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분토설향(紛吐雪香)
장 소 : 갤러리 아트링크
기 간 : 2020.3.24 ~ 4.10
글/ 김진녕
오른쪽부터 시작해 사각의 회랑형 전시공간을 한 바퀴 돌자 끝부분에 네 점의 소품을 모아놓은 작품이 걸려있다. 갈필로 그린 가지가 별자리를 이은 선처럼 보이고 별이 있을 자리에 매화가 놓여있다. 흔히 보는 매화를 형상화한 작품과 달랐다.
이동원 작가가 작품을 설명했다.
“그리는데 힘이 많이 필요했던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 선보일 작품을 갤러리에 다 넘기고 나서 이런 선이 나왔다. 이 선이 (내 손끝에서)나왔다 안나왔다 한다. 일부러 마디를 띄어 그린 것이다. 이제는 전통을 조금 더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모습을 옮기는 것에서 탈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하학적인 요소로 갔다. 갈필로 선하나로 그렸다. 속도감없이 천천히 그리는 선 안에서 매화의 모든 것을 다 표현하고 품위도 표현해야 하고, 그러는 게 어려웠다. 그렇게 네 작품을 더 했다. 나중에 나오는 바람에 전시장에도 2~3일 늦게 걸렸고 도록에도 이 작품은 없다.”
문인화의 한갈래로 치부되던 매화 그림을 2020년에 그리는 이동원 작가의 현재형 고민과 변화가전시장에 걸렸다. 아트링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동원 개인전 <紛吐雪香(분토설향)-고난속에 매화꽃을 피워내다>(~4월10일)이 그 전시다.
<청매> 2019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매화에 관한 화보는 남송 때 송백인(宋伯仁)이 펴낸 <매화희신보 梅花喜神譜>(1261)이다. 이 <매화희신보>를 한국에서 처음으로 석사 논문에서 다루고, 새롭게 21세기의 매화를 그린 <매화희신보>(2018. 헥사곤 펴냄) 펴낸 것도 이동원이다. 그가 20년 넘게 매화를 다룬 여정에는 고서화 연구자 故 고재식과의 인연도 있고, 짧지만 스마트K와의 인연도 등장한다.
매화희신보 원화
그가 고서화 연구가인 고 고재식(1960~2017)에게 서예를 배우기 시작한 게 1996년이라고 한다. 재학중이던 학과(홍익대 동양화과)의 교수가 김양동의 제자인 고재식을 소개했고 그에게서 붓을 다루는 법을 익혔다. 고재식은 2002년 그에게 <매화희신보>를 건네줬고, 이동원은 <매화희신보>를 다룬 논문 <묵매화 연구>로 2004년 홍익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매화 공부는 언제 시작했나.
2000년 석사 과정에 등록하면서 매화공부를 시작했다. 학부때는 동양화 맛을 봤고 대학원에 가면서 문인화, 그 중에서도 매화에 주력했다. (내가)오만했던 게 제일 어려운 것을 하고 싶었다. 문인화가 제일 어려워 보였다. 문인으로서의 자격이 어디까지인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문인화가 매력있어 보였다.
매번 매화가 피는 시기에 사생을 다녔다. 요즘도 매화가 한 두 송이 피어나기 시작할 때, 그때 맞춰서 찾아 다닌다. 매년 가서 사생하다 보면 인상적인 나무가 늘 인상적으로 보인다.(그가 꼽는 국내에서 제일 매화를 보기 좋은 장소는 김해건설고 교정이다. 남도의 매실 농장은 매실 수확을 위해 가지치기를 한 '산업 자원'이지 작품에 영감을 주는 매화나무가 아니라고 한다.) 최근에는 매화를 보면서 실물의 느낌은 작아지고, 오히려 정신적으로 내 삶 속에, 매화의 정신 같은 그런 것에 대해 더 생각하고 있다. 매화가 피어나고 있는 곳에서 내 생각에 침잠하는 나를 보게 된다. 생각이 달라지는 것 같다.
-이른바 문인화는 아마추어가 여기 餘技로서의 그림이지 화가의 그림은 아니지 않나.
나는 작업자고 화가지 학자는 아니다. 그 간격에 대한 고민도 했다. 그 해답을 조희룡의 매화에서 찾았다. 조희룡의 매화는 문인화가 그 이상이다. 조희룡의 시대에 중인이 품고 있던 기예나 수예를 드러내면 속되다고 욕먹던 시대다. 지금도 조희룡에 대한 평가는 추사의 말에서 시작된다.
조희룡은 문인의 입장이 아닌 작가로서, 예술가로서, 예술관을 펼쳐낸 사람이다. 내가 가야할 길은 조희룡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석사 논문의 초점도 조희룡이었다.
나는 문인화를 추앙하지만 ‘문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가 그려야할 지점이 ‘문인’의 어떤 프로세스를 통과해야 된다면 그런 과정도 거치리라,는 생각으로 공부했다. 내 손으로, 내 예술을 추구하는 것은 작가로서, 화가로서 내 입장이다. 이를 통해 매화 그림에 현대의 시대성을 담겠다는 게 내 목표다.
-현대에서 매화의 의미는?
나에게 매화는 인간이 살면서 겪는 고난과 시련이다. 삶의 과정 속에서 어떤 이는 타협하고 어떤 이는 꺽이지 않고 나가는 이도 있다. 좌절감 속에서 극복해나가는 희망의 메시지, 이미지를 매화를 통해서 표현하고 싶다. 매화가 오랜 인간 역사에서 획득한 의미 중에는 절개와 기개도 있지만, 오늘날에는 고난 속에 희망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청매를 많이 그리는 이유도 그렇다. 먹과 봉채를 혼합해서 청매를 그린다. 어슴프레 또는 해가질 무렵에 매화를 바라보면 흰빛이 더 에너제틱하게 다가온다. 그런 흰빛을 더 강조하기 위해 (바닥에)푸른빛을 입혀 그린다.
-천에도 그리는데 캔버스로 확장할 생각도 있나.
전통 재료에 대한 충분한 터득이 안된 상태라 전통에서 벗어난 다른 미디어를 아직은 쓰고 싶지않다. 전통적으로 회화 장르에 쓰이던 모시나 삼베, 비단은 다 써봤다. 다만 무명은 쓰지 않는다. 무명은 먹빛이 탁해진다. 비단은 초상화 작업을 하면서 써봤다. 내년 실학박물관에서 전시할 작업을 2017년에 끝내면서 초상화를 비단에 그렸다.
모시는 맑음이 있다. ‘문인화’라고 언급하는 게 불편한데, 모시와 수묵화의 맑음과 잘통한다고 생각한다. 2012년 환기미술관에서 열린 단체전 때 전시실 하나를 모시에 전통 기법으로 그린 <탐매>라는 작품으로 다 채웠다. 표구를 하지 않고 그대로 걸었다. 그때 미술관측에서 ‘관람객들이 그 작품에 대해 현대적이라며 반응이 제일 좋았다’고 전해주더라. 2015년에 한 번 더 작업을 했고, 이번 전시에 12년 작업과 15년 작업을 함께 걸었다. 두 번의 모시 작업을 통해 전통을 현대로 이어주는 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공부한 전통을 표현해 나와 동시대인인 관객에게 보여줬고 그들이 공감했다. 나는 만족했다. 법고창신이란 말이 이런 것 아닌가. 한국 작가로서 나의 정체성은, 전통을 잘 소화해야 세계 어디서든 인정받을 수 있고, 그게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로, 어느 정도, 내가 조금은 봐줄 수 있는 수준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행복하다. 기본은 전통이다. 그게 나의 뿌리다.
-그 동안 전시는 몇 번이나 했나.
2004년 첫 전시를 위해 갤러리와 계약했다가 취소했다. 단 한 장도 그릴 수 없었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눌렸다. 결국 전시 계약을 취소하고 포기했다. 그러면서 트라우마가 생겼다. 2012년에 첫 개인전 <옛 등걸에 매화꽃이 새롭구나>를 열었다. 그 전시가 내겐 산 하나를 넘은 전시였다.
2015년 두번째 전시로 ‘매화같은 삶을 산 사람’을 조명하는 전시를 했다. 15명의 백탑파와 백탑파의 예술적 교류를 형상화한 작업이었다. 이 전시 뒤에 박지원 박제가의 초상화 작업을 시작했다. 박제가는 나빙이 그린 스케치가 있다. 이 스케치로 2017년까지 그렸다. 박지원의 경우 박규수 손자가 그린 연암 초상이 있다. 이를 토대로 12장의 박지원 초상을 그렸다. 12번째 박지원 초상을 마치고 이걸로 전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어떤 행사장에서 박지원의 후손을 봤다. ‘이 사람이 박지원의 얼굴이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분은 폐기하기로 마음먹은 첫번째 박지원 초상화 작업과 가장 닮아있었다.
2018년 12월의 세번째 개인전은 <매화희신보> 발간 기념이었다. 송백인의 목판 화보를 보면 꽃봉오리부터 씨방까지 백장의 그림에 담았다. 그걸 보고 연구하고 매화 앞에 가서 실측을 하고 그림으로 담아냈다. <매화희신보> 작업의 일부는 2012년 전시에도 일부 소개됐다.(이번 <분토설향> 전시에도 <매화희신보> 작업 중 일부가 전시됐다.)
-초상화 작업에 손을 댄 이유는.
나는 화가다. 화가는 정신성도 중요하지만 기技와 수手로 기운생동, 전신사조를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초상화 작업할 때, 내가 부여한 의미다. 기예와 수예. 몸으로 흡수해서 손끝으로 나오는 것이 나의 그림이다. 이건 조희룡의 말이기도 하다.
-초상화를 했으면 채색화로 범주가 더 넓어지는 것인가.
아직 나는 채색화가 좀 멀(게 느껴진)다. 초상화는 그 분의 정신을 그리기 위해 색을 동원한 것이다. 채색화를 한다면 아직은 소화불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흥미도 가지않고. 지금 나는 수묵에서 다 해결을 못봤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에 걸린 청매 대작 두 점을 걸었는데 두 작품이 약간씩 다르다.
2015년 작과 2019년 9월 작이다. 지난해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
작년 6월 베이징 중국국가미술관에서 추사전이 열렸다. 초청받아서 개막식에 참석했다. 도착한 날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구(吳笠谷) 중국 벼루문화위원회장의 작업실로 가서 베이징 추사전을 기획한 한중 인사간의 교류가 펼쳐졌다. 나를 초청한 이유도 그제서야 알았다.
우리구가 먼저 소나무를 그렸다. 내가 그 자리에서 답례로 붓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동양화를 공부하면서 ‘네가 추구하는 전통이 뭐냐’.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 언젠가는 재야의 실력자와 붙었을 때, 한국에도 이런 공부를 한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는데, 그날 그 자리가 딱 그런 기회였다. 준비를 열심히 했다 하더라도 맞닥트렸을 때의 두려움은 있는 것이다. 모 아니면 도, 결과가 좋으면 그간의 노력이 인정받겠지만, 그 자리에서 못하면 그간의 노력은 허망한 것이 된다.
나는 설매를 그렸고 좌중의 반응도 좋았고 교류의 시간도 잘 끝났다.
그 날의 설매가, 나에게 해방감을 줬다. 그동안 나를 억눌렸던 껍질 하나를 깨뜨린 느낌이 들었다.
그게 6월이었고 이번 전시에서 제일 큰 청매화를 그린 게 작년 9월이다.
전시장 첫머리에 걸린 작품은 2015년 작으로 <매화를 닮은 사람> 전시장에서 선보였던 작품으로 세속적이지 않은 맑은 기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에 비해 2019년 작은 더 대담하고, 내가 매화를 그릴 때의 행복감을 그린 작품이다. 조심스러운 기색을 거두고 마음껏 표출한 그림이다. 2015년 작이 기본에 충실한 그림이라면 2019년작은 장식적이고 화려해지고 현대적으로 변했다.
2019년 9월작 <청매> 부분
<청매> 2015
-홍매 보다 청매를 더 좋아하는 이유가 있나.
홍매는 담백하게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홍매는 잘못그리면 너무 화려함에 치우쳐서 여성적으로만 보이기도 한다. 매화로 말하고자 하는 것과 다르게 비쳐지기 십상이다.
이번 전시장 말미에 놓인 홍매를 보고 어떤 이는 ‘홍매에서 힘이 빠졌냐’고 하는데 작가 입장에선 정 반대다. 이 홍매는 이번 전시 일정이 잡히고,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힘을 기울인 작업 결과물이다. 준비 마지막에 가서야 저 홍매가 나왔다.
힘이 빠져서 저렇게 나온 게 아니다. 서예의 기본 중에는 획을 그을 때, 철사를 수직으로 세워 무엇인가를 긁어낼 때처럼 중봉의 운필을 해야 하는 규칙이 있다. 저 홍매에선 매화의 사실성을 넘어서 기하학적으로 표현하겠다는 의도가 들어있다.
2000년 부터 동북아의 매화를 다 조사하고 자료를 다 복사했다. 그게 몇 백 페이지 분량이다. 그때 이방응(李方膺·1698~1754)의 매화가 좋아졌다. 이방응의 매화는 수직 수평의 매화다. 지금껏 그런 매화선이 내게서 안나왔다. 작년 9월에 대형 청매를 그리고, 연초부터 이번 전시에 선보일 작업을 하다가 내게서 수직 수평선이 나왔다. 그 필선의 특색은 빠른 속도가 아니라, 천천히 내리긋지만 굉장한 힘을 요구하는 선이다. 마음을 비워야 나오기도 하고.
그래서 이번 전시의 득의작은 홍매다. 필선 속에 숨겨진 힘이 들어있고, 적은 먹으로, 천천히 그린 매다. 사고의 전환이나 전복, 기하학적인 선과 면 분할의 아름다움 같은 게 들어있다.
그리는 사람 입장에선 이런 게 힘든 그림이다. 대형 청매(2019년 9월작)은 일필휘지로 그린 그림이고....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경은 아트링크 관장은 그를 전시장에 불러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동원 작가가 매화에 그렇게 오래 천착하는 게, 흥미롭고 감동이 있었다. 오랫동안 못봐왔던 희귀종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작가에 흥미를 느꼈다.
선비가 살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는 문인화의 판은 아니다. 문인화는 목적이 다른 장르다. 수양의 장르다. 유교적인 ‘인격도야’도 있고 완성도도 추구한다. 그 와중에도, 숨길 수 없는 개성이 있는 것이다. 현대화를 더 많이 다뤄온 내 입장에서, 그의 작업이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내가 옛 그림을 좋아한지 얼마 안된다. 10년 전 부터 옛 그림이 눈에 들어오더라. 그걸 어떻게 그렸을까,하고 상상해보곤 한다. 수묵화는 내공이 있어야 터져 나오는 그림이다. 수정이 안되는 그림이다.
요즘 동양화 또는 한국화는 일종의 3D 산업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되버렸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수묵이 유화보다, 아트 마켓에서 높게 쳐주질 않는다. 서예와 동양화는 현대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대중도 이 장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걸출한 작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작업을 지속하는 한국화가는 멘탈이 강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작가는 야망이 있어야 작가다. 야망이 없으면 작가가 못된다. 비난에도 칭찬에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계속 할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남을 의식해서는 멘탈이 약해서 못한다. 이동원 작가는 멘탈이 강하다. 그래서 내 이목을 끌었다.”
이 관장의 이야기를 듣던 작가가 한마디 보탰다.
“동양화는 수련하기가 어렵다. 장시간의 수련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게 수련해도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단언할 수 없다. 간교하거나 세속적이거나 맑거나 그런 마음이 작품에 다 나온다. 그런 과정을 거쳐 작품을 내놔도 세상이 좋아라하지도 않는다. 나는 나의 그림을 그릴 뿐이다. 이번 전시가 끝나면 내년 4월 선보일 정약용 프로젝트에 들어간다. 남한강 수계를 따라간 정약용의 충주 여행기를 그림으로 푸는 작업을 위해 답사를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