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어쩌다보니, 어쩔 수 없이-김정헌 초대전
장 소 : 김종영미술관
기 간:2019.12.-2020.1.5
글/ 김진녕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김정헌 초대전>(~2020년 1월5일)이 열리고 있다.
전시장
김정헌(73)은 1946년 5월 평양 출생으로 스스로를 ‘진짜 해방둥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해석하면 해방 기념 베이비부머.
1980년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한 이래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있고 특히 최근엔 그 또래 어떤 작가보다 더 자주 전시회를 열고 있다. 2017년 나무아트, 2018년 보안여관 전시 등 이런 저런 합동전과 기획전에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20~30대는 박정희의 3공화국이었고, 박정희가 죽자 3공 체제의 연장이었던 5공화국이 들어섰다. ‘현실과 발언’은 3공과 5공 사이 짧았던 ‘서울의 봄’에 들어있는 셈이다. 5공화국 체제가 힘을 쓰던 80년대 중반은 권위주의 체제의 절정기였고, 현실에 대한 발언을 불온시하고 억압했다. 그리고 이런 체제의 압박이 민중미술에 더욱 강한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권위주의 정부가 민중미술에 생기를 불어넣은 셈이다. 그러다 1987년부터 형식적이나마 민주화 논의가 진전되고 1990년 독일의 통일과 소련의 몰락, 민주화 운동 세력의 분열, 90년대 말 야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정권 교체’가 등장하면서 민중미술은 급격히 동력을 잃었다.
어쩌다 어쩔 수 없이
김정헌도 노무현 정부에서 공직의 장을 맡았고 박원순 시장 체제에서 다시 공직의 장을 맡았다. 80년대의 김정헌과 2000년대의 김정헌은 나이도 다르지만, 입지도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은 주로 2000년대 작품이다. 물론 70년대와 80년대 작품도 몇 점 있어 ‘청년 김정헌’의 생각을 더듬어볼 단초를 주고 있다.
산동네 풍경
그의 ‘산동네 산수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일련의 작품이 한 공간에 배치된 것을 보는 것은 재미있었다. <풍경>, <풍경-산경문전>(1977)과 <산동네 풍경 I, II>(1978), <행복을 찾아서>(1982), <귀가>(1992)는 도시라는 삶의 조건과 풍경을 함께 더듬어보던 젊은 김정헌의 모습을 짐작케했다. 전시가 열리는 장소가 김종영미술관이란 점에서, 김종영의 70년대 산 드로잉과 <삼선교 풍경>(1970년대) 등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서 더욱 흥미로웠다. 여기에 <히프를 강하게>(1981)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시대유감전>에 전시되고 있는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 –럭키 모노륨>(1981)과 같은 맥락의 작품이지만 보다 덜 엄숙하고 더 직접적이란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귀가
반면 2000년대의 작품은 그가 이제 ‘시대에 대한 근심’보다는 ‘세기에 대한 근심’으로 관심사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5.18광주 민주화 운동이나 박정희의 유신체제, 이승만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을 섞은 작업은 마치 기념비 같은 느낌을 주는 규모가 큰 작업이지만 회고록을 보는듯 했다.
10년 20년 단위로 명멸해가는 체제와 권력에 대한 근심과 관심은 허술한 배 위에 올라탄 괴생명체(?)를 그린 <자본의 배를 탄 국가>(2015) 같은 작품에서 보듯 흘러가는 미물(?)로 묘사됐다. 미물 대신 어느 시대나 있기 마련인 ‘최종 빌런’이 있을텐데 이번 전시에는 그게 없다. 대신 산업화 시대의 인간 삶에 대한 관심은 커진듯 하다. 2010년대 들어 그가 만든 작품엔 철탑과 기계음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번 전시엔 <봄의 소리>(2019)가 대표적이다. 거대한 기계를 그린 한 작품의 한 귀퉁이에 윤두서의 나물 캐는 여인을 불러들였다.
봄의 소리
작가는 작가노트를 통해 이런 설명을 올렸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대부분 산업화의 과정을 거쳐 이제 페기 된, 또는 페기 될 쓰레기 같은 것을 많이 그렸다. 특히 이번 전시는 사진작가 조춘만이 찍고 기계미학의 대가인 계원대 이영준 교수가 해제한 독일의 중공업지대 ‘풸링겐 산업의 자연사’라는 책에서 영감을 받아 대형작업을 몇 점 시도했다. 또 그의 안내로 당인리 화력 발전소를 견학할 수 있었는데 이런 대형 중공업 기계들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산업화 과정을 거친 우리의 사회를 시각적으로 다시 한번 성찰하는 기회를 가졌다. 산업화의 대형 시설과 기계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했는지 모르지만, 이 사회는 ‘어쩌다보니’, 또 ‘어쩔 수 없이’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탄소 문명’과 산업화로 이룬 ‘성장시대’가 끝났다고 진단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내가 그려 온 많은 그림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잡다한 생각의 결과물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대와 사회가 혼란스럽고 나의 삶의 언저리가 잡다하기 때문에 나의 생각도 ‘잡다’하다. 생각의 파편이 널뛰기를 하고 옛날 기억을 소환해 현재와 미래의 일에 두서없이 연결시키기도 한다. 또 반대로 과거를 되 살려 현재와 미래를 환치하기도 한다. 삶의 변두리와 낯선 곳을 헤매기도 하고 가끔가다 정치적인 욕망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모든 생각은 혼란스러워 거의 정신분열증에 가깝다. 내 작품들의 대부분은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 연결돼 있는 잡다한 시대적 과제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용적으로도 그렇지만 형식적인 표현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표현 내용에 따라 그 방법을 그때그때 달리 사용했으니 그 결과물들도 잡다할 수밖에 없다.”
2010년대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걸어놓은 섹션의 시작 작품은 <어쩌다보니, 어쩔 수 없이>다. 이 제목은 전시회의 부제이기도 하다.
전시회 제목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몇 년 전 미국에 갔을 때 그 유명한 예일대에 구경 갔다가 거기에 있는 미술관에서 본 사진작품엔 차도르를 입은 수 십 명의 중동 여인들이 얕은 강을 빈손으로 건너고 있었다. 그때 그 여인들은 ‘어쩌다 보니’ 그 강을 건너는 것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건너는 것일까? 그 우연과 필연 사이를 오가는 의문이 지금까지 나를 쫓아다니고 있다. 모든 그림은 이 ‘우연과 필연’ 사이의 우주적 변증법이다. 모든 사건은 아니 모든 현상은 이 ‘어쩌다 보니’와 ‘어쩔 수없이’ 사이를 오가는 변증법의 소산이다. 나의 그림들은 특히 그렇다. 살면서 우리는 수 없이 많은 사람과 사건과 세상을 만난다. 그냥 지나친 그 많은 사람들은 “어쩌다 보니” 또는 “어쩔 수 없이” 만나고 헤어진다.
내가 미술을 하게 된 것도 ‘어쩌다 보니’ 미술을 만난 것이고 또 ‘어쩔 수없이’ 이 미술을 영위하고 산다. 반은 우연이고 반은 필연이다. 미술 중에서 ‘그림’은 특히 세상을 비추는 창이다. 이 그림이라는 창을 집안의 어디 벽면에 걸어두면 또 하나의 세상이 우리를 비추고 있는 셈이다. 아주 신비로운 일이다. 이 창을 통해 세상을 올곧게 비추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좋은 세상’이 이렇다는 것은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극락세계가 다른 곳이 아니다. 바로 그림쟁이들이 만들어 낸 세상이 우리의 ‘이상세계’인 극락일 터이다. 어쩌다 보니 또 어쩔 수 없이 그림을 그릴지라도 우리 위에 떠 있는 ‘달’처럼 이왕 뜬 김에 많은 사람들의 속사정을 헤아려 그려 봐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 지구라는 별에 사는 인간들에게는 별의별 사연이 다 깃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