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의금부 금오계첩
장 소 : 공평도시유적전시관
기 간 : 2019.10.18-2020.02.23
1414년부터 1894년까지 약 480년동안 운영되었던 의금부는 국왕 직속 특별사법기관으로 왕명을 받아 죄인을 신문하고 처벌하는 관청이었다. 신문에서 형벌의 집행까지 왕의 명령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형조가 일반 잡범을 잡아 죄를 벌하기 위한 기관이었다면, 의금부는 주로 양반 관료의 범죄를 담당하여 왕권 강화와 조선왕조 질서 유지 기능에 주축이 됐다. 수많은 드라마에서 반역으로 몰려 애꿎은 사람들이 고문을 받고 옥에 갇히고 하던 바로 그곳이다. 정치재판소 역할 뿐만 아니라 중대 사건의 최종판결기관 역할도 했다.
이 의금부는 현재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있는 새 건물 센트로폴리스 맞은편, SC제일은행 본점 근처에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 초기부터 이곳에 의금부가 자리잡은 후 계속 같은 자리를 지켰으며 근대에 들어 한성재판소, 대심원을 거쳐 일제강점기에는 종로경찰서, 해방 후 신신백화점이 그 맥을 이은 역사적 장소가 됐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 개관 1주년을 맞아 처음 기획한 전시 주제를 ‘금오계첩’으로 정한 것은 이러한 장소성이 바탕이 된 것이다. 조선 최고의 사법기관이었던 의금부도사가 되기 위해 신입 관료가 반드시 거쳐야 했던 면신례 과정에서 탄생한 수많은 금오계첩 중 일부를 전시하고, 이 시각적 기록물을 통해 의금부와 관료사회의 일면을 볼 수 있도록 했다.
‘금오계첩’은 의금부(‘금오’는 의금부의 별칭)에서 만들어진 모임의 기록으로, 그 당시에 의금부에 근무하던 관원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과 명단으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금오계첩도는 의금부 관청의 전경과 함께 그곳에 모인 관원들의 연회 장면을 그린다.
의금부 청사와 도사들의 모임장면을 그려넣는 형식의 금오계첩도의 구성은 제작시기에 따라 변화를 보인다. 전시에서 보여지는 금오계첩의 수가 많지는 않으나, 17~19세기의 금오계첩도를 보여주며 각 시대의 특징을 일별할 수 있도록 했다.
1712년 금오계첩
1729년 금의랑계첩
1739년 금오계첩
1799년 금오계첩
1803년 금오계첩
1875년 금오계첩
17세기 후반은 의금부 청사가 간략히 그려졌으나 18세기 전반기로 들어오면 사선방향의 일부 투시도법이 적용되면서 사실적인 느낌이 더해졌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는 다시 평면적으로 표현하는 양식이 유행을 이루었다. 이후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채색이 짙어지는데 그림은 도식화되고 정형화된 모습이 나타난다. 즉 사실성이 조금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패턴이다.
이 외에도 금오계첩도 중에는 화가에 따라 산수화나 감상 그림을 더한 예가 많은데, 아주 일부 소개되었다.
이홍조(1595-1660) 등 9명의 좌목이 기록된 금오계첩을 이홍조의 후손이 새로 제작한 것이다. 계첩 첫 면에 계회장면 없이 산수화만 그려져 있다. 호림박물관 소장.
서로간의 결속과 화합을 위해, 그리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남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이 계첩도의 제작은 신참들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것이고, 정도가 지나쳤던 면신례(신참을 벗어나기 위한 의식) 관습의 한 면이다.
몇 년을 준비하여 합격한 기쁨도 잠시, 관직에 들어온 신참들의 기를 죽이기 위한 선배들의 가학 취미는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의금부의 면신례 의식이 다른 관청보다 더 가혹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임인 임백현이라는 사람의 면신(신참을 면하게 해 주는 것)을 허한다는 의미로 내린 면신첩.
이름이 거꾸로 쓰여져 있고(현백림) 마지막에 선배들의 사인이 포함되어 있다.
온갖 벌칙을 고안해서 신래들을 괴롭히는 이 면신례는 시대마다 관청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는 선배를 일일이 찾아가 인사를 해서 확인 서류를 받고, 술과 음식으로 선배들을 접대하는 성대한 연회가 있어야 하고, 온갖 미션으로 희롱하는 선배들을 참아내야 하고 맨 마지막으로 축이나 첩을 사람 수에 맞춰(대개 10명) 제작해 선배들에게 선물해야 하는 것이다.
동일본으로 여겨지는 두 금오계첩도
초기에 많이 제작했던 축 형식에서는 상단에 연회장면, 하단에 선배와 신래의 명단을 기록하고, 화첩으로 점차 바뀌면서 그림과 명단이 담긴 책으로 제작하게 된다. 화가에게 부탁해서 그림을 그리고 비단으로 장정하려니 연회에 쓰이는 비용에 이 비용까지, 집안이 휘청거릴 지경인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매번 신참이 올 때마다 계첩을 사람수 만큼 제작하는 바람에 지금도 금오계첩은 많은 수가 발견된다.
의금부는 겸직인 당상관 어른들을 제외하면 실무를 맡는 10명의 의금부 도사들이 고유한 내규를 가지고 운영되었다. 의금부 도사는 승문원 등 다른 기관에 비해 허참에 이르는 기간(면신)이 훨씬 길어 약 90일~6개월이 소요됐다고 한다. 그들만의 규약을 기록한 금오헌록을 보면, 면신례 뿐만 아니라 다양한 규약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전시장 한 쪽에서는 이 면신례에 대해 제작된 역사채널e의 「혹독한 신고식」편 영상을 보여주고 있다.
작지만 알차게 관람할 수 있는 전시. (다만 사진을 찍는다든가 관람할 때 직접 조명이 너무 강한 느낌이어서 불편했다.) 공평동의 랜드마크가 된 휘황한 건물 지하에 숨쉬고 있는 역사의 흔적과 함께 들러서 감상해 볼 만하다. 끼리끼리 결속을 다지는 문화가 병폐가 되면서 남겨진 그림들이라 씁쓸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