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배운성 1900-1978: 근대를 열다
기간 : 2020.7.29 ~ 2020.8.29
장소 : 웅갤러리
글/ 김진녕
- 환수 뒤 20여 년 만에 재회하는 48점의 작품
온통 눈이 내린 달밤, 야트막한 구릉이 겹쳐있는 길 사이로 나귀를 탄 남자와 시종이 걸어가고 있다. 유화지만 어딘가 심사정의 <파교심매도>나 최북의 <풍설야귀인도>에서 풍겨져 나오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또 다른 작품을 보자. 대지도 황색톤으로 메말라 보이고 잎새 하나 없는 고목 아래로 말을 타고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부감샷으로 형성화했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로 분류되는 오노레 도미에 (Honoré Daumier, 1808 ~ 1879)의 돈키호테 시리즈가 단박에 떠올랐다.
귀가
산 속의 기사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배운성(裵雲成, 1901-1978)이다. 앞의 그림에는 <귀가>(1938)이란 이름이 붙어있고, 기사의 뒷모습은 <산 속의 기사>(1938)이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배운성은 유럽에 있었다. 식민지 시절인 1920년대에 유럽으로 유학을 가서 1930년대에 파리와 베를린에서 그림을 파는 프로 작가로 활동했던 이가 배운성이다. 그는 1922년부터 1940년까지 유럽에서 활동했다.
2차대전이 일어나면서 프랑스에서 외국인 소개령이 내려지자 배운성은 현지에서 제작한 작품을 놔둔 채 1941년 귀국했다. 이후 해방 뒤 홍익대 미술학부 학장 등을 맡아 하면서 미술계의 주요 인물이 됐지만 한국전쟁이 터진 뒤 월북하면서 그는 한국 미술계에서 잊혀진 인물이 됐다.
그가 한국 사회의 관심을 다시 모으게 된 것은 프랑스 유학생이던 전창곤 대전 프랑스문화원장이 1997~1998년 파리 골동품상에서 배운성 그림 48점을 사들여 2001년 귀국하면서부터다. 그 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이 작품이 전시되면서 배운성은 식민지 시대에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현대작가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이때 환수된 그의 작품 <가족도>나 <초상화>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시나 갤러리현대의 50주년 기념 전시 등 한국 근대미술을 회고하는 크고 작은 기획전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48점 전부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이번에 서울 자하문 밖 같은 건물에 있는 갤러리인 웅갤러리(2,3층), 본화랑(B1)과 아트아리(1층)에서 <배운성 전 1901-1978: 근대를 열다>(~8월29일)를 열고 있다. 근 70년간 망각됐던 작품을 발굴해 구입한 전창곤 컬렉터가 이 작품을 지금껏 소장하고 있었기에 가능하기도 했던 전시다.
줄다리기
1920년대에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이나 중국이 아닌 유럽이나 미주로 떠나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였고, 몰락한 중인 계급 출신으로 사실상 몸종에 가까운 개인교사 노릇으로 조선 갑부 집에 ‘취직’한 뒤 ‘주인님’을 따라서 일본 유학을 거쳐 프랑스와 독일 유학을 갔다가 화가로 성공한 뒤 귀국해 신생 독립국 한국 현대화단의 간판으로 떠오르다가 한국전쟁 중에 월북한 뒤 그곳에서 숙청당한 배운성의 일생은 격정적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한국의 성모상
한량이었던 백명곤은 병이 났다며 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갔고 배운성은 여비가 없어서 귀국하지 못했다고 한다. 배운성은 그때부터 독자적인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가족도>(1930~1935)가 백인기 집안의 사진 자료를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집단 초상화라는 점에서 1930년대에도 백씨 집안과 교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점은 이 가족도에 배운성이 자신의 모습을 가족처럼 끼워 넣었다는 점이다. 배운성은 화면 맨 왼쪽에 구두를 신고 흰 두루마기를 입고 서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그렸다. 그와 백씨 가족간의 심리적 거리를 짐작케 하는 그림이다.
독일에서 그는 일본 유학 때처럼 처음에는 경제학과에 입학했다가 독일 화가 후고 미트(Hugo mieth)의 권유로 1923년 다시 레젠부르크미술학교에 들어갔다. 한국인 최초의 유럽 미술학교 입학 기록이다. 레젠부르크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1925년 그는 베를린국립예술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원을 졸업하기 이전인 1927년 파리 살롱 도톤느에 출품한 목판화 <자화상>이 입선하는 등 가능성을 인정받았던 그는 1930년 졸업 뒤, 1933년 바르샤바 국제미전 1등상 등 여러 미술전시회에서 상을 받으며 성공적인 이력을 쌓았다. 이를 바탕으로 1937년 파리로 무대를 옮기고 '살롱 드 메'나 '르 살롱', '살롱 도톤느' 등 지금도 미술사에서 등장하는 여러 전람회에 입상하거나 참여한다. 그러다 1940년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면서 1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현지에 남겨두고 귀국했다.
산속을 걷는 수도승
그때 남겨졌던 작품을 이번 전시에서 21세기의 한국 관객이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가족도>는 1935년 독일 함부르크미술박물관에서 개최된 개인전에 출품됐던 작품으로 세로 140㎝, 가로 200㎝의 대작이다. 한옥의 대청마루를 배경으로 17명이 등장하는 집단초상화로 당시의 복식이나 가족관계 등 생활사를 알려주는 시각자료라는 점에서 등록문화재 제534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대청마루 뒤쪽의 창밖에 서양 초상화 스타일의 차경을 붙여넣는 식으로 배운성은 그가 살았던 동양과 새로 배운 서양식을 섞어놨다. 엄마의 젖가슴을 쥐고 있는 아가를 묘사한 <화가의 가족>이나 한복을 입힌 <한국의 성모상>은 그가 서양화의 컨벤션과 조선적인 요소를 혼합하는 데 일찍감치 눈을 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 선보이는 그림 중 상당수가 기산 김준근을 떠올리게 하는 한국의 전통 가무나 세시풍속 놀이를 유화로 그렸다는 점에서 화가로서 현지에 살아남기 위해 유럽인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오리엔탈리즘 요소를 적극 도입했던 게 아닌가 싶다. <산속을 걷는 수도승> 같은 작품에선 민화풍 <소상팔경도>에서 볼 수 있는 산 묘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의 그 시절 작품에서 일본 전통 예능인 노의 가면을 쥐고 있는 여인 초상이나 일본 전통 의상을 입은 여인이 화면에 등장하는 것도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에서 붐을 일으켰던 일본풍 애호가를 겨냥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조선이나 일본에서 동양 미술을 배우지 않았던 배운성은 서양 미술을 현지에서 공부해 단독 군장으로 유럽 미술 시장에서 홀로 섰다. 아이러니하게도 배운성은 이후 어떤 한국 현대화가보다 더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요소를 자신의 작업에서 드러냈고 그걸 유럽 미술 시장에서 팔았다. 우리의 지나간 시절을 반추하게 만드는 전시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