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한국화의 두 거장 靑田•小亭
장 소 : 갤러리현대, 현대화랑
기 간 : 2019.04.10-06.16
글/ 김진녕
근대 한국화를 대표하는 작가 청전 이상범(1897∼1972)과 소정 변관식(1899∼1976)의 작품 80여 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갤러리현대의 기획 전시 <한국화의 두 거장-청전(靑田)•소정(小亭)>(~6월16일)은 이들의 1930년대부터 70년대까지의 작품을 모아서 선보이고 있다.
전시는 현대화랑에 청전의 작품을, 갤러리현대에 소정의 작품을 배정하고 그 사이에 있는 두가헌1,2층에 청전과 소정의 소품을 볼 수 있도록 했다.
현대화랑 1층은 청전의 1950, 60년대 대표작이, 2층은 1940년대 작품이 주를 이룬다. 2층의 ‘효천귀로’는 일반에 처음 공개하는 작품이다. 갤러리현대 1층과 2층은 소정의 1960년대 작품을, 지하 1층은 1970년대 작품을 전시한다. 이런 구성에서 보듯 상대적으로 청전은 40~50년대 작품이 많이 나왔고, 소정은 60년대의 작품이 많이 나왔다.
처음 공개된 청전 이상범의 <효천귀로>(1945) 129x256cm
전통 한국화라고 하면 먼 산이 겹쳐져 있고, 산 중턱의 정자에는 유한 계급의 중년 남자가 시동을 옆에 거느리고 물을 굽어보며 음풍농월을 하는 장면을 연상할 수도 있다. 여기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두 작가의 작품을 모아놓고 보면 화원 화가였던 심전 안중식에게 배우고 일제 강점기에 일본화의 영향과 원근법과 실경에 기초한 사경산수화라는 근대의 세례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는 두 대가의 세계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랐다는 게 한 눈에 보인다.
그들이 한국 땅에서 동시대에 공존했지만 조국의 산하를 묘사하는 방식은 각자의 퍼스낼리티만큼이나 달라 보인다.
청전은 물을 그릴 때 경사가 얕은 땅을 통과하는 냇물이 잔잔히 일렁거리는 물을 묘사한다. 반면 소정은 물이 있는 공간을 빈공간으로 놔둘지언정 화면에 물에 대해 구체적인 묘사를 할 때는 수직으로 낙하하며 흰포말을 일으키며 쏟아지는 에너지 넘치는 순간을 표현한다.
산수 풍경을 묘사할 때도 청전과 소정은 다르다.
1960년대는 청전과 소정은 모두 말년에 해당한다. 청전은 1968년 작 <고원무림>(76.5x192.5cm)에서 가로로 긴 공간에 덤불과 듬성듬성 키 큰 활엽수를 배치했다. 숫제 산도 등장하지 않는 화면에서 약간의 등고차는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잔잔한 냇물의 흐름과 화면 오른쪽 중간에 배치된 촌부와 소, 오른쪽으로 갈수록 키가 작아지는 원경의 나무 실루엣을 통해 얕으막한 야산의 높이와 경사를 짐작할 뿐이다.
반면 소정은 1969년 <내금강 단발령>(42x126cm)의 화면이 가로로 긴 화면 임에도 근경과 중경, 원경의 첩첩산중을 적묵과 윤곽선, 묵점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펼쳐내고 있다.
두 사람이 보는 눈은 금강산 보덕암을 그린 작품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드러난다.
내금강의 보덕암은 표훈사 말사로 깍아지른 절벽 위에 있는 자연굴에 불상을 모시고 그 앞에 구리로 기둥을 세운 뒤 절집을 매달아놓았다. 적어도 고려시대까지 역사가 올라가는 오래된 절이다. 고려시대 말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보덕암을 이렇게 노래했다.
보덕굴 普德窟
陰風生巖谷(음풍생암곡)
溪水深更綠(계수심갱록)
倚杖望層巓(의장망층전)
飛簷駕雲木(비첨가운목)
서늘한 바람은 바위틈에서 나오고
계곡 물은 깊어서 더욱 푸르네
지팡이를 의지해 절벽 위를 바라보니
날아가는 처마가 구름나무를 탔네
이제현은 구리기둥에 의지해 아찔한 절벽에 매달려있는 보덕암에서 바라본 수직의 절경을 층층이 쌓인 절벽, 날아가는 처마와 구름나무라는 말로 드라마틱하게 구현했다.
금강산 그림을 열심히 그렸던 청전과 소정이 보덕암을 안그렸을리 없다.
변관식 <내금강보덕굴>(1960) 삼성미술관 리움
이상범 <보덕굴>(1940년대) 고려대박물관
이번 전시에는 소정이 그린 <내금강 보덕굴>(1960, 120.5x264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이 나와있다. 소정이 형상화한 보덕암은 세가지 시점을 결합시켜 이제현의 시를 단박에 떠오르게 할만큼 드라마틱하다.
아찔한 절벽에서 위를 쳐다보면 수직으로 상승하는 처마가 있고, 그 위에 소나무가 있고 그 위에 다시 수직으로 상승하는 연봉이 켜켜이 쌓아올려져 있다.
반면 이상범의 보덕암은 얌전하다. 아쉽게도 이번 전시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고려대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는 이상범의 <보덕굴>(1940년대, 36x80cm)은 정면에서 수평으로 바라본 보덕암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청전의 보덕굴이 40년대 작품이고, 소정의 보덕굴이 1960년 작품이라는 차이점은 있지만 두 사람의 성격이나 그들이 구축한 각자의 세계가 많이 다르다는 것이 <보덕굴>이란 같은 소재, 같은 제목의 작품에서 한눈에 드러나는 것이다.
나잇대도 비슷하고, 같은 스승에게서 배우고, 젊은 시절 선전 입상 경력도 비슷했고, 20대 시절 동연사(1923)에서 함께 동인으로 활동했던 두 사람이 이후 어떤 행보를 걸었길래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아쉽게도 이번 전시에 청전의 40년대 작품은 몇 점 나왔지만 소정은 <수촌>(1934년작)과 <설경>(1943년작) 등 두 점 정도만 나왔다.
소정 변관식 <수촌>(1934)
변관식 <설경>(1943)
기록을 보면 청전과 소정의 경묵당에서 20대 이후의 삶은 대조적이다.
이상범은 1922년부터 34년까지 13년 동안 한해도 빠지지 않고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특선과 입선을 반복해 이름을 날렸다. 선전에서 8회 연속 특선 수상과 최고상인 이왕가상을 받은 것은 동시대 다른 화가들보다 특출난 이력이다. 1927년 동아일보에 미술기자로 입사한 이상범은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에 연루돼 경찰에 잡혀갔다. 40일간 경찰서에 잡혀간 뒤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청전화숙 운영과 창작에 열중했다.
그때는 ‘반정부 활동’이었을 일장기 말소 사건은 그의 사회 생활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듯 하다.
1938년 동아일보는 1월1일자 1면에 새해 축하그림으로 이상범의 <산지음山之陰,>을 실을 정도였다. 이후 그는 본격적인 친일 행렬에 가담했다.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에 가담해 ‘화필보국’을 위해 국방헌금 모금 전시에 참가하고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는 <나팔수>를 그렸다. 해방 뒤에는 우익단체인 조선미술협회에 가담했고, 1949년 한국 화단의 양대 축으로 자리잡은 홍익대 교수로 자리잡는 등 는 등 시대마다 대세에 순응하며 그 맨 앞에 서서 순탄한 길을 걸었다.
변관식 <계정추림도>(1923) 국립중앙박물관 이홍근 기증품
소정은 서화가 소림 조석진의 외손자로 출생 환경을 따지면 이상범보다 유복한 편이고 신식 미술교육도 받았다.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공업전습소 도기과를 나온 것. 이후 서화미술회에서 동양화를 공부했다. 1923년작 <계정추림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보면 50년대 이후 소정이 보여주는 세계와 거리가 멀고 안중식의 산수화처럼 세밀한 필선 위주의 산수화다. 그뒤 소정은 일본 유학(1925~27)을 통해 고무로 스이운의 세계를 접하고 서양화 기법을 수용한 일본화를 배웠지만 그림에서 왜색이 도드라지지 않았다.
1922년부터 29년까지 일본 유학 시절을 포함해 선전에서 8회 연속 입선했지만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인 1930년대에는 출품을 안했다. 소정은 1937년부터 전국을 유람하며 실경산수를 그리기 시작해 8년 간 금강산에 살다시피했다고 한다. 그때의 실경 스케치는 1960년대 금강산 그림으로 폭발했다. 1960년대 금강산 그림을 통해 소정은 묵을 쌓아올려 면을 만들고 묵점을 통해 선을 깨트려 다이나믹한 화면을 구사하는 특유의 소정 산수화 세계를 완성했다. 외부의 변화를 받아들인 뒤 아류로 그친 게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 소정 스타일을 만든 것이다.
1940년대에 두 사람은 모두 마흔 줄에 들어선 나이였다. 40대는 작가로 치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할 시기였다. 그 시기에 청전은 제도권에서, 소정은 제도권 바깥에서 잠행을 거듭하며 각자 스승의 세계를 벗어나 근대 한국화의 세계를 구축했다. 대한제국의 백성으로 태어나 식민지 조센징을 거쳐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세상을 뜬 두 작가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급변 상황에서 살아남고 성장했다.
이상범 <추경> (1940년대)
그 증거가 이번 전시장에 모여 있는 것이다. 청전의 1940년대 작 <추경>을 보면 낙랑장송이나 기암절벽 대신 펑퍼짐한 조선의 산야와 덤불이 추상화의 색면을 연상시킨다. 소정의 <설경>(1943년작)은 갈필과 적묵, 묵점으로 이뤄지는 소정 스타일의 완성이 멀지 않음을 예감하게 만든다.
아쉬운 점은, 두 작가가 각자의 스타일을 완성하기 이전인 1920~40년대의 작품이 전시장에 좀 더 나왔다면 청년 이상범과 변관식의 고민이 좀 더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