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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과 일본의 현대미술 선구자, 곽인식 탄생 백주년 기념展
  • 1983      

전시명 : 탄생 100주년 기념 - 곽인식
장 소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기 간 : 2019.06.13-2019.09.15
글/ 김진녕

-물성탐구의 선구자 곽인식 ‘
-한국 작가와도 일본 활동 속에서도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교류

대공원역에서 국립현대미술관행 셔틀버스를 타고 내릴 경우 과천관 들머리 언덕배기에서 돌로 만든 기둥을 만나게 된다. 목욕탕 굴뚝 같기도 하고 서낭당같기도 한 이 작품은 곽인식의 <끝없는>(work86-endless)다. 1986년 곽인식의 구상을 한국계 일본 건축가인 이타미 준(伊丹潤. 본명 유동룡 庾東龍)이 설계도면을 만들어 뒷받침한 설치작품이다.

이 작품이 곽인식의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어쨌든 대다수 관람객이 스쳐지나가야만 하는 길목에 있는 작품이라 국현 과천 1층 로툰다홀에 설치된 백남준의 작품만큼이나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돌탑의 작가 곽인식의 <탄생 백주년 기념-곽인식>전(~9월15일)이 국현 과천에서 열리고 있다.

곽인식(郭仁植, 1919~1988).

백남준처럼 해외(일본)에서 활동했고, 시대를 앞서갔지만 21세기 초 한국에서 백남준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지는 못한 작가다.

하지만 물성의 탐구라는 점에서 일본에서 이우환이 주도해 1970년대에 절정기를 맞이했던 모노하 운동보다 그는 먼저 치고 나갔다. 1960년대 초반까지 앵포르멜에 몰렸던 국내 작가들이 1960년대부터 모노크롬 또는 단색화쪽으로 대거 방향을 틀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거기에 곽인식이 있었다. 이번 전시에는 1971년 박서보가, 1976년 김창열이 곽인식에게 보낸 편지도 전시되고 있다.

1937년 일본에 건너가 니혼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1942년 대구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194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미술계에서 활동한 곽인식이 국내에 ‘재소개’된 것은 1980년대 초반이지만 국내 작가들과 이미 충분히 교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 전시에 대해 “이번 전시는 곽인식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국내 및 일본에 소장된 작품과 자료를 모은 기념전이다. 그는 일본 미술에서 사물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기 이전부터 물성을 탐구한 시대를 앞서 간 작가였다. 그는 유리 놋쇠 종이 등 다양한 소재의 물성을 실험하는 작품을 제작했다. 1960년대 초기부터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소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점, 원이라는 기본적인 형상이었다. 이러한 물질에 대한 본질적 탐구와 조형 요소의 근원성은 이 시기 작가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곽인식이 이런 성과에도 일본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은 재일 한국인이라는 특수성이 한 몫했을 것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100여 점의 작품과 미공개 자료 100여 점이 출품된 이번 전시는 크게 현실 인식과 모색(1937년∼1950년대 말), 균열과 봉합(1960년대∼1975년), 사물에서 표면으로(1976∼1988년) 등 3개 섹션으로 구분돼 선보이고 있다.


첫 번째 섹션은 그의 자화상으로 추정되는 초기작인 <인물(남)>(1937), <모던걸>(1939), 1950년대초현실주에 관심을 보이던 그때 그의 취향을 볼 수 있는 <작품 1958>(1958) 등이 걸려있다.

물성 탐구에 나선 선구자의 면모는 두번째 섹션인 ‘균열과 봉합’에서 볼 수 있다.


물감을 활용한 평면 회화도 있지만, 캔버스에 물감칠한 바둑알을 붙이거나 깨진 유리병 조각을 사금파리처럼 반짝이게 붙여놓는다거나, 나무틀에 팽팽하게 잡아맨 일본 전통 종이에 압력을 가해 둥그런 형태의 미어진 자국을 남게한 아주 얇은 조각이자 종이라는 물성에 대한 탐구 시리즈, 유리판이나 거울에 균질하지 않은 힘을 가했을 때 생기는 균열 등 재료 자체의 성질(물성)을 응시하는 작업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이 섹션의 작품 수가 가장 많기도 했다.

세 번째 섹션에선 좀 더 규모가 커지고 유연해진 말년의 작품이 선보이고 있다.


자연석에 가까운 돌을 늘어놓거나 큰 나무 둥치를 토막내 먹을 입히거나, 전통 종이에 색 점을 찍어 번져나가는 양상을 뒤집어서 보여주기도 하는 등 그의 세계관 구현에 막힘이 없어진 말년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작가의 사후 방치됐던 작품 48점을 복원해 미술관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했다는 점이다. 또 50~60년대의 드로잉 작품과 자료 발굴 전시를 통해 일본 미술계와 한국 미술계에서 곽인식이라는 경계인이자 프론티어가 가졌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이기도 하다.


곽인식은 1919년 생이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이름을 남긴 작가 중 1919년 생은 곽인식말고도 김흥수(도쿄미술학교 졸업)와 이준(다이헤이요미술학교 졸업) 등이 있다. 1910~1920년대 식민지 시민으로 태어나 일본에 유학을 한 한국 근현대 화가는 무척 많다. 그 중 계속 일본에서 작가 생활을 지속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고 그곳에서도 인정받은 작가는 많지 않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선 일본 미술 평론가 미네무라 토시아키가 1976년 일본 미술전문지 <미술수첩>에 실었던 ‘곽인식 작가론’을 인용하고 있다. "1962년의 미술계의 전진은 곽인식 개인의 변모인 동시에 60년대 말 일본 미술의 변모를 에고하는, 은밀한, 그러나 중요한 사건으로 명기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글/ 김진녕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3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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