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우석 최규명 탄생 100주년 서예전각 특별전
전시기간: 2019.6.7 - 6.30
전시장소: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전시장 모습
어느 회장님이 서예를 배워보려고 유명 서예가를 불러 지도를 받은 적이 있다. 여러 해가 지났으나 회장님 글씨는 원래의 펜글씨체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이 송구스러워했으나 회장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쓰고 싶은 것을 쓰면 된다’고 했다. 나중에 이 회장님이 쓴 ‘사업보국’ ‘인재제일’같은 글씨가 세상에 나돌았을 때 어느 누구도 이를 보고 ‘잘 썼다’ ‘못 썼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 사람 같다고만 했다.
<自主平和親善(자주평화친선)>이 보이는 전시장 모습
이것이 서예에서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이다. 하지만 요즘 이 이야기가 액면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마치 음악에서 곡(曲) 해석을 중시하기보다 악보 틀린 곳이 없는가에 더 치중하는 것처럼 글자와 획 그리고 전통에 매달려 따지는 풍토가 거꾸로 더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山水(산수)> 종이에 먹 63x125cm
이를 고려하면 우석 최규명(又石 崔圭明 1919-1999) 100주년 회고전은 이제까지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전시 가운데 가장 돌출한 전시라고 할 만하다. 획, 결구 그리고 법통을 내세우는 서단과는 가장 먼 거리에 있던 서예인을 초대한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글씨를 쓰면서 서단의 전성시대에조차 한 번도 그쪽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철저한 아싸였다. 행동만 아싸인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아싸를 자처했다.
그렇다고 노래와 율동에 어긋나게 마구 박자를 빼먹거나 도레미의 도를 미로 마구 부른 것 같은 글씨는 아니다. 크게 보아 갑골에서 시작돼 한예(漢隸)를 거쳐 진서(晉書), 당서(唐書), 송서(宋書)로 이어지는 글씨의 기본 틀은 그 안에 다 있다. 보기에 거칠고 헝클어져 보이는 것은 박자와 음정에 억매이기보다 글씨에 감정, 기분, 느낌을 진솔하게 담고자 한 마음이 더 앞섰다고 말할 수 있다.
<人生在勤(인생재근)> 종이에 먹 63x125cm
그는 사업가이면서 서예가였다. 그런 점에서 예가(隸家)출신의 서예가라고 할 수 있다. 예가란 조맹부가 사대부 그림을 가리킬 때 ‘예가 그림’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즉 문인적 태도와 정신에서 바탕을 둔 비전문가란 말이다. 개성이 고향인 그는 남하해 일찍부터 여러 사업에 관여했다. 그리고 많은 일들을 궤도에 올려놓았다. 이런 사업을 하면서도 그는 군자의 비즈니스를 펴고자 했다. 이는 집안 내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그의 부친은 정인보, 변영로 선생 등과 함께 공부한 엄격한 한학자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나라나 민족을 위하는 일을 하고자 해 했다. 젊은 시절에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고미술을 일반에 알리는 계몽지와 같은 고미술 신문(『고미술 신보』)도 경영하기도 했다.(이 신문은 덕수궁 담장을 철책으로 바꾼 것을 비판한 기사 등이 이유가 돼 폐간됐다)
<千里之行始於足下(천리지행시어족하)> 종이에 먹 64x126cm
이러는 사이에 독학으로 붓을 잡았다. 글씨는 가학(家學)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고 또 젊은 시절 한국문화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됐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해방 한국에서 서예의 새로운 갈 길에 대해 고민하면서 50년대 한때는 소전 손재형, 일중 김충현, 여초 김응현 등과 함께 한국서예연구원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이런 연구 자세는 60살이 넘어도 계속돼 이 무렵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자 일본까지 가서 현대 서예의 최전선, 즉 아방가르드 서예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몸소 체험하기도 했다.
<복> 1997년 종이에 먹 123x34cm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는 서(書)란 형태를 통한 소통 즉 그 인간의 생각이자 개성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면서 전통 서예가 추구하는 우아하며 균형 잡히고 절제된 고전적 미의 세계와 결별을 선언했다. 대신 글자가 가리키는 사물의 뜻과 그 의미의 본질을 그리고 그를 통해 전달되는 감정과 사상 사이에서 공통분모를 찾고는 노력을 추구했다. 획의 해체와 재결합, 필획의 운동, 속도, 감정 등의 실험적 노력은 세 가지 방향의 테마에서 반복됐다. 하나는 수신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기원한 내용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민족과 통일에 관한 것이었다.
<祝(축)>종이에 먹 64x126cm
수신에 관한 수련에서는 ‘삶은 근면함에 달려있다’는 <人生在勤(인생재근)>이나 ‘근면함은 값이 없는 보배’라는 <勤無價寶(근무가보)> 그리고 ‘천리 길도 한 발자국부터’라는 <千里之行始於足下(천리지행시어족하)> 등의 경구를 많이 찾아 썼다. 남의 행복을 비는 글은 축(祝) 자와 복(福) 자를 주로 썼다. 남의 행복을 빌어주는 글자가 어떤 형태를 띠면 그 뜻과 마음이 100% 전달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은 그의 글쓰기의 핵심이라고 할만하다. 그래서 여기에도 남이 보기에 획을 부수고 꺾고 짓뭉갠 것 같은 글자들이 다수 보인다.
<統一(통일)> 종이에 먹 63x125cm
통일과 민족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다. 실향민에게 있어 민족과 통일은 지상 최고의 절실한 명제다. 30살 때 젊은 사업가이었을 때 그는 김구, 김규식 선생을 모시고 남북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평양에 간 경력이 있다. 또 한 때는 바른말을 한다고 해서 긴급조치위반이란 죄명도 뒤집어썼다.
<高麗(고려)> 나무에 아크릴 243x188cm
그의 글씨에는 이 같은 경력이 녹아들어 그가 살았던 시대 어느 서예가도 정면으로 다룬 바 없는 이른바 사회적 목소리, 즉 민족과 통일을 정면에서 쓴 게 많다. 대자의 서체로 반복해서 <통일> <백두산한라산> <금강산> <반핵> 등의 글귀를 거칠고 빠르게 보인다. 통일과 같은 정치사회적 이념과 생각이 글로 표현될 때 그 형식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 실험이다. 그의 글에 보이는 속도와 힘 그리고 자연발생적 비백과 먹의 비산(飛散)은 붓으로 그려낸 그의 심정이자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虎(호)>와 전각들
이런 지향성은 재료의 제한을 허물기도 했는데 나무판에 먹 대신 아크릴로 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넓적한 페인트 붓에 아크릴 물감을 묻혀 <高麗(고려)>라고 쓴 작품은 영문자인 ‘korea’까지 곁들여 있어 超아방가르드적 인상을 준다. 하지만 뜯어서 보면 거기에는 갑골문의 상형(象形)과 회의(會意)가 다 들어있다.
인장 <破邪顯正(파사현정)> 9x9x11cm
그는 한때 서예의 최전선에 몸을 부딪친다는 심정으로 전위 서예를 자처하기도 했지만 온 세상 도처가 전위 아닌 것이 없어 보이는 요즘 달리 말을 붙이자면 그가 평생 추구한 서란 개성적인 심획(心劃)을 최전방까지 밀어붙여 심서(心書)의 세계를 펼쳐 보인 지점에 있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