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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시간으로 이어진 소동파의 마음 《파두완벽坡肚阮癖》 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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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특별기증전 《파두완벽(坡肚阮癖)》
장 소 : 성균관대학교박물관
기 간 : 2020.9.18 ~ 2021.5.31.


서예가 검여 유희강(劍如 柳熙綱, 1911∼1976)이 성균관대학교박물관에 소장품을 기증하고 검여의 작품을 전시한 2019년 <검무劍舞> 전에 이은 박물관의 두 번째 특별기증전이다.

첫 번째 기증전 리뷰
http://www.koreanart21.com/review/antiques/view?id=7833


이번 전시의 제목 “파두완벽(坡肚阮癖)”은 소동파(蘇東坡, 소식蘇軾 1037∼1101)가 추구한 예술세계를 표현한 ‘파두(坡肚)’와 김정희(秋史, 阮堂 1786∼1856))의 지향점을 말하는 ‘완벽(阮癖)’을 이어받고자 했던, 검여 유희강이 추구한 예술세계를 가리킨다. 즉 '소동파의 마음'과 '김정희의 예술혼'이라는 의미를 담은 말로, 이를 적은 글씨가 전시장 맨 안쪽에서 세 사람의 초상을 담은 현대 작품 위에 걸려 손님들을 맞는다.  전시관 입구에 있는 “소완재蘇阮齋”도 같은 방식의 표현이다. 


명륜전문학교 출신인 유희강 선생의 두 번째 기증전에서는 그의 정신적 지주 동파 소식과 추사 김정희, 두 사람과의 연결고리가 중점이 되며 여기에 현대로 이어지는 관계로 구성된다. 그러나 처음 공개된 소동파의 글씨가 주목받으면서 논란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문제작은 검여 선생이 소장했던 작품으로 귀하디 귀한 소동파의 진적(眞籍) 이라고 알려진 〈백수산불적사유기白水山佛跡寺遊記〉(1095). 9월 18일부터 5일 동안 예약에 성공한 소수만 직관이 가능했다(나머지 기간은 복제본이 전시된다고).

<백수산불적사유기>는 소동파가 북송 철종 소성紹聖 2년(1095) 3월에 현 광둥성(廣東省) 후이저우시(惠州市)에 있는 백수산(白水山) 불적사(佛跡寺)를 유람하면서 남긴 글이다. 소식은 58세이던 그 해 후이저우로 유배를 가 있었다. 그는 <백수산불적암>이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전시된 <백수산불적사유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성 2년(1095, 북송 철종2) 3월 4일에 첨詹 사군使君이 나를 초청하여 백수산 불적사를 유람했다. 탕천에서 목욕하고 폭포 아래서 바람을 쐰 뒤 중령에 올라 폭포수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가마[肩輿]를 타고 산을 나와서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며 산을 구경하다가 유람객들과 얘기도 나누었고, 저물녘에 여포荔浦 가에서 쉬기도 하고 대숲 그림자 아래서 지팡이 짚고 걷기도 하였다. 이때 여지열매[荔之]가 가시연밥처럼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동네 어르신[父老]들이 그것들을 가리키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먹을 수 있는 것이니, 공께서 술을 가지고 다시 오시겠습니까?”라고 하므로, 나는 속으로 기뻐서 그러마고 대답했다.
이윽고 이렇게 써서 유람한 해와 달을 기록한다. 함께 유람한 사람은 柯常, 林抃, 王原, 賴仙芝이다. 첨 사군의 이름은 범範이고, 나는 소식蘇軾이다.
동파거사 미산眉山 소식 씀.

이때 여지 열매는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과일 리치를 가리킨다. 북송 휘종도 리치를 구하느라 열을 올렸다고 하니, 남쪽지방 아니고서야 구하기 힘든 과일이었던 만큼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유행처럼 쫓던 과일이었던 것 같다. 유배중에도 사람을 사귀고 매사 긍정적이고 쾌활했던 소동파의 성격이 글에 묻어나는 듯하다.

(사군이라는 직책을 가졌던 후이저우의 지방 관리 첨범詹范(1042-1100)이 이 여행을 이끈 이인데, 이 사람은 소식과 함께 유람을 다니며 시를 주고 받으며 풍류를 즐김으로써 역사에 남게 됐다.)

이 〈백수산불적사유기〉는 어떤 경로로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인가. 박물관 측이 밝힌 유입 경로는 다음과 같다.

고려의 충선왕이 원나라 황제계승에 관여하며 인종(仁宗)이 등극되면서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인종은 멸망한 남송 황실 도서관인 비각(祕閣)의 도서를 충선왕의 아들인 충숙왕에게 하사했다. 고려사(高麗史) 권34 충숙왕 원년(1314) 7월 기사에 “원 황제[仁宗]가 충숙왕에게 남송의 왕실도서관에 소장된 서적 4,371책 17,000권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중에 포함된 것이 <백수산불적사유기>라는 것이다. 충숙왕은 이를 고려의 공신 이언충(李彦忠)에게 하사했으며, 그의 아들 이광기(李光起) 대에 윤원무(尹元茂)라는 이에게 넘겼다. 윤씨 집안에 전해 내려오며 임진왜란 시기 공을 세웠던 윤탁(尹鐸)의 종손에게 이어졌다. 유희강이 이 작품을 구입한 것은 1950년대 후반으로, 친족 관계에 있던 파평 윤씨 종손이 미국으로 이민 가면서 매매가 이뤄졌다.

작품 왼쪽에 이어져 있는 조옹, 황공망의 발문은 이언충이 7년 후(1321)에 원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원말4대가인 황공망(黃公望, 1269∼1354)과 조맹부의 아들 조옹(趙雍, 1289∼1369)의 발문.
“...지금 그가 백수산에 대해 쓴 글씨를 열람해보면 필법이 빼어나면서 굳세어 무궁하게 팔뚝을 운용한 신묘함이 들어 있으니, 진실로 오늘날 서예로는 동파공과 우열을 다툴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오흥의 조옹이 쓰다.”
“...대체로 공은 학문과 문장의 기세가 풍부하고 왕성하여 이것이 필묵 사이에 발로된 것이니, 이것이 다른 사람들이 끝내 동파공에게 미칠 수 없는 까닭이다. 대치도인 황공망.”


검여는 환갑을 맞은 1971년 본인의 제명과 이가원의 발문을 더해 장황을 새로 했다. 1975년 한국에 왔던 대만 서화가 요몽곡(姚夢谷, 1912∼1993)에게 감정을 의뢰한 바 있다고 하며 당시 언론에만 공개가 되었던 듯하다.

전시는 소동파로부터 시작해서 추사와 관련된 소장품과 검여의 미공개 및 대표작들로 이어진다. 유희강은 1968년 뇌일혈로 쓰러져 오른손이 마비된 이후에도, 좌수서(左手書 왼손 글씨)로 34미터 필생의 역작 <관서악부關西樂府>를 쓸 만큼 치열한 예술가의 삶을 남겨 감동을 준다. 작년에 기증되면서 <관서악부>는 특별전과 별도의 전시장에 상설전시되고 있다.


유희강이 쓴 완원의 시. 1961년작. "내 채마밭의 푸성귀를 따노라 말한 고인의 시가 음미할 만 하네..."


관서악부


검여 유희강을 주제로 바톤을 이어받은 동시대 아홉 명의 작가들이 펼친 다양한 법고창신의 결과물이 나머지 전시장을 채운다. 남주 선화자, 상산 박영현, 신영훈, 신제현, 신학, 연당 지은숙, 이동환, 정연두, 조환 등의 서예·판화·동양화·설치·미디어 작품들이다.


정연두의 미디어아트 <쌍회검무>



검여가 소동파와 완당을 자신의 예술 안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어떤 것을 오늘의 작가들에게 이어지는 과정으로 풀이한 박물관의 의도가 느껴졌다. 조용한 열기가 차오른 대학 박물관은 신선했다.


이 전시는 포털다음의 카카오갤러리에서 온라인으로 동시 오픈되었다.
https://gallery.v.daum.net/p/premium/sodongpa



SmartK C. 관리자
업데이트 2024.10.27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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