창조하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의 몸으로 만들어낸 구체적인 사물들의 재배열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본다. 인간 손의 창조력을 눈앞에서 본다는 일, 가슴 뛰는 일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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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작가 명단
전시 작가 명단
근대 작가 42명 (동탄)
강신석 강우문 곽인식 김세용 김인승 김재선 김형근 김환기 남관 박성환 박수근 박영선 박항섭 백락종 백영수 백태호 변시지 서동진 손동진 손일봉 심형구 오지호 윤중식 이동훈 이림 이마동 이만익 이병삼 이수억 이종우 임군홍 임응구 임직순 임호 장리석 장욱진 주경 차창덕 천경자 최영림 한묵 홍종명
현대 작가 40명 (동탄, 본점, 애비뉴엘)
강강훈 공성훈 김강용 김덕기 김동유 김성국 김시현 김영성 김완진 김윤섭 김창영 문창배 민정기 박성민 박영근 박지혜 박창범 방정아 배달래 서용선 서유라 석철주 오명희 오병욱 유용상 윤병락 윤종석 이광호 이동재 이석주 이숙자 이재삼 이정웅 이한정 이희용 장기영 정영환 존쿡 주태석 최정혁
조각가 23명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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