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사람, 가장 위험한
장 소 :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기 간 : 2021.10.15-11.14
글/ 조은정(미술평론가, 고려대학교 디자인조형학부 초빙교수)
현재 패션계에서 주목받는 모델 중에는 영국의 슈두(Shudu)가 있다. “실제 모델로 패션사진 찍는 데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다”면서 영국의 사진작가 캐머런-제임스 윌슨이 만든 가상인간이다.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가장 이상적인 여인상”을 만들었지만 비너스여신이 생명을 불어넣어준 다음에야 갈라테아가 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이 가상인간은 인스타그램에 접속만 하면 생생한 표정으로 멋진 포즈를 보여준다. 슈두가 프로페셔널한 모델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미국 LA에 산다는 릴 미켈라(Lil Miquela)의 일상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우리와 공유된다. 서울 출신 22살 로지(Rozy)도 인스타그램 안에서 멋진 인플루언서의 삶을 공유하는 가상인간이다. 인플루언서를 원하는 세상은 감각을 긁어모아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내었고 가상의 인물은 가상인간이 되어 영생을 누리고 있다. 오, 물론 이들을 생산한 업체의 데이터에 치명적인 사건이 생길 경우 그들의 운명은 달라질 수도 있겠다.
칸트에 따르면 대상이 아름다운 것은 목적에 합치되기 때문이다. 가상인간이 거리낌 없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상품 모델이 추문에 노출되는 순간 광고효과가 떨어지는 것과 달리 가상인간은 과거 학폭이나 미투의 염려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지도 먹지도 않고 살도 찌지 않고 지치지도 않고 24시간 일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광고에서 그들을 더욱 쉽게 볼 수 있다. 이렇게 ‘목적’에 맞추어 창조된 가상인간 대부분이 젊은 여성이다, 피그말리온의 갈라테아처럼. 창조자와 창조되는 자, 그것은 사회의 욕망과 권력구조를 반영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생산된 ‘인간’들은 대상화되기 십상이다. 피그말리온이 자기가 만들어낸 젊은 여성 갈라테아와 결혼한 것에 크게 이의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풍속통의(風俗通義)』에 인간은 여와(女媧)가 만들었다고 전한다. 심심한 여와가 황토로 인간을 만들었는데 그를 둘러싸고 놀자 기뻐서 인간을 많이 만들어내었다. 하지만 인간을 만드는 일이 점점 힘에 부쳐 지쳐가자 여와는 줄에 흙을 묻혀 튕겼다. 작은 흙덩이들은 인간형상이 되어 여와 주위를 뛰어다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흙으로 만든 인간들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끼리 결혼을 시켜 스스로 인간을 만들어내도록 하였다. 그리스로마신화의 프로메테우스가 강물에 흙을 반죽해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 성경에서 야훼가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코에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었다고 한 것처럼 여성신인 여와는 흙으로 사람을 빚어냈다.
가상인간이 컴퓨터의 평평한 평면에서 빛과 색으로 태어났다면, 인간은 축축한 흙에서 태어났다. 제주도의 설문대할망은 오백장군 아들들을 낳았다는데, 돌로 빚어진 아들들인 것이다. 인간은 창조물이기에 서로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한 것은 이러한 인간에 대한 동등함에 대한 주장이다. 또한 칸트도 인간이 결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동시에 객관적 원리로서, 최상의 실천 근거인 이 원리로부터 의지의 모든 법칙이 도출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 실천 명령은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 너는 너 자신의 인격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칸트 <윤리형이상학의 정초>
그런데 인간은 언제나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한다는 이상(理想)은,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언명된 것일 게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 서혜경이 보여주는 인간은 그 현실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역으로 인간 본연의 자유와 평등, 동등한 인격체 등에 사유하게 만든다. 동시에 자연의 위대한 힘, 그것을 파괴하는 자라나는 인간의 욕망으로서 도시, 오래된 전통에 대한 향수, 시대를 증언한 작가 오윤에 대한 오마주 등을 펼쳐낼 수 있는 것은 그가 ‘흙’을 미디어로 삼았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그 자체로 내용을 전달한다. 흙의 속성을 언급하기 위해 필자는 굳이 절절한 인간 창조신화를 설명하였다. 서혜경의 작업 과정이 진흙으로 형상을 만들어 인간을 창조한 오래된 신화를 소환할 정도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헌데 흙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사람뿐이던가? 장대한 자연의 세계도, 도시도, 산도, 역사도, 불공정한 세상의 관념도 가시화할 수 있다. 개념을 가시화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새로운 생명체를 생산한 어떤 존재들의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오윤오마주 1, 3> 2019년, 조형토 1100℃ 산화소성, 각 400x1110mm
서혜경은 이번 전시에서 다양하게 존재하는 테라코타를 보여준다. 그것은 장식에서부터 현실반영의 리얼리즘에 이르는 폭 넓은 미술의 기능을 가로지른다. 산, 물, 꽃, 물고기, 새, 아파트, 마당극, 존경하는 예술가의 작품 그리고 사람에 이르기까지 소재의 경계가 없다. 환조, 부조, 투각, 도판화 등 기법에서도 다양성을 담보한다. 그것은 조각적인 방식으로 조작되고, 공예적인 방식으로 다듬어지고, 회화적 방식으로 채색되며, 개념으로 전시실에 위치한다. 아주 오래된 표현의 도구로서 지금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작가의 시선, 그의 눈을 만나게 된다. 특히나 진경산수의 어떤 장면이나 민중미술의 한 폭을 재현한 듯한 작품에서는 그 ‘오마주’가 그의 몸에 밴 겸손함의 결과라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노골적인 그 ‘드러냄’은 오늘날 미술가들이 잊었던 미덕 중 하나인 탓에 단연 눈길이 간다.
오윤의 칼맛을 테라코타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작가가 회화를 전공하였던 때문이다. 조각을 전공한 오윤은 기실 회화를 전공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회화의 서사성과 조각의 구체성을 볼 수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물론 훌륭한 작가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음을 알지만 오윤의 단순한 목판화에서 특유의 칼맛 같은 것에서 느껴지는 단단함 조형성과 세부적인 묘사는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
작가 서혜경은 오윤의 판화 몇 장면을 도화(陶畫)로 재현하였다. 마치 목판화처럼 형태는 요철(凹凸)로 나타나게 되는데 오윤의 판화 장면에 더하여 작가는 민화에서 볼 수 있는 도상을 결합하였다. 이를테면 여인과 새순을 결합한 오윤의 판화 <봄의 소리2>가 자리한 도판의 상단부는 만개한 꽃과 나비 그리고 화답하는 두 마리 새를 배치하였다. 여인이 두 손을 벌려 춤을 추는 장면인 <춤>에서는 상단에 벼슬이 높은 닭 두 마리와 고개를 들고 서 있다. 노동에 지친피곤한 몸을 그대로 드러내는 남성의 뒷모습이 나타난 <피로> 상단은 창밖에 떨어지는 꽃들로 가득하다. 오윤 판화의 도상과 전통 민화에서 봄직한 도상을 결합함으로써 그는 의미를 확장시킨다. 단순하고 날카로운 칼끝으로 완성한 시대의 아픔을 서혜경은 화사하기 그지없는 욕망의 이미지인 민화와 함께 위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소리를 장치로 삼는 것과 같아 이 상단의 민화 부분이 바로 작가의 의미에 대한 해석으로 보인다. 오윤은 전통이라는 것 중에서도 밖으로 밀어내진 불화, 민화 같은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민화 자체를 차용한 작품도 여럿 남겼다. 서혜경은 오윤의 작품을 그저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기보다는 오윤이 해석했을 법 직함으로 가시화한다. 그 세심하고도 겸손한 해석이야말로 오윤의 진가를 일깨운다.
몇 개의 도판이 이어져 하나의 화면이 되는 방식은 마치 사찰의 꽃살문이나 병풍의 각 폭을 연상시키는 꽃을 새긴 작품에서도 시도되고 있다. <꽃> 시리즈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금이 보인다. 빙렬(氷裂)이 아름다운 것은 좋은 도자기의 미덕이기도 하다. 하지만 질그릇에 빙렬은 없다. 따라서 만약 그것에 금이 보인다면 버려지기 마련이다. 용도를 다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헌데 질그릇 또한 완상용이 된다면 그 금은 작품이 되게 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테라코타로 구워진 도판이 일일이 붙여져 하나의 화면이 되는 순간 용도가 없어서 용도가 있음을, 스스로 부수어서 예술로 화하는 것들을 만나게 된다. 하찮은 것은 결국 자기를 버려야만 새로운 것이 될 수 있음의 아이러니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꽃 1, 2, 3, 4> 2013년, 옹기토 1100℃, 산화소성 각 280x740mm
민화 화조도와 같은 계열로 도판에 화사한 색상으로 채색을 한 일련의 작품들이 있다. <현빈지문(玄牝之門)> 두 점은 연꽃이 드러난 작품이다. 푸른 물이 회오리치는 물속에서는 수직으로 물고기와 연꽃이 피어난다. 연밥 위로 붉은 땅과 나무들이 보이고 그 위로 물결만큼이나 요동치며 하얗게 솟아오르는 입방체가 가득 차 있다. 흰색의 가득한 입방체는 바로 도시를 메운 건물들이다. 획일화된 형태로 보아 아파트일 것이다. 붉은 물속에 물고기가 있고 그 위로 흰 연꽃이 피어 있다. 붉은 나무를 지나 흰색 건물이 상승하고 있다.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건물도 자라난다. 그리고 그것이 자라는 만큼 물은 더 빨개질 것이고 땅도 더 빨갛게 될 것은 우리는 안다. 마치 기둥에 붙였던 대련(對聯)처럼 똑 닮은 세로의 도판은 우리 거주처를 욕망과 파괴의 두 모습으로 나타난다. 등용문처럼 튀어올라 아파트를 잡기를 희망하는 소시민의 욕망이야말로 현대인의 민화가 아닐까도 싶다. 하지만 흰 건물이 지나치게 견고하고도 추상적인 육중함을 보이는 것은 현대 소시민의 욕망의 현주소일 것이다. 과거시험도 볼 자격이 없는 민중이 등용문을 문장지에 붙여놓는 것과 같은 셈이랄까.
<현빈지문 1, 2> 2020년, 조형토 1150℃ 산화소성, 각 390x1100mm
‘현빈지문’은 “깊은 골짜기에서 쉼 없이 솟아나는 물의 통로”를 의미하는 말로 천지의 근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물의 통로에서 만나는 자라나는 아파트는 언젠가는 성정을 멈출 테지만 그 물은 쉼 없이 또 세상을 생산할 것이다. 생명에의 예찬, 현대인의 어리석은 욕망의 근저에 위대한 물을 배치시킴으로써 작가는 희망을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전통의 모습을 띤 세로로 조성된 도판화 중에는 전통 산수화의 암석과 푸른 산 그리고 폭포가 흘러넘치는 장면도 있다. 두 점의 <곡신>은 세로와 가로로 구성된 두 점의 작품이다. 물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점에서 ‘현빈지문’ 계열이지만 그것은 목판화의 색상과 칼맛으로 구성된 산수를 보여준다. 균열된 도판의 산수는 오래된 자연의 힘, ‘자연의 힘을 사라지지 않는 무한한 생명성의 상징이다. 『노자』에 “곡신불사 시위현빈(谷神不死 是謂玄牝), 현빈지문 시위천지근(玄牝之門 是謂天地根)”이라 하였다. 도를 얻는 방법에 대한 실천이라 할 수 있는데 서혜경은 문자를 풀이하여 가시화하였다. 모든 것의 생명과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기 위한 연구과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곡신 1> 2021년, 옹기토 1150℃ 산화소성, 950x440mm
<곡신 2> 2021년, 옹기토 1150℃ 산화소성, 620x1050mm
형태상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붉은 산의 여백이 생명력 가득한 물이 아니라 희고 단단한 시멘트라면? 붉은 바위 사이에 흐르는 물의 청신함에도 불구하고 편히 시선을 두지 못하는 것은 가로로 펼쳐진 흰 여백에 붉은 구릉이 놓인 화면이 실은 꽉 찬 아파트 숲속에 조금 남은 웅장한 산의 흔적임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전통 회화의 여백을 역으로 이용한 환기(喚起)의 장치는 곧 잃어버릴 것들에 대한 다급함을 일깨운다. 붉은 산이 나타나는 두 점의 <천박한 도시>는 표현 대상이 되는 것은 붉은 언덕의 산수이고 종이의 빈 공간, 여백의 흰색을 그대로 지닌 곳은 빽빽한 삼림처럼 울창한 아파트 숲이다. 본질적으로 여백과 표현 대상이 뒤바뀐 현대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의 가혹한 시선이다. <못 박힌 산>은 자연을 품은 이상적인 거주처가 자연의 입장에서는 곳곳에 못을 박아 들썩이지 못하게 만든 것과 같다는 비유이다.
<천박한 도시 1> 2020년, 옹기토 1150℃ 산화소성, 1060x520mm
남종화의 평평한 구도와 완만한 산이 기세가 펼쳐진 화면 상단에는 물고기를 안은 여인이 날아오른다. 이 작품의 명제는 <지어주신대로>이다. 긴 머리를 휘말리며 사랑스런 표정으로 물고기를 안은 여인의 하체는 물고기를 닮아 있다. 지식을 앞세운 문인화의 화면과 몽환적인 세계를 결합한 이 장면은 여인의 하체가 길게 늘어져 있음으로 인하여 꼬리를 가진 창조신 여와를 상상케 한다. 생명을 살리는 그 힘이 이상적 세계의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물고기를 안고 있는 <소녀>는 민화풍의 화사한 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고기를 안고 있는 인물은 동서양 막론하고 탄생과 생명의 상징이다.
<지어주신대로> 2020년, 조형토 1150℃ 산화소성, 450x760mm
<소녀> 2020년, 옹기토 1100℃, 산화소성, 350x700mm
한편 여와 같은 여신의 이미지는 <소녀 가이아>에서 환기된다. 그녀는 붉은 물살 속에서 하얀 물거품과 함께 피어난 분홍 연꽃처럼 피어나 있다. 하늘에는 구름이 날고 푸른 치마에 흰저고리의 그녀는 생명력 가득한 젊음을 가졌지만 높이 치켜든 만 한 손은 허공에 못 박혀 있다. 혈연 관계 없이 태초부터 존재하였던 신 가이아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다. 모든 것을 살리기 위해 그가 겪은 산고를, 그 희생을 생각하였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인간을 창조한 남신으로 구성된 서구신화의 세계에도 가이아가 있었음을 전통 동양 신화의 세계를 반추하며 확인한다. 신의 즐거움으로, 혹은 신을 섬기라고 만들어낸 생명인 인간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질문에 닿는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작가 서혜경이 자문하는 것들일 터이다.
<소녀 가이아 1>
작가는 신화와 예술 안에서부터 현실의 사람을 구별해 내놓는다. <새만금의 추억>은 땅을 일궈 씨를 심듯 갯벌을 일궈 조개를 캐내는 노동을 소재로 하였다. 긴 장화를 신고 햇볕에서 보호를 위하여 뒷목까지 감싼 모자를 쓴 여인은 스스로 기구가 되어 갯벌을 헤집는다. 노동의 현장은 작가의 오래된 관심사 중 하나였다. 80년대 노동자들이 구직게시판에 서성이는 그림들이 생산되었을 때 그들은 인력시장의 불규칙한 노동에 대한 고발의 모습이었다. 붉고 거친 황토로 구운 흙판이 그대로 드러나는 <파랑새는 있다>의 두 남성은 남루한 차림에 시무룩한 얼굴을 드러낸다. 새벽, 할 일을 찾기를 기다리는 일용직 노동자의 모습은 80년대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하다.
<파랑새는 있다> 2019년, 옹기토 1150℃ 산화소성, 340x850mm
밝은 곳은 빠르게, 많이 변화하는 데 반해 어두운 곳은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빛이 들지 않기에 그것은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아님을 드러내는 흙 색깔 그대로의 인물 중에는 <박씨 부인>이 있다. 늙고 평범한 노년의 그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로서 작가의 어머니이다. 작가는 ’어머니‘가 아닌 ’박씨 부인‘으로 3인칭을 사용한다. 동시대를 살지만 다른 가치관을 지닌 이, 본인의 생명을 있게 하고 모든 것을 포용한 인물 박씨부인은 이름 없는 여성의 위대함을 내포한 채 견고한 모습으로 있다.
<박씨 부인> 2019년, 옹기토 1150℃ 산화소성, 300x710mm
그의 도판화는 비교적 크기도 크고 인상적인 작품들이다. 헌데 이와는 달리 크기도 대단하지 않고 거칠게 마감된 개별의 사람 형태들은 이상하게도 한 번 보면 인상이 잊히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닮은 기계 사람 앞에서 결코 편안하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는 이른바 불편한 계곡이라 일컫는 언캐니(unheimlich)에 이른 때문이다. 하얀색의 얼굴을 가진 인간들은 페르소나로 지칭되는 가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저기’에서 무리지어 있지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족>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사람의 가족 이미지는 아니다. 의자에 앉아 거만을 떨기도 하고, 헐레벌떡 이러저리 뛰어다니는 현대인의 고달픔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낱 만들어낸 인형의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자세와 얼굴 특히 눈은 우리를 분명 불편하게 한다. 프로이트가 주목했던 호프만의 『모래사나이』에서 “이글거리면서 쏘아보는 녹색 고양이의 눈”처럼 어떤 인물들은 ‘사악한 눈길’에 대한 공포마저 느끼게 한다. 그것은 현실과 이야기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눈이다. <청년>은 동공이 확장된 공포로 가득한 눈을 보여준다. <내 아이들의 미래는>의 임산부는 경악의 눈초리를 보여준다. <놀다 가세요>의 인물들은 눈으로 욕망과 눈치 봄과 무력감까지 표현해낸다. 가늘고 긴 눈, 위로 치켜올라간 눈, 아래로 처진 눈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서혜경의 인물에서 우리는 눈을 보게 되고 그 시선의 불편함 속에서 나를, 내가 아는 이들을 작가의 눈으로 본다.
<청년> 2021년, 조형토 1150℃ 산화소성, 각 높이 700mm
어디서 본 듯 하고 친근한 이미지이지만 불쾌하고 두렵게 만드는 것, 그 경계의 불분명함이 언캐니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을 닮은 로봇이 언캐니한 것은 매우 다른 것에서 같음을 느끼는 불편함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그 불편의 계곡을 넘어선 가상인간에게 실지의 인간들이 친근한 것은 아바타와 같은 확장된 인간, 거울을 마주 놓아 무한히 확장된 공간처럼 인식되는 미장아빔(Mise en abyme) 효과일 수도 있다. 가상인간이 친근한 현실에서 오히려 우리가 인간이라고 생각한 대상을 묘사한 서혜경의 작품이 감정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거울 효과 때문이다. 작가가 갖는 직관으로 본 세계는 한국의 현실, 역사가 인간 형상에 투사됨으로써 이 자그마한 인간 형상들은 인형에서부터 기록으로, 자의식의 힘을 입어 작가의 직관에 의해 간파된 세계로 확장된다.
마당극에서 미얄할미는 맞아죽고 말뚝이는 그 상황을 전달하였는데, 서혜경은 이것을 재구성하였다. 변사를 등장시킴으로써 오래된 이야기는 극적 구조로 바뀐다. 첩과 싸우다가 영감에게 맞아죽은 미얄할멈은 회초리를 들어 남편인 신할아범의 볼기를 친다. 말뚝도 기타반주를 넣어 이죽거리며 상황을 전달한다. 화려한 엉덩이춤을 추던 미얄할미의 불쌍한 마지막이 아니라 회초리를 들어 따끔하게 혼을 내는 반전은 『박씨전』에서 추한 허물을 벗고 고운 모습이 된 박씨부인이 남편을 따끔하게 혼 내주고 용서하는 장면과 오버랩 된다. 여성적인 것의 힘, 그 포용성에 대한 변주는 작가가 전통 탈춤과 마당극을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확고한 이야기 구조를 반전시키는 열쇠도 알고 있음 또한 드러낸다. 누가 어떤 시각에서 전달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변화하고, 삶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반목을 넘어서 중계자를 만났을 때 세상은 재구성될 수 있을 터이므로.
타락한 삶과 지친 삶의 차는 무엇일까. 서혜경의 작품에 등장하는 개개의 인물들은 그 상황에 마음이 가게 한다. 공포에 가득한 눈으로 쭈구려앉은 그가 느낀 공포는 무엇일까. 지친 발걸음을 옮기는 일상에서 누군가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누군가는 지친 채 앞으로 나아가고 누군가는 이 세상이 아닌 핸드폰 안의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음을 본다. 현실을 넘어서는 방법으로 택하였던 이상향의 그림들이 아파트로 가득한 산천에 비유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 보아도 혼자만 가난한 것은 고통이다. 고통과 두려움을 떨쳐내던 오윤의 인물상이 등장한 것도 따지고 보면 세상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눈이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보게 하는 망원경으로 사용한 것이겠다 싶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가장 낯설고 두려워하는 것은 “시체, 죽은 자의 생환이나 귀신과 유령 등”이라 하였다. 프랑켄슈타인, 흡혈귀, 좀비, 원혼과 같은 것들은 형체 없는 두려움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존재로서 생존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죽음의 세계에서 귀환한 자들이다. 미지의 세계에 있으나 나의 공간에 있는 것들의 공포, 그 불편한 감정들. 이것이 어쩌면 공포영화와 좀비물이 넘치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 삶의 모습의 거울 한쪽일 터이므로 그리도 경악스럽고 무서울 것이다.
우리 삶의 공포스러운 상황을 서혜경은 슬쩍 들이미는 것 같다. 흔들리며 확장된 눈을 가진 인물들 말이다. 헐레벌떡 하루하루를 보내는 현대인의 고달픈 삶은 끝없이 지속될 것이라는 공포, 그것이 사실일 것이라는 공포감은 배부른 자, 안락의자에 앉은 자, 입만 나불대는 이들의 존재를 통해 확인된다. 정말 무서운 것은 세상이 아니라 그런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 불편한 법칙을 유머로, 눈웃음으로 지나가게 하는 여유로움이 흙으로 빚어낸 서혜경 작품을 관통하는 특징이라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