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문예 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
기 간 : 2019.6.28-2019.9.22
장 소 :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
약한 아버지 순조(1790-1834, 재위기간 1800-1834)의 대리청정을 하며 세도정치의 한가운데서 왕권 강화를 꿈꾸다 안타깝게 요절하고 만 조선 후기의 왕세자 효명(孝明, 1809-1830). 정조 이후 왕권이 약화되고 외척 세력이 성행하는 세도정치기, 난장판인 정치 싸움 안에서 홀로 분투했던 이미지의 그가 스물 한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가 남긴 문학적, 예술적인 흔적과 정치적 야심을 볼 수 있는 전시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효명세자는 23번째 조선의 왕 순조와 안동 김씨 집안인 순원왕후의 맏아들로 1809년 8월 9일에 태어났다. 3세 때 이름을 영(旲. 원래 발음은 ‘대’지만 ‘영’으로 부르도록 했다고)이라고 정하고(1812년 6월 2일), 곧 왕세자로 책봉되었다(7월 6일).
(웹소설을 드라마화 한 《구름이 그린 달빛》에서 박보검이 맡았던 역할 ‘이영’이 효명세자에서 모티브를 따 온 것이라고 한다.)
효명세자 관례(성년식)그림
왕비 소생의 원자는 숙종 이래 150년 만이었다. 정통성에 딴지를 걸 수 없었던 배경에다가 어릴 때부터 보인 문예적인 역량으로 한 몸에 왕실 안의 모든 기대를 받고 자라났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어릴 때 공부를 하기 싫어 도망갔다는 기록도 있다. 전시장의 글씨도 세자의 글씨라 귀하게 모셔져 있으나 천진한 아이의 글씨임을 감출 수는 없다.)
효명세자 글씨(1819)
효명세자가 11세에 쓴 글씨가 실려있는 익종대왕어필첩의 일부. 효명세자는 "어진 이는 장수한다[仁者壽]"는 공자의 가르침을 담은 글씨를 세자시강원(세자 교육담당관청) 소속 관원 박영원에게 하사했고 박영원은 이를 첩으로 만들어 보관했다.
순조의 장남이자 정조의 손자였던 효명세자는 사후 문조, 익종 등으로 불리도록 취존되었다.
(가장 긴 시호를 가지고 있어 조선의 어떤 역대 왕도 그보다는 짧다고 한다. 효명세자의 시호는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이다.)
효명세자의 문집, 학석집(한글본)
국립고궁박물관의 전시는 어린시절의 흔적, 문학적인 재능, 궁중음악과 무용, 궁궐 건축에 남긴 업적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탄생ㆍ책봉, 교육ㆍ입학, 관례ㆍ가례, 대리청정, 죽음의 시간 순으로 소개되고 있는 전시 중 미술 쪽에 포커스를 맞춘다면 그의 성균관 입학식 장면 그림이 포함된 입학도첩, 그가 부모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열었던 연회(진찬 등)와 관련된 의궤와 도병, 불에 타서 반만 남아 있는 그의 초상화, 그리고 동궐도 정도가 될 듯하다. 이중 고려대학교 소장 동궐도는 전시장에 직접 오지는 못하였고 영상으로 구성하여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500년의 왕조에 27명의 왕이 즉위했지만 그중 적장자, 장남이 보위를 이은 경우는 8명 뿐이다. 그러니 왕실 내에서 효명세자의 위상은 굳건하고 그 기대감도 컸을 것이다. 당연히 교육에도 많은 이들이 신경을 썼다. 《왕세자입학도첩》은 아홉 살이 되던 1817년 3월 11일에 그를 성균관에 입학시키면서 이를 기념해 제작한 궁중행사도이다. 《왕세자입학도첩》은 총 6점이 현존하는데, 국립중앙박물관, 고려대학교도서관, 규장각, 국립고궁박물관, 연세대, 경남대 데라우치문고 등이다. 도첩에는 창경궁 홍화문을 나서는 때부터 성균관에 도착하여 옷을 갈아입고 공자 등 성인들에게 예를 올리고 수업을 청하고 예물을 드리고 수업을 받고 축하인사를 받는 예의 과정이 <출궁도>, <작헌도>, <왕복도>, <수폐도>, <입학도>, <수하도> 의 6장면으로 묘사되어 있다.
《왕세자입학도첩》 중 <입학도>로, 왕세자가 명륜당에 올라 박사에게 수업을 받는 장면이다. 왕세자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 박사와 왕세자 앞에 강서가 펼쳐져 있다. 이 때 그의 스승인 박사는 남공철로 그의 아버지는 정조의 스승이기도 했다.
효명세자 초상화
불에 반쯤 타다 만 효명세자의 초상화(1826년 제작)는 그의 18살 때의 모습을 담은 예진(睿眞 왕세자 초상화)이다. 1954년 부산에 피난 갔던 국가의 보물들이 용두산 화재로 소실될 때 입은 이 피해로 그의 얼굴을 대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맞은 편에는 1830년에 제작된 순조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이 또한 화재로 얼굴이 소실되어 있다.
효명은 1827년 대리청정 직후에서 1830년 갑자기 사망하기까지 총 세 번의 연향을 주도 했는데 이중 기축년인 1829년에 열였던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의 사순과 즉위 3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기획한 연향이 기축진찬이다. 이를 그린 기축진찬도병은 총 17점이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중 일부가 전해지고 있으며 현전 병풍 모두 오른쪽부터 1폭에는 효명세자의 시에 신하들이 연이어서 지은 시[연구]를 적고 제2~4폭에 명정전 외친찬(왕과 신하들 중심)을, 제5~7폭은 자경전 내진찬(왕 왕비 중심의 가족 연회)을 표현하였으며 마지막 폭에는 신하들의 명단을 적었다. 화원 이수민 등이 그렸고, 이 전시에서 리움박물관 소장품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볼 수 있다.
1829년 궁중잔치를 그린 병풍.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기축진찬도 중 궁중 예악이 행해지는 모습
기축진찬도 중 내진찬 부분
기축진찬도 중 외진찬 부분
효명세자는 연향에 획기적인 시도를 했고, 음악, 무용을 포함하는 정재, 궁중 예악의 기준을 잡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다분하다. 밤잔치인 ‘야진찬(夜進饌)’을 처음 행하고, 23종의 정재에 대한 창작을 주도하며 독무(獨舞)를 처음 선보이는 등 조선후기 궁중 정재의 혁신을 이끌었다. 나라가 그다지 좋은 사정이 아님에도 불구, 부모님을 위한 연회를 이렇게 많이 연 것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 하에서라고 본다.
이밖에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동궐도》를 9m 폭의 대형 영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눈에 띈다. 실 작품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까우나 효명세자가 기거하던 곳과 창작 공간 등을 찾아볼 수 있도록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대리청정 3년 만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이 기간 동안 정치・문학・회화・건축・궁중잔치와 정재 분야에서 이룩한 효명세자의 업적은 할아버지 정조를 잇는 또 한 명의 뛰어난 문예군주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