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핀란드 디자인 10000년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기 간 :
2019.12.21 ~ 2020.4.5
글/ 김진녕
1.
전시장의 가장 깊숙한 곳, 전시장 끝에서 맞닥트리는 섹션에 놓인 전시 캐비넷 벽면에 이런 글이 써있다.
“이번 기획의 주된 목적은 디자인을 '지식의 축적'이라는 개념으로 선보이는 것입니다. 디자인으로 보는 시간이 개념은 정보를 더욱 역동적으로 변화시킵니다. 10000년이라는 극한의 시간을 기준으로 설정한 이유는 핀란드 디자인이라는 주제를 원초적 시작점에서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사물의 기원을 연구하거나 연대기적 관점에서 기술적 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원의 복합성'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아마도 해답은 그곳에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사물 혹은 기술은 다양한 어쩌면 아주 먼 시간대로부터 고안된 발명의 융합일 수 있습니다.”
_ 플로렌시아 콜롬보 Florencia Colombo와 빌레 코코넨 Ville Kokkonen
<인간 물질 그리고 변형- 핀란드 디자인 10000년> 도록에서
이 글 밑에는 작은 글씨로 ‘이 특별전은 국립중앙박물관가 핀란드국립박물관이 협력하여 한국 전시에 맞게 기획, 재구성한 전시로 플로렌시아 콜롬보(건축가)와 빌레 코코넨(산업 디자이너)이 고안한 전시 개념을 기반으로 하였습니다’라고 쓰여있다.
2.
굳이 이 ‘벽보’의 작은 글씨까지 찾아본 것은 전시를 다보고 나면 누가 이런 전시를 만들었을까,란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일기 때문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인간 물질 그리고 변형- 핀란드 디자인 10000년>전은 핀란드라는 지역의 디자인을 소개하는 전시이기도 하고, 핀란드라는 나라 자체를 소개하는 프레젠테이션이기도 하고, 인간의 욕망과 도구를 발명하고, 자연에 적응하고 극복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문명사에 대한 전시이기도 하다.
‘핀란드의 디자인 만년’을 소개한다면서 보통 이런 류의 전시에 들러붙어있는 전시물이나 구성의 선입견을 거의 비켜나있다. 어느 문명권의 박물관에 가도 사람들이 몰려있는 전시장은 화려하고 반짝이는 금붙이나 보석으로 만든 왕관과 사치품, 화려한 색상의 지배자 계급의 옷가지나 사치품이 전통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놓여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 전시장에는 반짝이는 보석이나 금붙이가 없다. 석기시대의 도끼나 척박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정착한 핀란드인이 지천에 널려있는 자작나무를 이용해 만든 물지게나 기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나무 스키, 나무 숟가락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전혀 한반도와 교류가 없었던 지역이지만 손가락을 사용하고 걸어서 다니는 인체의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시키고 효율을 극대화시키려는 욕망은 핀란드의 생활사에 등장했던 비슷한 형태의 물건이 한반도에 등장한다는 것을 유물로 확인시킨다. 강원도 등 한국의 산악지역에서 겨울에 이용했던 설피나 핀란드의 설피는 거의 같은 모양이다. 손잡이 부분이 휘어진 고려시대 동으로 만든 숟가락과 핀란드의 나무로 만든 휘어진 형태의 숟가락도 비슷한 커브를 그리고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핀란드 디자이너가 만든 겹칠 수 있는 유리컵과 겹쳐서 선반에 얹어놓을 수 있는 전통 조선 놋그릇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아마도 핀란드국립박물관이 순회전으로 만든 이 전시가 한국이 아닌 다른나라의 박물관에 전시된다면 그 나라의 전통 유물 중 비슷한 컨셉의 전시물과 짝을 맞춰 전시장을 채울 것이다. 현지 관객들과의 좀 더 넓은 접점을 찾아내고, 물건의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 곧 쓰임과 관련이 있다는, 디자인의 본질을 관람객에게 직관적으로 알려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3.
<핀란드 디자인 10000년>전은 이런 식으로 전시가 진행된다.
연대기적 기술도 아니고, 핀란드의 역사 프레젠테이션도 아니다. 인간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남고 극복해가는 과정에 도움을 줄만한 물건을 만드는 보편적인 욕망의 발현 과정을 통해 핀란드의 자연 환경과 강인한 근성, 그 과정에서 디자인 측면에서 어떻게 구현됐는지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그 과정을 통해서 핀란드의 오랜 역사와 문화 전통, 현대 디자인의 흐름까지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전달한다. 한국에서 요즘 ‘북유럽 미니멀리즘’이라고 소비되는 간결한 디자인 감각이 실은 만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쌓여온 것이고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사가 핀란드라는 지역 환경과 만나서 생긴 결과물이라는 점을 설득시킨다.
이 전시는 2018년 12월부터 2019년 2월 말까지 핀란드 국립박물관에서는 같은 이름으로 전시가열렸고 첫 투어 장소로 한국에 온 전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이 전시에 대해 ‘핀란드 디자인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에 관해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형태의 융․복합 전시’라고 소개하고 있다.
6개의 섹션으로 나뉜 전시는 각 섹션마다 같은 캐비닛 안에 석기시대부터 중세, 20세기 초반 핀란드의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이 되버린 알바 알토의 디자인 가구, 20세기 후반 핀란드 하이테크의 상징이었던 노키아폰까지 함께 등장시킨다. 용도에 따른 분류를 하기도 하고, 기술적인 발달 과정, 또는 문화사적인 비교가 이뤄지기도 한다.
1부 <인간은 사물을 만들고, 사물은 인간을 만들다>에선 핀란드 석기시대의 돌도끼와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이전 세계 시장을 석권했던 노키아폰의 1996년 모델을 나란히 올려놨다. 석기시대 사람에게 가장 유용했던 돌도끼와 정보화 시대의 무기인 휴대전화의 병렬, 이 전시가 사물과 디자인, 문명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암시다. 인간의 생물학적, 문화적 진화는 기술 혁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2부 <물질은 살아 움직인다>에선 나무의 형태를 그대로 이용할 수 밖에 없었던 20세기 이전의 스툴이나 사다리와 함께 나무를 구부리는 가공법을 발견해 미국 특허까지 따낸 알바 알토의 L자 나무 다리를 전시했다. 20세기 전반기에 전성기를 보낸 알바 알토는 영어권의 십자낱말 풀이에도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디자인계의 슈퍼 스타다. .
3부 <사물의 생태학>에서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생 과정을 살펴보면서 예시로 외양이 비슷한핀란드의 설피와 강원도의 설피가 나란히 놓여있다. 소정강이 뼈로 만든 스케이트날이나 나무로 만든 늪지대용 스키를 보면 스키나 스케이트 같은 ‘동계 스포츠’가 실은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모색책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4부 <원형에서 유형까지>에서는 물고기 잡이에 쓰였던 지주식 통발과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나무로 만든 접이형 스크린을 나란히 보여주고, 안티 누르메스니에미가 디자인한 가운데가 뻥뚫린 사우나용 스툴(1952)이 벨름란드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통 스툴의 대량 생산이 가능한 리메이크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5부 <초자연에서 탈자연으로>는 인간의 환경에 대한 이해를 신앙체계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며 한국의 전통 제기와 핀란드의 나무 제기를 보여준다. 주술적인 관점에서, 곰의 머리뼈를 걸어놓고 곰의 용맹을 내재화시키기를 바랬던 인간은 현대에 들어와서 인체공학적인 디자인과 시선추적장치같은 센서기술을 이용해 감각과 편리성, 인체의 능력을 이전 시대에서는 불가능했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6부 <사물들의 네트워크>는 사물의 관계성에 대해 살펴보면서 예시로 표준화된 공산품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 토제 잔 중 손잡이가 달리지 않아 겹칠 수 있었던 것과 사라 호페아가 디자인한 겹칠 수 있는 유리잔(1954), 일마리 타피오바라가 디자인한 겹칠 수 있는 나무의자가 나란히 등장한다. 표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 쌓기와 겹침으로 만들어낸 사물의 응집성, 그리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여러 기술적 고안과 모듈성이 핀란드와 한반도를 오가며, 2000년 쯤의 시간을 종횡으로 오가며 한 캐비닛 안에서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대중이 ‘핀란드’라는 이미지에 갖고 있는 선입견을 만족시키는 코너도 세 군데가 있다. 핀란드 사우나를 전시장 안에 휴게실 기능으로 만들어 놓은 것, 전시장 한켠에 눈내리는 영상 이미지를 쏘고 헤드셋을 통해 핀란드 국민 작곡가인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의자 설치, 전시장 가장 깊숙한 곳에 설치된 영사실에는 북극의 오로라 이미지가 영상으로 재현되고 있다. 이게 애초 핀란드 전시에 있었던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주최측은 “한국 전시를 위해서 국립중앙박물관과 핀란드국립박물관이 협업하여 전시내용을 재구성하였고, 한국 유물 20여 건을 함께 진열함으로써 인류 문화의 보편성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했다. 전시 개념을 처음으로 고안한 공동 기획자 플로렌시아 콜롬보와 빌레 코코넨은 한국 전시의 재구성과 원고 작성 등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