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메뉴타이틀
  • 한국미술 전시리뷰
  • 공예 전시리뷰
  • 한국미술 도서리뷰
  • 미술계 이야기
  • On View
  • 학술논문 브리핑
타이틀
  • 원문자의 새로운 시각, 새로운 공간
  • 2193      

전시명 : 새로운 시각의 사유공간
장 소 : 아트비트갤러리
기 간 : 2021.4.20-5.3
글 / 김진녕

- 가장 정교하고 구상적인 세계에서 추상의 세계로 나아간 화조화가
- 재료나 소재의 관습에서 벗어난 ‘국전 스타’의 21세기형 ‘한국화’



원문자 작가(b.1944)의 개인전 <새로운 시각의 사유공간>(~5.3)이 아트비트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을 바탕으로 한 이미지를 포토아트를 이용해 재창작하고 이를 출력한 뒤, 수십 년간 훈련된 사고력이라는 감각과 손의 기량으로 붓을 이용해 점을 찍기도 하고 색을 올리는 등 손의 터치를 더한다. 완성된 작품은 추상이다. 가장 전통적이고 구상적인 화조도를 그려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그가 이후 50여 년 간 펼친 여러가지 실험은 동시대성을 확보하기 위한 한국화 진영의 모색이기도 하다.

‘원문자’란 이름을 미술계에 널리 알린 출발점은 1976년 대한민국미술대전이다. 그는 1976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국전은 1981년을 끝으로 폐지됐다. 그때 신문 보도(중앙일보 1976.9.23)를 보자.

“올해 대통령상의 영예를 차지한 동양화가 원문자씨(33)는 이대 동양화과의 전임 강사로 이대 출신으로는 첫 번째 국전대통령상 수상자인 셈. 『아침(23일)에 전화를 받고 정말 놀랐어요. 열심히는 했지만 최고상을 받으리라고 생각 못했으니까요.』
원씨의 수상작은 『정원』. 만발한 연꽃잎의 그늘에 원앙 5마리가 노니는 그림이다. 푸른빛과 연꽃의 분홍색이 서정적으로 어울려있다.
『연은 세계 어디에나 자라긴 하지만 불교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지 않나요. 우리민족과는 남다른 친밀함을 갖고있다고 생각해서 화재로 택했습니다.』
원씨의 작품은 3개월에 걸쳐 제작한 진지함이 엿보여 심사위원들 사이에서도 거의 이의 없이 최고상으로 정해졌다고.
원씨는 국전에 13번 입선•4번 특선했으며 그 중 19회 땐 국회의장상을 받았다. 이 밖에도 64년 미협주최 신인전동양학부문최고상, 65년엔 부산 동아대학 주최 민전에서 특선에 들었다.
『미술을 이해해준 남편(건축사)에게 감사하고 6살 난 아들과도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고 수상 소감을 말했다.”

호사다마, 이 작품은 엉뚱하게 ‘겨울철새 원앙’ 논란을 일으켰다.

미술계 일각에서 겨울철새인 원앙과 연잎을 배치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오고 이게 연일 미디어를 장식했다. 원앙과 연잎은 부차적인 것일 뿐, 미술계 내부의 반목이 더 문제였을 것이다. 덕분에 이 작품은 그 어느해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보다 더 유명해졌다.

원 작가는 이제는 웃음과 함께 그때의 논란을 회상했다.

“선조들이 정원에서 원앙을 기르기도 했고, 옛 문헌에도 그런 게 나온다. 그런데 푸른 연잎에다 원앙을 그린 게 말이 안 된다고 난리 난리가 났었다.”

가장 정교하고 구상적인 한국화에서 시작해 한지 부조를 거쳐 포토아트를 도입해 추상적인 한국화를 그리는 그에게 20세기 후반의 한국화와 오늘의 한국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화조도를 오래 그리지는 않았다.

화조도는 80년대 중후반에 끝냈다대통령상 받으니까 하루에 열 통씩 전화가 왔다돈을 싸들고 와서 그려달라고 했다다 거절했다남편을 통해 그림 주문이 들어와 돈을 받아온 일도 있었지만 내가 안 그린다고 거절했다남편이 화를 내기도 했다. ‘왜 돈은 내가 다 버냐(웃음). 화조도 그림을 달라는 전화가 매일 오는데 내가 이러다간 10년 동안 원앙만 그릴 것 같았다그러면 작가로선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 거절했다열 장만 더 그리고 끝내면 안되냐,고 제의도 받았지만 그래도 거절했다작가로서 제대로 된 작업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남편이 ‘작가도 밥 먹고 살아야 되지 않냐며현실과 타협하는 게 뭐가 나쁘냐고 설득도 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는 게 작가라고 생각했다.


다만 두 작품은 더 그렸다소공동 롯데호텔 로비에 걸 그림이라고 부탁이 온 것은 수락했다그건 여러 사람이 보는 그림이라 그렸고 한국일보 쪽에서 장기영 사주(1916-1977) 별세 1주기 기념으로 원앙과 연잎을 그려달라고 해서 70호 크기로 한 점 더 그렸다롯데호텔에 걸렸던 200호짜리 작품은 나중에 커피숍에 걸린 것까지는 봤는데 최근에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한국화가 외면받고 있다.

새로운 것을 그리지 않기 때문 아닐까종이가 가지고 있는 약점도 있다색이 바래고 찢어지고… 한국화의 몰락이라기보다 정확하게는 수묵화의 몰락이고 채색화는 한번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몰락한 셈이다.

나는 시각적 이미지를 그대로 화면에 표출시키는 것은 별로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나아갔다.

내가 추상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화조의 현대화를 추구하다 보니 그리 된 것이다화조화에 나무가 있고 꽃이 있고 새가 있다그런 전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구를 하게 됐다배경을 없애거나 추상적으로 처리하기도 하고 현대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직선으로 배치를 하기도 했다그런 모색을 한동안 계속하다 보니 원래 형체가 없어지기도 하고.. 조금씩 더 실험을 해나갔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콜라주를 도입해 사이사이 화조를 넣어보기도 하고.

그러다 1989년에 한지를 이용한 부조 작업을 시도했다그때 발표한 작품한지 부조를 보고 조각하는 분들이 연락이 많이 와서 한지를 다루는 방법을 알려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설명적이란 생각이 들었다형태에 연연하기 보다는 작가 내면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추상세계로 더 들어가야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그 다음부터는 형태가 있거나 없거나 구애받지 않고 그렸다대상을 똑같이 표현하는 것에서 벗어나 정신의 자유로움을 추구했다.



-90년대 이후에는 한지 자체의 물성에 주목하는 것 같다.
한지의 하얀색이 엄청 좋다매력있다한지는 아무 색이 없는 것 같지만한국인의 정서가 들어가 있다우리의 전통이 들어가 있다따뜻하고 부드럽지만 질기다그게 한지 부조의 매력이다한지의 물성이 너무 좋다우리 것이 너무 좋다대학 때부터 그런 마음이었다절대 외산을 쓰지 말자는 주의였다하지만 동양화 재료는 대개는 다 일본산이었다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울분을 느꼈다.

-70년대는 채색화에 대한 논란도 많았다.
해방 뒤 우리나라에서 일본화 스타일에 대한 거부감은 전반적인 흐름이기도 했다. 70년대에도 색을 쓰는 것을 일본화풍이라고 비난했다식민지 경험 때문에 채색화를 왜색으로 몰았다서울대쪽에선 채색을 쓰면 격이 떨어진다속되다천하다,고 여겼다고 한다잘못된 일이다서울대 출신 선생에게서 배우는 제자는 감히 색을 쓸 생각을 못했다그 많은 재료가 주어졌는데 그걸 다 써야지

-이대 동양화과도 진채를 금기시했나.
진채에 대해서 금기시하지는 않았다. 얼마든지 그릴 수 있었다. 내가 안 썼을 뿐이다. 내 8년쯤 후배이자 제자인 김보희가 진채를 쓴다. 그도 요즘은 아크릴을 쓴다고 한다.
나는 대학 때 이유태(1916-1999) 선생과 안동숙(1922-2016)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두 분은 스타일은 반대였지만 모두 나를 아껴주시고 가르쳐 주셨다.
이유태 선생은 왜정시대에 일본에서 유학해 진채를 배웠다. 80년대만 하더라도 채색화는 왜색이란 생각이 우리 사회에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니까 이유태 선생이 미인도를 가르쳤다. 아이라인 그리고 나서는 (이게)나한테 안 맞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2학년 말 때 오당(안동숙) 선생이 강사로 왔다. 3학년이 됐을 때 오당이 이대 앞에 화실을 차렸다. 그때는 다 고생하던 시절이라… 내가 거기 화실에 나가면서 오당의 지도를 받게 됐다.
오당은 이당 김은호(1892-1979) 밑에서 그림을 배운 뒤 서울대 회화과에서 공부한 분이다. 도제식으로 배우고 대학에서도 배운 분이다. 오당은 이당에게서 좋은 걸 배웠지만 이후 서울대 졸업생 위주의 묵림회 멤버로 활동하면서 수묵 위주 작업을 많이 했다.
오당은 아교를 섞어 쓰는 작업에 능숙했고 많이 쓰기도 했다. 그에게 수묵에 아교를 섞어 쓰는 작업을 배웠다. 오당에게 활달한 그림을 배웠다. 오당은 “곱게 그린 그림은 죽은 그림이다. 다 가져다 버려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반면 이유태 선생은 선이 고운 그림을 칭찬했다. 이유태 선생의 칭찬을 받은 작품과 오당의 칭찬하는 그림이 달랐다. 중간에서 난감하기도 했다. 두 분이 사이는 좋았지만 작품 스타일이 완전히 반대였다. 그래서 내가 학교 작업실에는 화판을 두 개 만들어놓았다. 오당이 올 때는 오당풍으로, 현초가 올 때는 현초 풍으로 그린 화판을 펴놓았다.

-석채도 쓰지 않았나.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정원>도 수묵담채 기법으로 그렸다석채는 작품 중 부분적으로만 쓴다나는 맑고 투명한 그림이 좋다일본화는 보면 답답하다너무 완벽하다숨통이 막혀있는 느낌이다 나는 자유로움이 좋다숨통이 좀 터지고여백도 있어야 좋다여백의 미를 살리면서 색채는 맑고 투명하게그런 것이 좋다나는 항상 먹을 감미한 색을 쓴다담채가 내 성격에 맞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추구했을 뿐이다.



-대통령상을 받은 <정원>은 어떤 스타일인가.

국전에서 내가 상받은 작품은 대개는 이유태 선생 풍으로 그린 것이다그때 국전 분위기는 고운 그림을 선호하는 쪽이었다상을 받으려면 ‘고운 그림을 그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정원>은 내 마음대로 그린 것이다오당 선생이 칭찬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일단 구상 부분에 작품을 내는 것이니 기초를 다진다는 마음으로 고운 그림을 그리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석사를 마치니까 이유태 선생이나 오당 선생의 지적하시는 말씀이 좀 줄었다.


-교수 시절 동료로 황창배 작가도 있지 않았나.

황창배 작가(1947-2001) 4년만 교수(1986-1991)로 있었다아주 자유로운 분이었다진채도 쓰고 아크릴도 쓰고 재료를 가리지 않았다학교는 4년 만에 퇴직했다그때 그의 그림이 너무 인기가 있어서 돈을 싸들고 사러오는 판이었다그러니 학생을 가르칠 여력이 없어서 학생들에게 굉장히 미안해 했다그래서 그만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강사로 15년 정도 가르치다가 83년에 조교수가 됐고 2009년에 정년 퇴직했다. 26년 반 정도 교수로 일한 셈이다교수직이 작업을 계속하는 데 도움이 됐다그때는 그림만으로는 먹고 살 수 없으니까.



-요즘 화조도풍의 민화가 널리 사랑받는데.

나는 수묵의 세계도 몇 십 년간 있었다내게 채색은그림을 그리는 하나의 도구이고 나를 표현하는 재료다 (이제는)꽃 그리기가 싫다내가 처음에는 화조화가로 두각을 나타냈지만 감성이 중요하다요즘 민화풍의 화조화는 내가 추구하던 화조도와는 다른 것 같다.

따뜻함, 부드러움, 날카로움 이런 게 다 조화롭게 있는 게 좋은 그림이다전에 그린 작품 중 등꽃에 공작을 그린 게 있다그게 고상하지 화려하지는 않다나는 색깔을 쓸 때 한 톤을 가라앉혀서 쓴다내 화조화를 높이 평가해주는 쪽에선 ‘야하지 않다고 평가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업은 90년대 말~2000년대 초반 작업과 또 다르다. .

나는 여러 번 실험을 하고안주를 안 한다계속 변신을 한다내가 그런 생각을 하니까 타협하지 않으니까 추상도 하는 것이다팔리지도 않는 추상을 하는 것이다이런 추상 작업은 미술관만 좋아한다.

난 새로운 걸 하고 싶다배우는 게 좋다당뇨 걸린 게 52년째다길가다가 쓰러진 것도 부지기수다다 하느님 은혜로 살아있고 작품도 한다매일 매일 감사하다.

항상 새로운 걸 추구할 수 있게 해 주고안주하는 것도 싫어하고어떻게 하면 더 좋은 작업을 할 수 있을까그런 것만 열망한다.



-포토 아트는 언제 배웠나.
학교를 퇴직하니까 내가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컴맹이었다딸에게 부탁하기도 하고사진관 분에게도 부탁해서 컴퓨터 업무를 처리했는데결국 내가 배우기로 결심했다제자 중 한 명에게 컴퓨터로 포토아트를 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일주일에 한 번씩 배웠다컴퓨터 상에서 화면 조절과 배치를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출력한다그걸 프린트해서 보면 대개는 실망한다그 출력된 결과물 위에 점을 찍거나 색을 얹히는 등 터치를 더해 완성한다그렇게 4년이 흘렀고 1,400점을 완성했다그 중 30점을 추려서 이번 전시에 선보였다내게 포토샵을 가르친 제자가 이번 전시에 와서 놀라더라.

-원문자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나는 한국에서 작업하는 ‘한국화가이 문화 안에서 호흡하고 공유하니까사고가 중요하다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다 이용한다아크릴을 쓰기도 하고점 몇 개는 석채로 찍은 것도 있다아크릴도 물을 얼마나 찍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한국화와 동양화서양화를 명쾌하게 구분한 사람이 없다논란만 무성했지난 그게 답답하다내가 평론을 했으면 했을텐데….




글/ 김진녕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2 20:01

  

SNS 댓글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