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혁명, 그 위대한 고통 - 야수파 걸작전
장 소 :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기 간 : 2019.06.13-2019.09.15
글/ 김진녕
- 앙드레 드랭을 중심으로 본 야수파의 생성과 소멸을 보여주는 전시
- 20세기 초 1차 대전을 전후한 유럽의 문화 현상을 복기
야수파와 표현주의 작품 컬렉션으로 유명한 프랑스 트루아현대미술관의 소장품 전시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미술관이 2020년 초까지 리노베이션 공사를 벌이는 틈을 타서 투어 쇼에 나선 것. 특별전 <20세기 현대미술의 혁명가들 – 야수파 걸작전>(세종미술관, ~9월15일)은 그런 인연으로 서울을 찾았다. 피카소, 마티스, 드랭 등 20세기 거장의 회화는 물론 드로잉, 사진, 조각, 영상 등 총 140점을 선보이고 있다.
앙드레 드랭, 하이드파크, 1905
주최측은 홍보에 피카소와 마티스 등 한국에서 유명한 화가의 이름을 쓰고 있지만 실제 이 쇼의 주인공은 앙드레 드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컬렉션을 트루아시에 기증한 '레비 컬렉션'의 주인인 컬렉터 피에르•드니스 레비 부부와 드랭이 가까운 사이였고 그만큼 레비 부부가 드랭의 작품을 많이 모았으니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전시장에는 20세기 전반 피카소와 함께 했던 화상 거트루드 스타인의 자료 사진과 앙브루아즈 볼라르 등의 자료를 제시하면서 앙드레 드랭이 20세기 전반, 서유럽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물증을 제시하고 있다. 앙드레 드랭이 1905~1908년이란 짧은 시기에만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던 야수파의 출발에 함께 했던 작가이자 20세기 초 미술사를 만들어낸 화상의 지지를 받았던 화가라는 점을 여러 가지 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전시의 특징은 세 개의 ‘특별관’을 통해서 드러난다.
‘빅 벤’ 단독 특별관, 살롱 도톤느 특별관, 마티스와 피카소 특별관.
마티스와 드랭 등 일군의 화가들이 ‘야수파’라는 이름을 얻게 된 1905년 살롱 도톤느 전시의 ‘7번방’ 작품을 사진과 자료로 재현했고, 1905년 전시를 통해 당대의 일급 화상 앙부르와즈 볼라르(1866~1939)의 의뢰를 받고 드랭은 런던에 체류(1906~07)하면서 서른 점의 작품을 그렸다. 이중 29점이 전하고, <빅 벤>과 <하이드파크>가 이번 서울 전시에 왔다.
앙드레 드랭, 빅 벤, 캔버스에 유채, 79x98cm, 1906년, 트루아 현대 미술관
주최측은 <빅 벤>의 보존 처리작업에 국내 기업의 후원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빅 벤 단독 특별관’엔 이 작품만 걸려있고, 사진 촬영이 허용된 방이기도 하다.
마티스와 피카소 특별관은 가장 큰 사진 복제 작품이 걸린 섹션이다. 야수파란 이름의 가장 강력한 연관 검색어인 ‘마티스’와 ‘피카소’를 사진 도판이나 도자기 한 점(피카소의 광대)으로 대신한 것. ‘마티스와 피카소’를 홍보에 앞세운 이번 전시를 과대광고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것은 마티스와 피카소의 원물은 별로 없지만 대신 드랭 같은 야수파의 ‘창립 멤버’ 작업이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되기 때문이다.
드랭은 지난 2017년 퐁피두 센터에서 대규모 전시가 열리는 등 최근 들어 다시 재조명되고 있는 화가이기도 하다. 또 이번 전시에 나온 드가나 모리스 블라맹크, 키스 반 동겐, 로베르 들로네 등의 작품은 20세기 초 유럽 예술의 수도 파리에서 벌어진 흐름을 상상하게 만든다.
2017년 퐁피두 전시 전경
야수파의 ‘창업동지’(?)인 드랭과 마티스는 1905년을 전후해 지중해 연안의 콜리우르에서 함께 지내며 작업을 했고 이때 작업한 작품도 많이 남았다. 마티스가 ‘춤’ 연작으로 유명하고, 드랭도 춤을 형상화한 작업을 많이 했으며 음악과 미술의 협업을 시도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20세기 초 이전 세대의 문법을 파괴하고 색채와 붓질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 야수파는 미술만의 일은 아니었다. 20세기 초 미술계와 음악계의 슈퍼스타인 피카소와 드랭, 스트라빈스키가 디아길레프라는 당대의 흥행 마술사와 연결돼 있다는 점도 20세기 전반의 유럽 문화사를 이해하는 열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이 끝난 뒤 유럽은 2차 대전 직전까지 다시 한 번 흥청거렸다. 드랭은 이 시절 런던에서 당시 유럽 최고의 스타였던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단 ‘발레뤼스’를 위한 무대 미술 작업을 했다. 1차 대전에 참전했던 드랭은 1919년 3월 제대하고 파리로 돌아와 몽마르트 그룹과 접촉했는데 이때 발레뤼스의 감독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요청에 따라 그는 런던에서 3개월을 보내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알함브라 극장에서 로시니의 <환상가게> 음악에 맞춘 작품의 의상과 무대 세트 디자인을 했고 그때 그와 함께 어울렸던 동료가 피카소와 마티스였다. 피카소는 디아길레프의 초청으로 마뉴엘 드 파야의 발레곡 <삼각모자>의 무대화 작업에 무대 디자인을 맡았고, 마티스는 안데르센의 동화를 원작으로 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나이팅게일> 무대 디자인을 맡고 있었다.
디아길레프, 발레뤼스, 피카소, 마티스, 드랭, 스트라빈스키 등 20세기 초반 서유럽 최고의 스타는 이렇게 디아길레프를 고리로 인연을 맺었다. 피카소는 이듬해인 1920년, 강렬하고 원시적인 리듬의 <봄의 제전>과 <불새>로 이미 스타였던 스트라빈스키와 협업을 한다.
파리를 기반으로 발레뤼스를 이끌던 당대의 흥행 마술사 디아길레프가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바이얼린 연주자인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 ~ 1736)의 곡을 골라서 편곡해 작품을 만들어 볼 것을 스트라빈스키에게 제안했고 이를 스트라빈스키가 받아들였다. 스트라빈스키는 18세기 이탈리아 작곡가의 여러 작품에서 가려뽑은 곡으로 <풀치넬라> 모음곡을 만들었고, 디아길레프는 1920년 파리에서 초연 무대를 올렸다. 무대 미술은 피카소.
앙드레 드랭, 춤, 1906
<풀치넬라>는 스트라빈스키가 그를 스타로 만들었던 초기 3부작, <불새>(1910), <페트르슈카>(1911), <봄의 제전>(1913)이 보여줬던 강렬한 스타일의 원시주의(또는 야수주의)와는 다른 스타일이었다. 평자들은 스트라빈스키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방향을 튼 기점으로 <풀치넬라>를 들고 있다. 고전 시대와 바로크 시대의 음악 정신을 부활시킨 일종의 복고주의인 신고전주의는 2차 대전 전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다.
앙드레 드랭 역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05~1908년에 보여줬던 야수파 시대와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이전 시대의 문법에 가까워진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드랭은 2차 대전 중이던 1941년 독일에서 전시를 한 이력 때문에 종전 뒤 나치 협력자 논란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잊혀져갔다.
마티스나 피카소, 드랭을 앞세운 서울의 야수파 전시장은 클래식 음악이 배경 음악으로 흐르고 있다. 음악가와 협업을 했던 각자의 이력을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들의 방향성과 가장 멀었던 쇼팽이나 차이콥스키 류의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한국인에게 인기 있는 잔잔한 연주곡이 흐른다는 점이다.
드랭이나 마티스가 1900년대 초 세상 사람의 눈에 띄고 의미를 획득했던 것은 새로운 강렬함 때문이었다. 20세기 초 서유럽의 예술 소비자들은 산업혁명이 불러온 전래 없는 풍요를 누릴 만큼 누렸다고 생각했던지 산업혁명 시기를 함께 했던 18~19세기 전반의 낭만파에 싫증을 내고 있었다. 대신 그들은 이전에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었던 강렬하고 원시적인 것에 끌렸다. 그때 미술계에 야수파가 있다면 음악은 스트라빈스키가 원시적인 강렬한 리듬으로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이번 전시를 주최한 기획사는 기획하는 전시회마다 배경음악을 강조해 틀어놓고 있다. 이번 전시에 굳이 ‘전시의 일부’로 음악을 틀었다면 스트라빈스키 등 20세기 초의 음악이 적당했을 것이다. 20세기 현대음악이 배경음으로 부담스러웠다면 야수파와 연결고리가 있고 인상파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드뷔시도 있다. 낭만파 시대와 단절을 선언했던 야수파의 작품을 소개하며 배경음악으로 낭만파를 배치한 것은 인지부조화다. 굳이 음악을 쓴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