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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숙의 마음 정원 <인 더 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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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 결혼한 사람, 애 기르는 여자, 이혼한 사람, 울고 있는 사람, 마음이 약한 사람이 가꾼 마음의 정원.

전시명 : In the gaden
전시장소 : 예화랑
전시기간 : 2021.10.1~2021.10.30
글 / 김진녕

미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화가 김원숙(b.1953)의 개인전 (-10.30)이 예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 이력에서 국내외를 통틀어 65회째 개인전이고 그림과 조각 80점이 나와있다. 코로나 시기라고 하지만 내년 1월 뉴욕, 3월 베를린, 5월 LA 전시가 준비 중이고 이 중 LA전시는 대규모 전시이고, 이어 두 세 개의 전시가 더 예정돼 있다.

1971년 홍익대 미대에 입학한 뒤 1972년 7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계속 미국 기반으로 활동했지만 국내에서 팬이 많은 작가다. 그의 작품 속에는 에둘러가는 법없이 작품을 그릴 그 때의 자기 얘기가 담겨 있다. 수십년 동안의 이 스탠스는 변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점은 최근 페미니즘 시각이 반영된 서울시립미술관의 <허 스토리 뷰>전에 80-90년대 초반의 작품 두 점이 나오는 등 그의 작품이 페미니즘 이슈에 인용되는 빈도가 잦아졌다는 점이다.

그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그리는 주제가 변했나?

같다. 늘 나의 스토리를 그린다. 어떤 때는 빨간 옷, 어떤 때는 검은 옷 입은 정도지. 내가 읽은책, 느낀 것, 나의 스토리, 온갖 것을 그린다. 뭘 위해 집단에 들어간 적도, 투쟁한 적도 없고…

그런 거 물어보면 공부 못하는 애가 걸린 느낌이다. 어느 시대나 어느 사조나 그런 게 다 옆에서지나가고 있지만 나는 내 일을 하고 내 일기를 쓴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내가 어떤 치마를 입고 있는데 그게 유행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그런 온갖 것이 흘러간다. 그저 나는 계속 같은 것을 했다. 나와 내 주위를 그린 것 뿐이다.


-한국에는 최근 페미니즘 이슈가 유행이고 여기에 거론되기도 한다.


최근 김홍희 백남준 재단이사장이 나에 대해 쓴 것(신문연재기사)을 보내주더라. 그래서 ‘고맙지만 왜 가만있는 사람을 페미로 만드냐’고 했다. 고맙지만 난 거기에 낄 자격이 없다. 어떤 집단이나 투쟁이나 그런 정체성을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좀 부담스럽다. 그런데 내 작품에서 페미를 읽을 수도 있다. 그건 뭐냐면, 내 얘기를 했을 뿐이다. 내가 남자였으면 남자얘기를 했을 것이다.

뉴욕 미술계에서도 더 유명해질 기회가 있었다. 내가 좀 더 공격적으로 활동했으면 좀 더 유명해졌을텐데 난 그런 게 맞지 않았다. 어떤 공식이 있다. 어디에 가서 동참하고, 여기에 가서 뭘 하고 그러면 뭐가 되는지, 내가 왜 모르겠나. 다만 내 성장과정, 모태신앙 등…이런 것이 있는 나에게 그런 포뮬라는 너무 생소했다. 내가 조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반세기를 더 산사람으로, 한국 출신이고 여자라서 내가 억압을 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한 적은 없다. 지금 페미가 핫 이슈이긴 하지만 내가 그런 경험이 없다.

오히려 미국에선 내가 백인과 경쟁하면 더 돋보였다. 아시안이고 여자라서 소외된 적은 없다. 학교에서도 그랬다. 작품을 제출해서 평가받을 때, 내가 뭘하면, 선생이 나를 더 잘 기억해줬다. 동양 여자라는 게 더 기억하기 좋은 포인트였다. 핸디캡이라기 보다는 이로운 쪽으로 작용했다.

세상 어디나 나쁜 한국인, 나쁜 백인도 많다. 그건 어디나 마찬가지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서 동양 여자, 한국 여자, 애 기르는 여자, 결혼한 사람, 이혼한 사람, 울고 있는 사람, 마음이 약한 사람, 남이 고생하는 걸 못보는 사람, 이런 나의 정체성 때문에 내가 한 두 걸음 물러난 적이 없다.

 



-미국은 언제 갔나.

1971년 홍익대 응용미술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가니까 굉장히 고등학교 같은 느낌이고, 내가 그때 겉멋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그랬는지 ‘이게 아니다’란 느낌이 들었다. 더 큰 곳에 가서 다른 걸 하고 싶었다. 어리석고 계산없고 앞뒤 좌우 구별못하고, 그때는 젊었으니까, 어리석음인데, 그냥 유학을 결심했다. 72년 7월 미국으로 갔다.

우리는 미대 입시를 준비하려면 학원도 다니고, 연습을 많이 했다. 미국 애들은 그런 트레이닝이 없이 진학해서 내가 선생님 눈에도 금방 들었다. 그림도 엄청 잘그리고, 동양인이고, 여자고 한국에서 미대 다니는 애들은 다 잘하는 것인데, 미국 가니까 걔네들은 그걸 못했다. 그래서 선생님 눈에 금방 들었고 잘난 척을 많이 했었다.

 



-이번 전시에는 기존의 기독교적 모티브도 보이지만 산도의 부감시 등 동양화적인 요소가 있다.

의도적으로 동양화를 인식한 것은 없다. 나는 동양에서 자랐고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나한테 금방와서 닿는 게 한국적인 것이니까 자연스럽게 녹아든 게 아닐까.

80년대 초 뉴욕에서 살 때 친해지기 어려웠지만 예술가 그룹과 교류도 했고 그들이 멋쟁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때 서정주의 <질마재신화>를 접했는데 그때 느꼈던 강도가 뉴요커와의 교류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지금도 뉴욕 예술가는 야하고 난하다. 그런 것보다 더 재미있는 게 나한테는 많았다. 책도 재미있고. 많이 취한 상태, 환각 상태가 나에게 주는 즐거움을 나는 모르겠다.

 

-80년대 말-90년대 중반 작품에 ‘불안’이 보이지만 공격적이지는 않다.

내가 타고나길 오래 주저앉아있거나 오래 울고 그러지 못하다. 이혼하고 힘든 때도 울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뭐지?’하는 쪽이다. 긍정적인 편이다.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난 것 같다. 나는 기독교적인 백그라운드가 있다. 충실한 신도는 아니지만. ‘이것도 금방이다’, 다음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는 2003년 한국 출신의 혼혈 입양인 토머스 클레멘트와 재혼했다. 이후 산으로 가는 배나 외줄 위에서 머리에 남자를 이고 2인3각보다 더 위태한 줄타기 하는 여성, 물에 빠져 거대한 교각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불안'은 희미해졌다.

김원숙은 토머스 클레멘트를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후반에 태어나 거리에 버려지고 미국에 입양된 클레멘트는 아주 큰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뒤 기업인으로 자수성가한 뒤 자신같은 한국인 입양아를 후원한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준 대학에 거액의 기부금을 냈다. 그는 자신과 거리에서 헤어진 친모를 ‘더 큰 세상으로 보내주신 것’이라 믿고 있다. 자기를 버린 날을 기억하지만 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는 걸 이해한다고 말한다. ‘어떤 여인의 비밀이니까, 그 패밀리를 망칠 이유가 없다’며 찾지도 않았다. 다만 다른 입양인이 친부모를 찾기를 원할 경우, 친부모도 찾기를 원할 경우 토머스원숙재단에서 DNA검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DNA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토머스 클레멘트-김원숙 부부는 김원숙의 모교인 일리노이 주립대(ISU)에 1천200만 달러(약 143억 원)를 기부했고, 학교 측이 이를 기리고자 예술대학 이름을 김원숙 칼리지(Kim Won Sook College of Fine Art)로 바꿨다. 미국 대학이 한국인 이름을 딴 첫 사례다.

 


-대학에 기부를 했다.

남편이 굉장히 긍정적인 인간이다. 복강경 수술에 관한 특허가 60개가 있고, 특허 기업을 팔면서 큰 돈이 생겼다. 나도 돈많은 집 딸이 아니고, 그도 어렵게 큰 사람이다. 내가 그래도 작가인데, 내 이름에 전치사처럼 ‘몇백억’ 붙는 게 굉장히 부담스럽다. 현실감없는 돈을 빨리 빨리 없애려고 기증했다.

그런데 이런 일도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유학을 갔을 때 나한테 중요한 게 돈이었다. 집도 풍요롭지 않았고. 내가 살아야 남아야 하는 게 중요했다. 일리노이주립대가 돈을 한푼도 안내고 대학원까지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그게 나한테 중요한 조건이었다.. 내가 너무 많이 은혜를 입었다. 나에게 기회를 준 나라에 기부를 한 것이다. ‘김원숙 컬리지’는 일리노이주립대가 있는 한 이름이 계속 유지될 것이다.

 

-작품에 기타치는 남자가 자주 등장한다.

토머스다. 그는 발명가이긴 하지만 기타를 잘치고 자기 밴드도 있고…내가 그릴 때 옆에 와서 노래도 불러주고 그런다.

 



-무릉도원풍의 그림도 많다.

일종의 파라다이스다. 한 그림 안에 꽃과 열매가 다있다. 그냥 한 세월이다. 꽃이 피고 눈이 내리고 사계절이 다 있고 온 세월이 다있다. 내가 열심히 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도)막이 점점 내려오고 있다. 겨울이 오고 있다.

  

-마음의 요동이 이젠 없나.

그게 없으면 죽지(웃음). 마음의 요동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난 행복이란 단어를 별로 안좋아한다. 스테이블한 상태가 뭔가? 그런 상황은 실제 별로 없다. 이 정도면 만족한다는 감정은 금새 휘발된다. 그런걸 기억하기 위해 그리기도 한다.

불안마저도 아름다움을 기억하면 좋다. 불안도 금방 끝나는 것이다. 불안도 그림의 밥이 된다.

 

 

-조바심을 내거나 애를 쓴 적이 없나.

살면서 그런 게 왜 없겠나. 조바심은 애들 일 때문에 걱정을 하거나 그런 적은 있지만, 나의 예술에 대해서 크게 고민해본 적은 없다. 애먹이는 애들이나 말 안통하는 남편이 나에게 더 부담이었지만 그림은 항상 일기쓰듯이 그렸다. 힐링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하는 일이니까.

삶을 기록하는 것에서, 아름다움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작업은.

밖에 일 없으면 보통은 하루종일 그린다.

-노동 아닌가?

아니다. 재미다. ‘예술을 위해서 혼을 불태우고’란 말이 있는데 그런 것과 난 거리가 멀다. 난 재밌게 한다. 성공한 작가 스튜디오에 가면 사람(조수)이 많은데, 나는 ‘저렇게 재미있는 일을 왜 다른 사람을 시키나’,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그거 하자고 딴 일을 안하는데. 그 재미있는 일을 왜 남에게 시키나.(웃음).

 



인터뷰 말미에 관람객과의 소통 얘기가 나왔다.

“나는 조용한 아름다움에 사람들이 놀란다고 생각한다.

내 작품을 보고 그쪽에서 이거 너의 얘기를 하는 거구나,라고 말하면 그건 내 작품과 소통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전시장에 젊은 사람, 많은 사람이 와서 열심히 보는 게 나한테는 소중하다. 자기하고 뭔가 연결된 게 있다고 생각하니까 작품 얘기를 하는 것이다. 아트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내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잠깐이라도 소유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감사한 일이다. 돈까지 털어서 그림까지 사주면 내가 너무 황송한 일이고.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그 앞에서 뭔가 척을 해야 하는 것. 자기한테 와닿지 않지만 사방에서 떠드니까 그런 목소리는 떠나서 자신감있는 관객이 많아지고 있다..

내가 굉장히 기뻤다. 내 작품 앞에서 자신감있게 느끼고 행동하는 관객을 보고 기뻤다. ‘이게 뭐지’하고 직접적으로 작품과 직접적으로 감정의 연대를 느끼고 그러는 게 참 좋았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3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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