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송은문화재단 소장품전
전시기간 : 2022.4.6(수)~5.14(토)
전시장소 : 송은 아트센터
글/ 김진녕
어둠의 깊이로 공간감을 표시한다면, 전시장 3층 ‘Cabinet of Curiosity’라는 별도의 전시실이 '가장 깊은 곳’이다. 르네상스 후기쯤에 그때의 권력층(또는 신흥 부유층)이 자신의 컬렉션을 모아둔 방을 ‘Wunder Kammer’(Cabinet of Curiosity), 호기심의 방으로 부르고 이것이 근대박물관으로 이어졌다. 송은아트스페이스 3층 구석에 마련된 ‘Cabinet of Curiosity’ 코너는 송은문화재단을 만든 송은 유성연 회장의 공간이고 그가 애장했던 조선시대 백자 명기나 고려시대 청자 베개, 그가 그린 수채화, 생전에 그가 걸어 놓고 즐겨보던 수묵화와 서양화, 즐겨 쓰던 ‘시불재래時不再來’라는 휘호를 네온으로 표현한 작품, 이번 송은아트스페이스가 주최한 《Past. Present. Future》
지난해 9월 말 문을 연 송은아트스페이스의 새 전시관 건물(신사옥)은 헤르조그&드 뫼롱의 설계작품으로 화제를 모았다. 새 건물에서 첫 기획전은 《HERZOG & DE MEURON. EXPLORING SONGEUN ART SPACE》
주최측에서는 이번 전시의 기획 의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2012년에 개최한
주최측에서는 10년 만의 소장품전이라고 하지만 지난해 7월 옛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마지막 기획전인 라오미 작가의 《Form, Landscape, and Memories Lost》
그때보다 이번엔 전시 공간이 더 커졌지만 고미술 컬렉션의 출품작은 줄었다. 대신 먼 배경화면처럼, 2층과 3층을 세로지르는 보이드에 걸려있던 이상범의 사계산수 병풍화나 낙화(烙畵, 인두화) 병풍 등의 작품이 개별작품으로 또렷이 관람객의 눈앞에서 식별할 수 있도록 전시됐다. 도자 작품도 마찬가지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18명의 한국 작가 중 과거의 문화 유산을 자신의 작품 요소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재해석하는 작가는 김준명과 김지평, 이세경을 들 수 있다.
민화의 요소나 병풍이나 족자의 장황(粧䌙) 양식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한 김지평의 작품은, 이상범의 여섯 폭 사계산수도 두 틀로 한 쌍을 이루는 병풍과 장승업의 <영모도> 열 폭 병풍, 19세기에 유행했던 낙화 산수도 여덟 폭 병풍, 민화풍 화조도와 문자도 병풍 사이에 놓여있다.
이 공간에 놓인 김지평의 작품은 석 점이다. 접혀있는 병풍에 간신히 드러난 속면 한쪽은 그림이 뜯겨나가 배접지와 병풍의 틀만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없는 그림>(2021)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서구의 근대화 시기에 외침과 동족상잔으로 가연성 소재의 문화유산은 거의 소실되고 그나마 남아있는 그림 대다수는 ‘천한 익명의 노동’으로 치부되는 사회체제의 한계로 작자를 알 수 없는 우리 근대 문화사를 떠올리게 한다.
* 당대의 ‘유명 작가’인 이상범과 장승업의 작품에도 이렇다 할 설명이 전시장에서 배포되는 설명서에 없고, 이름표도 달리지 않았다. 주최측에선 현장에서 이뤄지는 도슨트의 설명에는 포함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지평의 또다른 작품인 〈광배(光背)〉(2020)에 대해 주최측은 ‘광배(후광)와 장식적인 도상을 금선(金線)으로 남겨놓은 3면 병풍화로, 종교화에서 화려한 ‘장식’과 함께 그려지는 신성(神性)의 모습을 제거해 신의 부재, 신성이 사라진 시대의 모습을 상기시킨다’는 설명을 달았다. 〈능파미보(凌波微步)〉(2019)는 장황을 여성의 옷에 비유한 관습과 '능파미보(파도를 넘는 듯 가벼운 여성의 걸음걸이)'라는 말에서 영향받아, 신분은 다르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다양한 문학을 남긴 조선시대 여성 문인 숙선, 호연재, 옥봉, 매창, 사주당, 금원, 청창, 난설헌, 운초, 빙허각 등 10명을 시각화한 작품으로, 선과 색으로 이들을 표현한 ‘추상 초상화’ 쯤에 해당된다.
도자컬렉션이 선보이고 있는 3층에선 김준명 작가와 이세경 작가가 도자의 과거와 현대를 이어붙이고 있다. 대학에서 도자를 전공한 두 작가는 ‘도자기’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매체의 선입관을 한껏 비틀어 오늘의 이야기를 하는 작가다.
공장에서 사출판으로 찍어낸 플라스틱 식기를 연상시키는 〈가로적인 역사를 담은 도자기〉(2018) 시리즈는 도자기라는 매체가 갖고 있던 선입견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있음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신문지깔고 배달된 짜장면을 먹은 뒤의 식후 풍경을 재현한 〈자장면 그릇과 나무 젓가락, 휴지〉(2021)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초록색 얼룩의 멜라민 그릇과 나무 젓가락과 널부러진 휴지가 도기로 재현한 극사실품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다.
이세경의 ‘청화백자’도 시각적인 관습의 틈을 파고들어 무방비의 관람객을 흔든다. 반짝거리는 백자에 입혀진 화려한 무늬가 실은 전통적으로 기피대상이던 타인의 잘린 머리카락을 정교하게 가공해 만든 것이다. 이세경의 〈백자 위의 머리카락〉(2009)은 머리카락과 도기의 결합이란 낯선 조합을 통해 관객에게 말을 건다.
이런 현대의 도자 작업 옆에 고려시대의 상감청자 주전자와 병, 조선시대의 백자와 청화백자가 이름표 없이 관람객 앞에 놓여있다.
이 중 제사용 그릇인 조선시대 백자 궤簋는 뚜껑까지 온전히 갖춘 모습이라 눈길을 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동원컬렉션에 백자 보와 궤가 여러 점 있지만 뚜껑이 있는 작품이 없다. 간송컬렉션의 백자 궤와 송은컬렉션의 백자 궤는 형태적으로 가장 유사한 유물이지만 간송컬렉션의 백자 궤는 뚜껑이 없다.
짧게는 백 년, 길게는 천 년 가까운 시간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도자 유물은 생활의 편리라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당대의 호사품’, ‘의례용 부장품’ 등 여러가지 의미가 입혀졌고 지금 이 시간대에 도달하면서 다시 다른 의미가 덧입혀졌다. 그런 면에서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는 김준명 작가나 이세경 작가가 꾀했던 의미나 형식의 전복을 수백 년 간의 시간을 살아남으면서 이미 여러 번, 그것도 드라마틱하게 겪은 증거물일 수도 있다.
이미 향후 2년 간의 전시 계획안을 짜놓고 있다는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는 고미술 컬렉션만 다루는 전시 계획은 2년 안에 없다고 한다. 고미술 컬렉션을 믹스앤매치 방식의 주요 요소로 활용하는 송은문화재단의 선택이 향후 어떤 결과물로 이어질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