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근대 미술가의 재발견 1 : 절필시대
장 소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기 간 : 2019.05.30-2019.09.15
글/ 김진녕
-식민, 대동아전쟁, 한국전쟁, 분단을 청년의 눈과 몸으로 통과한 세대
-‘자의반 타의반’으로 행방불명됐던 그들의 재발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근대 미술가의 재발견1:절필시대>란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장 대청에는 정종여가 근대의 새로운 기법으로 그린 의곡사 괘불(1938년)이 걸려있고 전시장 안쪽에는 고암 이응노의 딸 경인의 돌잔치(1949년)에 모여 앉은 이상범의 아들 이건영과 이석호, 김기창, 배정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돌상에 앉은 사람 중 정종여를 포함해 세 명은 한국전쟁 이후 북으로 갔다. 갈라지기 전 잊혀진 한국 화단의 풍경이다. 또 다른 전시장에 걸린 식물도감에 실린 정찬영 식물세밀화를 보면서 관람객들은 ‘1940년대에 이런 작업을 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고 중국 항커우의 뒷골목 풍경을 생활인이 시선으로 건져올린 임군홍의 도회적인 감각에 공감한다. 제목처럼 근대 미술가의 잊혀진 모습을 관객에게 재발견하게 해주는 전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예진.학예사를 통해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예진 학예사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2018년 부터다. 그는 2000년대 초반 고려대박물관에서 7년 동안 일하기도 했다. 관재 이도영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학예사로 일하고 강의를 하기도 했다.
-제목이 ‘근대 미술가의 재발견’이다.
이게 시리즈의 첫번째 전시라 ‘대중적으로 친근함’도 주요 선정 기준이었다. 그래서 일단 화가로 가자는 기준을 세웠고, ‘작가의 재발견’이라 ‘왜 잊혀졌을지’ 궁금해지는 작가, 관객에게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등 ‘재발견’의 다양한 이유를 만족시킬만한 작가를 우선적으로 골랐다.
이들이 우리 미술사에서 잊혀진 이유는 월북이나 절필, 요절, 혹은 몰이해, 앞서나간 태도 등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6명을 골랐다. 이들은 1940년대 화단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얐다.
이번 전시에서 ‘재발견’하는 화가들이 앞으로 발굴해야할 화가의 유형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번 전시가 6명의 개인전을 한장소에 모은 나열식 전시로 보인다면 재미없는 전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별 작가들이 나름대로 흐름을 갖출 수 있는 작가를 골랐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가는 문학(정종여)이나 건축(정규), 식물학(정찬영) 등 다른 분야와의 협업을 시도했던 작가라는 점도 고려가 됐다. 이런 여러가지 고려 끝에 6인을 골랐다.
-언제부터 만든 전시인가.
2017년부터 논의를 시작해 2018년 초 확정했다. 나는 2018년 8월27일 임용됐다. 그때부터 이 전시를 맡아서 본격적으로 작가 선정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50명 정도의 후보군이 있었다. 이 후보군을 놓고 국립현대미술관의 근대분과 학예직이 작가에 대한 논의를 4차례에 걸쳐서 한 뒤 전시작가를 확정했다. .
-6명으로 확정된 시기는 언제인가.
50명 중에서 10명을 추리고, 이중에서 최종적으로 6명을 확정한 게 2018년 10월께다. 10명은 너무 많고. 밀도감이 떨어진다. 작품 조사를 해보니, 작품이 너무 많아서 6명이면 되겠구나, 전시를 이렇게 구성을 할 수 있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전시 진행을 해보니 3~4명 정도로도 <근대 미술가의 재발견> 전시를 꾸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긴 작품이 적더라도 아카이브를 구성하면 되고, (알려진)작품이 없는 작가라도 찾으면 나온다.(웃음) 좀 더 진지하고 깊이있는 조명도 가능하고.
-선정 기준은.
선정 작업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 등장하는 대표작이 한 두 점이 있고, 그 작품 외에 다른 작품은 잘알려져 있지 않고, 작가의 생애도 잘알려지지 않는 작가군을 장르별로 분류하면서 시작했다. 이런 기준으로 추리기 시작했다.
첫번째 전시라, 전시가 가능한 작가, 소장품에서 질과 양을 확보할 수 있고 유족이나 소장자가 어느 정도 확인된, 작가가 남긴 작품의 3분의 2정도는 소재를 확인할 수 있어야 했다. .
<근대 미술가의 재발견>이 앞으로 이어지면 작품을 한 두 점만 남긴 작가도 전시가능하겠지만 이번이 첫 전시라 전시를 통해 좀 보여줄 수 있는 작가를 우선적으로 골랐다.
정찬영
-정찬영 작가는 남긴 작품이 적은데.
선정 기준에는 미술관(국립현대미술관)에서 조산 연구 활동을 통해 작품을 발굴하고 보존처리하고, 전시하고, 이런 미술관의 순기능을 잘보여주는 작가였으면 좋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정찬영 작가가 그런 케이스다.
2018년 <신여성전> 전시 뒤 유족과 계속 협의를 했다. 그의 대표작 두 점은 미술관에서 사들였고 나머지 초본과 식물도는 기증을 받았다. 정 작가와 관련한 중요한 자료는 기증을 통해 다 확보한 상태다. 그 자료를 먼저 보존 처리를 했고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에게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한독의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정 작가의 작품 다섯 점과 유족 기증자료가 추가돼 전시가 이뤄졌다. 미술관의 순기능을 보여줄 수 있는 케이스다.
백윤문, 추경산수도, 1939년, 비단에 수묵담채, 66x36.5cm, 유족소장
-백윤문은 동시대 다른 한국화 작가에 비해 밋밋해 보인다.
우리가 1930~40년대 화단을 살필 때 무엇인가 ‘혁신적인 태도’를 보인 작가만 우대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시대의 보편적인 것을 그린 화가에 대해서는 너무 무심한 게 아니었나 싶었다.
백윤문은 1930년대 후반에는 남성인물화를 그렸고 40년대까지 활동하면서 전통을 계승했지만 답습하지는 않았다. 그는 당대의 그림 소비자 안목과 당대의 새로운 회화 경향과 자신의 기질을 작품 속에서 융합했다.
1929~30년 무렵에는 김은호의 제자로서 화풍은 스승을 따랐지만, 30년대 후반부터는 전통적이지만 산수의 경물이나 인물 묘사 방법, 경물과 여백을 잡는 방법 등에서 고답적인 면을 벗어나 부드러운 변화를 주고 있다. 전통을 이어받데 생물처럼, 그 시대에 적응해가는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 하나하나를 보면 조선시대 회화같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 언뜻 이전 세대의 그림과비슷해 보이지만 바위를 묘사한 필선이나 풀잎 묘사에서 굉장히 부드럽고 유연하고 개성적인 필치가 보인다.
그는 당시 새롭게 들어온 근대회화의 기법도 수용했다. 1940년 전후해서는 이런 수용과 계승을 통해 자기만의 필선을 구사하는 게 보인다. 그렇게 한참 무르익던 시기에 백윤문은 병석에 누웠다(1942년 기억상실증 발병, 1977년 소생). 도약을 보여줄 수 있는 갈림길에서 쓰러진 경우다. 아쉬운 화가다. 1930년대까지 한국화의 전통이 여전히 쇠퇴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화격을 지닌 화가였다. 혁신을 보여준 화가 위주로 서술된 요즘의 미술사에서 백윤문은 새롭게 쳐다보고 평가해야할 화가라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정찬영이나 백윤문, 정종여는 근대화단에서 한국화 1.5세대로 분류할 수 있다. 이영일의 제자가 정찬영이고, 김은호의 제자가 백윤문, 이상범의 제자가 정종여다. 동연사(1923년)를 결성했던 변관식이나 이상범, 이용우, 노수현보다 약간 뒤다. 그래서 그들의 활동이 1세대에 가려진 면도 없지 않다.)
- 작품은 주로 어디서 발굴했나. .
개인 소장가에게서 빌린 것도 있고, 이규상처럼 뜻밖의 곳(이규상이 재직한 경복고 동창회)에서 보관해온 교내 발행물로 아카이브를 꾸미기도 했다. 이규상 작가는 대여를 통해서라도 작품을 좀 더 모으고 싶었고 일본으로 건너간 유족도 찾고 싶었는데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해 아쉬웠다.
이규상 작품 소장처는 알려진 곳 중 세 곳의 소장품이 못나온 게 아쉽다. 그는 50년대 후반~60년대 초반 작품만 남아있다. 다만 잡지 같은 경우는 50년대 중반부터 일러스트가 존재한다. 이게 단편적인 자료이긴 하나, 이 작가의 세계관의 변화를 볼 수 있는 단서는 제공한다. 신문에 소개됐던 도판류는 이번엔 아쉽지만 찾지못해 발굴의 여지로 남겨놨다.
백윤문, 건곤일척 ,1939, 면에 채색, 150x165cm, 온양민속박물관
-이규상이나 백윤문 섹션은 다른 작가의 전시 작품에 비해 수가 적다.
두 분은 작품이 적어 전시가 가능할 것인가를 놓고 내부적으로 계속 논의했다. 미룰까 고민도 했지만 이규상 작가와 관련된 조사를 진행하다가 이번에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전시가 작품을 소개하는 것도 있지만, 이번 전시는 관련된 사람의 ‘기억을 수집하는 것’도 중요하구나,라는 점을 깨달았다. 이규상 작가는 아직 생애 자체가 정리가 안돼 있다. 1962년에 그의 부인과 가족이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다. 63년부터 그의 건강이 악화됐고 67년에 작고했다. .그에 관한 기존의 기록물은 단편적인 연구 논문이 한 두 편 있는 정도다.
이규상
이규상이 미술교사로 재직했던 경복고 시절의 제자 인터뷰도 이제 제자들이 너무 나이들어 인터뷰 진행이 거의 불가능했다. ‘이규상에 관한 기억’을 수집하는 것도 힘들었다. 이번 전시 준비 중에 이규상의 직계 자손은 아니지만 방계 후손을 통해 그의 제적등본, 출생지, 결혼 연도, 일본인 부인이 있었고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었고, 한국인 부인 사이에 아들 하나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정도의 확인도 지금 아니면 힘들었을 것이다.
그가 신사실파 전시에 2회까지 참여하는데 3회는 참여를 안했다. 그럼 그는 부산에 갔을까, 안갔을까? 경복중 제자를 통해서, 부산 피난 시절 이규상 선생이 같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의 제자나 후배화가, 홍대에 계시는 제자 등 이런 분의 구술도 일부 확보했다. 이규상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이들이 세상을 뜨긴 전에, 그들이 나이가 들면서 기억을 놓치기 전에, 증언과 기억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이번에 일부 확보했다.
정종여, 진주 의곡사 괘불도,1938, 면에 채색, 652x355cm, 진주 의곡사
-정종여 작가는 상대적으로 작품이 버라이어티했다.
이번 전시에서 정종여의 작품 중 정말 좋은 것을 모아서 보여주고 싶어 노력했다. 해금 이후 1989년에 신세계미술관에서 전시를 했음에도 그 사이 흩어진 작품을 찾기 어려웠다. 청계기념사업회는 청계의 장손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유족이 그의 작품을 많이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작품 관련 자료나 사진 자료는 잘 보존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정종여가 북한에서 활동한 내용 중 일부는 아카이브로 제시했다. 그는 북에서도 인민예술가나 공훈예술가 호칭을 얻은 화가였다. 북한에서 그린 그림에서 정종여 특유의 웅혼함이나 여전한 필력이 느껴지는 그림도 있지만, 이른바 조선화풍으로 그린 그림에선 북한식 ‘습’에 빠진 그림도 있는 것 같다. 그가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그렸을까,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현재 북한에서 흘러나왔다는 그의 작품은 제한적이고 진위도 알 수 없다. 정종여를 편견없이, 제한없이,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는 아직 요원하다고 생각한다. 조만간 정종여의 북한 활동까지 포함하는 전시를, 담담하게 볼 수 있는 시대를 기다리고 있다.
임군홍, 가족, 1950, 캔버스에 유채, 94x126cm, 유족 소장
-임군홍(1912~1972)은 어떤 면이 보여지길 원했나.
임군홍은 작품이 많이 소개됐지만 표피적으로만 알려진 작가다. 그의 행적이나 그가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규명이 안돼 있다. 하지만 그가 구사하는 색채와 이채로운 소재는 요즘 시대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가 중국에서 그린 그림은 동시대 조선 화단에서 활동한 화가에게선 보기 힘든 새로운 그림이다.
조선이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그는 중국이란 외지에 있으면서 자유로운 시야로 작품활동을 했다.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고, 무대미술이나 간판, 표지 디자인 등의 상업미술을 한 화가다. 그때만 해도 한반도에서는 상업미술이 미분화 상태였다. 그런 점에서 그는 새로운 화가상을 보여준 사례다.
또 하나는, 1930년~40년대 초는 일본에서 조선과 만주에 대한 관광붐이 일던 시기였다. 이국적인 풍경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관광 붐이 일었고, 임군홍은 그런 붐을 향유한 작가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가 남긴 자료를 보면 그는 중국에서 성공한 사업가이자 철도를 이용해 중국을 여행한 사람이다. 철도를 이용해 한반도부터 중국까지 관광지를 찾아가 사진도 찍고 그림도 그렸다.
주로 베이징의 자금성이나 이화원 북해공원 천단 등 당시의 유명 관광 코스를 그림으로 남겼다.
그 시기에 일본 화가들도 이런 관광 명소를 그림에 담았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어도 그는 그림으로 남겼다. 그의 항커우 그림은 그가 생활 속에서 체험한 공간을 그림으로 구현했다. 신문지에 그린 문둥병에 걸린 중국 걸인 그림은 즉흥적인 질료 선택이나 생활 공간에서 얻어낸 체험을 그림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현대적이다.
정규, 오양빌딩 세라믹벽화, 1964년(1962년 김수근 설계), 명이식 촬영
-정규(1923~71)는 어떤 점에 주안점을 뒀나.
정규는 한국에 현대 판화가의 무대, 도예가의 무대를 만든 공로가 있지만 그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애초에는 그의 도자기 작업이 너무 흥미로웠다. 도예가로서 정규를 조명하고 싶었다.
그는 1961년 부터 작고할 때까지 도자기에만 매진했다. 흥미롭게도 도자기 작품은 많지 않다. ‘많이 했는데, 남아있는 게 없고 작품의 일관성도 없었다’는 점은 미스테리다. 도자기 하는 분들 인터뷰를 하고, 당시 신문 기사를 참조해 연보 정리를 하면서 그가 이땅에 현대 도자기가 없던 시기에, 도자기를 재건하는 일, 더 나아가 이를 현대공예로 발전시키는 데 매진한 화가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나라가 도자기가 엄청 발전됐던 나라여서 도자기 기술은 그대로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다 파괴됐다. 근대기에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많은 도자기는 일본인 취향에 맞춘 재현 도자기였다. 그러니 현대도자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정규는 이런 상황에서 현대 도자기를 시도한 것이다.
1954년 그가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조형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할 때, 김재원 박사가 관장이었고, 학예실장이 최순우였다. 그때 김재원 관장의 주선으로 정규가 록펠러의 후원으로 유광렬과 정규가 미국에 유학해서 1년간 세라믹 공부를 했다.
도자기 기술을 복원해서 수출하는 외화벌이를 기획한 것 같다. 유학에서 돌아와서는 전통 가마 장인에게 배우고, 전형필의 집에서 가마를 만들어서, 전통 기술을 복원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게, 결론적으로 성공은 못했다.
기본적으로 가마를 만들고, 물레를 돌려 도자기를 빚는 게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 정규는 도공의 작품에 그림을 그리거나 새로운 유약을 만들거나 하는 정도였다. 정규가 남긴 도자 작품이 제각각인 이유가 그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는 두 점을 소개했다. 한 점은 백자 표면에 그린 그림이고, 또 한 점은 이경성이 소장하다 노경조 교수에게 넘긴 흑유 세트다. 단순한 형태에 여러 유약을 테스트한 작품이다.
1963년 경희대 요업공예가가 생겼을 때 그는 초대학장이 됐다. 제자를 데리고 전통 가마를 답사하며 파편을 수집하고 공부하며 제자를 길러냈다. 그 시기에 작업을 확장하면서 김수근 건축물에 세락믹 부조 작업을 했다.(명동 오양빌딩과 남산 자유센터의 부조 등)
그의 행보를 보면 1953년에 첫번째 서양화 전시를 했고, 1958년에 첫번째 목판화 전시, 1961년에 도자기 전시회를 가졌다. 그의 관심사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도예가로서 완성된 작품을 만들기 보다는 도자의 기반 마련에 더 매진했다고 볼 수 있다. .
1971년에 <공간> 잡지에 그는 ‘한국공예운동서설’이란 글을 썼다. 국가적인 틀에서 문화계를 바라봤던 작가라고 볼 수 있다.
순수한 조형세계로 작업을 시작을 했지만 관심이 판화로, 도자기로 넓어지면서, 교육적인 관점에서, 계몽적인 시도를 했다. 일종의 소명의식 같은 면이 있다. 정규는 전통에서 자신의 작업을 끄집어낸 작가다. 판화도 도자도 다 전통에서 끄집어냈다. 도자기 작업을 하면서 그걸 건축물로도 확장시켰다.
순수미술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확장시킨 화가라는 점을 이번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현대미술의 개척자라면 조형적인 성취, 현대적인 조형어법을 성취한 작가라고 규정할 수 있다. 정규는 미술의 현대화라는 것이, 미술의 양식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 미술의 환경과 화가의 활동영역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인식하고 한국 미술의 현대화를 이루려고 노력한 작가다.
-전시 세팅을 하면서 신경쓴 부분은 어떤 것인가.
작가가 낯설기 때문에 거리감을 좁히는 것을 목표로 했다. 처음 들어갔을 때 한 두 번은 봤었을만한 작품을 앞에 걸어놨다.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작가는 기본적으로 논문이나 자료가 부족하고, 체계적인 연구가 안돼 있어서 1차 사료에 의존해 전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시 준비를 하면서 ‘기억을 수집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인터뷰를 많이 진행했다. 전시장에 영상을 활용해서 인터뷰에서 느낀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드러날 수 있도록 세팅했다.
관람객이 전시가 어렵거나 낯설지 않게 느껴지도록 전시장을 꾸몇는데 그게 성공적으로 보여졌는지는 모르겠다.
-관객반응은 어떤가
일단 도슨트에게서 관객 반응을 전해듣고 있다.
전해준 말에는 월북 작가에 대해선 이력에 대한 논란은 없다고 하더라. 작품에 주목하고 작품이 의외로 좋다는 관객이 많다고 하더라. 작품에 대한 주목보다 ‘딱지’가 먼저 붙는 상황은 원하지 않았기에 일단 안심은 됐다.
덕수궁에 오는 관람객 중 은퇴 뒤의 노년층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인데 이 분들이 정찬영의 식물세밀화나 자료 전시물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도 특이한 케이스다.
-관람객에게 바라는 것은?
편견없이 봐줬으면 한다.
정찬영 그림에 대해 ‘그 시대의 일본화풍 그림 아닌가’란 선입관이 있고, 백윤문도 그 시대에 저’런 구태의연한 그림이라니’, 정종여도 ‘월북한 친일 작가’란 식의 선입견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정찬영은 실제 현장에서 작품을 사생한 뒤 일본화가 못지않게 기술적으로 뛰어낙 격조 높은 작품을 완성했다. 정종여는 일본화의 성과를 일부 수용한 뒤 전통화와 서양화를 융합해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백윤문도 전통 회화를 그렸지만 자기 식으로 나무를 그리고 바위를 그리며 자신의 길을 모색해나갔다. 편견없이 봐달라.
그 시대에 전람회를 통해서만 존재를 알릴 수 있었던 화가들의 여건을 그 시대 기준으로 봐달라.
지금은 예술이 개인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것을 예술로 보지만 근대기의 전통화가는 작품의 수요층이 명확히 있었고, 전람회를 통해야만 이름을 알리고 그 수요층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람회 형식을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서 유학을 다녀오고 낭만적인 정취를 한껏 취할 수 있었던 화가 외에는, 그 시대 한국화가는 현실적인 제약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근대 미술가의 재발견1-절필시대>다. 전시에 등장한 6인은 태어나 보니 식민지 2등 시민이었고 식민 통치 속에서 말은 조선어로 하고 글은 일본어로 쓰는 경계인이었고 해방되자마자 한국전쟁이란 참극과 가난에 휘말려 선택을 강요당했다. ‘절필시대’란 부제목은 이들이 그런 시대를 통과하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작가 경력에 곡절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들이 한국 화단에서 사라진 이유는 다 제각각이다. 하나로 묶을 수 없다. 그들이 사라지거나 붓을 꺽을 수 밖에 없었던, 또는 퇴장당해야만 했던 모습을 찬찬히 보는 것은 그 시대를 다시 읽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