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근대 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기 간 : 2019.04.16-2019.06.02
글/김진녕
-조선 왕조의 어진 화사, 도화서 화원, 관비 유학생, 제도사, 식민지 서화협회 회장으로 산 안중식
-왕조의 멸망과 식민지의 현실 속에서 근대의 새벽을 물고 들어오다
안중식(1861~1919)은 조선시대의 마지막 도화서 화원으로 불린다. 올해는 그가 세상을 떠난지 100년이 되는 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안중식 100주기를 기념해 <근대 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전(~6월2일)을 열었다.
1.
전시는 안중식을 기둥으로 삼아 그가 살았던 시간을 축으로 연대기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때문에안중식이 어떤 시대를 살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1881년 안중식은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청나라에 파견한 영선사의 일행으로 뽑혀 텐진에서 1년동안 공부하고 왔다.. 영선사는 김윤식이 이끌었고 조석진과 안중식은 제도사(製圖士) 공부를 했다. 조선왕실이 영선사를 파견한 이유는 신식 무기의 제조법과 조련법을 배우기 위한 것으로 안중식의 일은 일종의 설계도면을 그리는 엔지니어였다.
사실 조선 왕실은 1881년 5월 일본에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을 보냈고, 11월에 청나라로 영선사를 보내는 등 근대문물의 수용을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1882년 7월 해고된 구식군대 군인이 난을 일으키면서(임오군란) 모두 중단됐고, 영선사 일행은 일정을 당겨 모두 귀국했다.
사실 조선 왕실은 1881년 5월 일본에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을 보냈고, 11월에 청나라로 영선사를 보내는 등 근대문물의 수용을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1882년 7월 해고된 구식군대 군인이 난을 일으키면서(임오군란) 모두 중단됐고, 영선사 일행은 일정을 당겨 모두 귀국했다.
안중식은 이후 도화서의 다른 일도 했지만 화사로서 경력을 착실히 밟아 나갔다.
1891년과 1899년에도 상하이를 방문해 청나라의 최신 화풍을 배워갔고, 1900년 일본을 방문했다. 이 정도면 당시 조선인 중에는 해외 문물 동향에 상당히 밝았다고 볼 수 있다. 안중식의 이런 선진문물 흡수 노력은 1910년대에 안중식이 그린 일련의 <도원도>에 영향을 미친다. 근대미술 연구자 최경현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안중식이 1918년에 그린 <무릉도원도>는 해상화파의 오경운(1845~1916)이 1887년에 그린 <도원도>와 비교하면 배경의 산수 표현은 다르지만 동굴 안의 모습이나 배를 탄 어부가 동굴로 향하는 장면에서 공톰점을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상하이에서 화보 출판업의 성행을 배경으로 소훈(1852~1917)이 <개자원화전>의 밑그림을 다시 그린 <소훈본 개자원화전> 제1집 산수편이 1888년 석판본으로 발간될 때 추가된 <증광명가화보>에 포함된 것이다.”
1901년 3월 일본에서 귀국한 안중식은 개인 스튜디오인 경묵당을 열고 첫 제자로 이도영(1884~1933)을 받아들였다.
1902년 대한제국 황실은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도사도감을 설치하고 채용신과 조석진, 안중식을 불러들여 태조의 초상 모사와 고종의 초상화 제작 업무를 맡겼다. 왕의 초상 담당이라는 것은 당대 화가의 최대 명예였다. 이른바 어진 화사. 안중식은 그 공으로 통진 군수에 임명됐고, 1907년 양천군수를 끝으로 관직 생활을 끝냈다.
그사이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은 사실상 식물인간 상태로 전락했고, 안중식은 1906년 ‘국민계몽과 식산증진, 부국강병’을 기치로 설립된 대한자강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안중식의 첫제자인 이도영도 스승을 따라 대한자강회 간사로 활동했고, 이도영은 뒷날 한성순보 기자 출신인 오세창이 주도한 <대한민보>에 풍자화를 다수 싣기도 했다.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 500년 역사의 마침표를 찍었다. 안중식은 1911년 ‘이왕가(李王家)의 후원’으로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이 설립되자 이곳에서 조석진•김응원(金應元) 등과 같이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왕가의 후원이라고 했지만 이는 이완용의 후원과 같은 의미다. 이완용이 고종의 대리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완용은 서회미술회의 회장으로 실질적인 재정 후원을 했다.
서화미술원 출신으로는 이용우(李用雨)•오일영(吳一英)•이한복(李漢福)•김은호(金殷鎬)•박승무(朴勝武)•최우석(崔禹錫)•노수현(盧壽鉉)•이상범(李象範)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한국 근대 전통 회화의 대표적인 화가다. 1919년 민족 서화가들을 중심으로 서화협회(書畵協會)가 결성되자 안중식은 초대 회장으로 뽑혔다.
그가 회장으로 추대되기 두 달 전인 4월 초순 3•1운동과 관련되어 내란죄라는 죄명으로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에 회부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때 쇠약해진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겨울 세상을 떴다.
2.
관람객이 전시장에서 첫번째로 마주치는 작품은 강진희(姜璡熙, 1851-1919)의 <승일반송도•삼산육성도 昇日蟠松圖•弎山六星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1888)다. 1887년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이 수행원이었던 강진희가 미국 워싱턴에서 고종, 순종의 탄신일을 기념해 서양 종이에 그린 그림이다.
강진희 <승일반송도> <삼산육성도> 1888 종이에 담채 각 91x60.5cm
기획자는 안중식 100주기를 기념해 작품 수도 100점으로 정했다고 한다. 100번째 전시 작품은 노수현(盧壽鉉, 1899-1978)의 <신록新綠>(1920년대,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등록문화재 531호)이다. 1923년 이상범李象範(1897~1972), 변관식卞寬植(1910∼1976), 노수현盧壽鉉(1899~1978), 이용우李用雨(1902~1952) 등 안중식의 제자 4인이 결성한 동연사(同硏社) 회원 중 가장 세상을 늦게 뜬 이가 노수현이다. 노수현은 <신록>에서 가상의 산수 풍경이라는 한계 안에서도 한반도의 봄날 어디에서 볼 수 있는 산세와 나무, 지게지고 가는 중늙은이, 서양의 명암법과 구도를 수용한 근대적 시각을 담은 전통 산수화의 업데이트 비전을 보여준다.
시작을 1887년, 끝을 1920년대로 정하고 기획자는 그 사이를 여섯 토막으로 나눴다.
1부 서화의 신세대, 2부 계몽의 붓, 3부 저항과 은둔의 서화, 4부 서화가들의 결집과 확산, 5부 거장과 신예, 6부 새로운 도전과 모색이 그것이다.
1부 서화의 신세대, 2부 계몽의 붓, 3부 저항과 은둔의 서화, 4부 서화가들의 결집과 확산, 5부 거장과 신예, 6부 새로운 도전과 모색이 그것이다.
1부에선 안중식이 해외 문물을 눈을 뜨게 된 계기였던 영선사 일행으로 톈진 방문을 했을 때의 기록물인 김윤식의 <음청사병추보>(성균관대 존경각 소장품)이 눈길을 끈다. 아쉬운 점은 안중식이 19세기에 적어도 세 번은 텐진과 상하이를 방문하는데, 그때 그가 접하고 영향을 받았던 해상화파의 화보를 도판이나마 전시했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안중식의 스승인 장승업도 해상화파의 화보를 통해 절지기명도 등 바뀐 트렌드를 수용했고 이는 안중식과 조석진으로도 이어졌고 1910년대에 안중식은 해상화파와의 영향을 적극 수용한 도원도 류와 서양화 기법을 수용한 <백악춘효>시리즈를 제작했다.
안중식 <백악춘효> 1915 비단에 담채 (여름) 197.5x63.7cm
(가을)202x65.3cm
1부와 2부에서 특징적인 것이 있다면 안중식과 어진 화사의 영광을 함께 누렸던 조석진(1853~1920)과의 합작품은 일부 소개했지만 동시대에 활동했던 채용신(1848~1941)의 초상화류는 일절 보이지 않는다. 어진화사였지만 얼굴은 ‘안그렸다’는 세간의 평가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대신 안중식의 첫제자인 이도영의 활동은 크게 소개하고 있다.
‘계몽의 붓’이란 섹션 이름에서 보듯 그때 신문물인 신문과 잡지를 통해 그림을 그리는 이로서 계몽활동에 자신의 재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안중식이 그린 <아이들보이>의 표지화와 조석진의 <철세계> 표지화, 이도영이 ‘언론인’ 오세창과 협력해 <대한민보>와 <만세보>에 그린 풍자적인 삽화가 크게 소개되고 있다.
안중식이 표지를 그린 어린이 잡지
3부 저항과 은둔의 서화 섹션에선 간송미술관 소장품인 <탑원도소회지도>(1912)와 이회영의 <석란도>(1920, 개인소장품), 황철의 유작을 지운영이 완성한 <산수도>(1932, 일본 사노시향토박물관 소장품) 등이 선보이고 있다. 이 섹션에 안중식의 평생 파트너라 할 수 있는 조석진은 보이지 않는다.
황철, 지운영 <산수도> 1932 비단에 채색 250x84cm 일본 사노시향토박물관
5부와 6부에선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안중식의 대표작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안중식이 1910년대에 그린 세 점의 도원도 중 두 점이 나왔다. 리움 소장본인 <도원문진도>(1913)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인 <도원행주도>(1915, 동원 2556)이 그것이다. 그리고 안중식의 제자로 그림 속에 흐르는 사승관계를 엿볼 수 있는 박승무(1893~1980)의 <도원도>(20세기 초, 국립고궁박물관 소장)가 등장해 새로운 화풍의 도입과 고착 현상을 관람객이 가늠해 볼 수 있게 했다.
안중식 <도원행주도> 1915 비단에 채색, 143.5x50.7cm
도원도류가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해상화파의 화보 영향을 보여준다면 <영광 풍경>(1915,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이나 <백악춘효>(191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등록문화재 485호)를 보는 관객은 20세기 초 도화서 화원 출신이 바뀐 시대의 트렌드를 어떻게 소화하고 전통화에 도입하려고 시도했는지, 지식인이자 리더라는 자의식을 갖춘 서화인 안중식이 ‘식민지 조선’에 대한 연민과 안타가움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바뀌고 있는 화가의 자의식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징후는 <탑원도소회지도>(1912)와 <영광풍경>(1915)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탑원도소회지도>에 등장하는 지식인의 모임 모습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진 양반 계급의 계회도를 연상시킨다. 다른 점이 있다면 <탑원도소회지도>에 등장하는 바뀐 시대의 리더계급은 오세창을 위시해 중인 계급이라는 점이다. 또 화면 상단에 등장하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란 실경의 존재와 화면의 과감한 생략과 집중은 화가로서의 안중식을 다시 평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안중식 <탑원도소회지도> 1912 종이에 담채, 23.4x35.4cm 간송미술문화재단
안중식 <영광풍경> 1915 비단에 담채, 170x473cm, 삼성미술관Leeum
<영광풍경>역시 주문자가 지방 부자였다는 점, 조선 후기에 유행한 지도형의 그림과는 완전히 다른, 서양의 실경 풍경화가 취하고 있는 관점과 같다는 점에서 안중식이 보수적인 관점에서 머무른 작가가 아니라 바뀐 시대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근대 인물이란 점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의 마지막 부분은 안중식의 제자들 작품이 집중적으로 걸려있다.
그 중에서도 안중식의 사후, 즉 1920년대 이후 좀 더 직접적으로 일본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사조의 영향을 반영한 작품이다. 1927년 제7회 선전에서 특선을 받은 김은호의 <부감>의 초본과 1926년 작 유화 자화상은 비유학파 조선 전통화가 진영의 모습을 보여준다. 안중식의 무릎 제자라 할 수 있는 이용우도 일본의 몽롱체 기법을 적극 수용한 <추경산수도>(1930년대, 동원2578)도 새로운 문물의 유입통로가 일본이고 작가의 평판이 일본적인 기준에 따를 수 밖에 없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용우(1904~1952)의 몽롱체 시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점우청소 霑雨淸疎>(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은 제14회 선전(1935) 입선작이라 <추경산수도>도 1930년대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용우 <추경산수> 1930년대 비단에 담채, 139.5x84.9cm
노수현 <신록> 1920년대, 비단에 채색, 204x312cm, 고려대학교박물관
전시장의 물리적 마지막 칸은 앞서 언급한 노수현의 <신록>으로 끝을 맺는다. 한국적인 풍경을 구현했다는 점에서 <영광풍경>의 연장선에 놓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과 같은 칸에 <신록>보다 후대에 그려진 김환기의 <돌>(1953, 신수 214)과 월북화가인 김용준의 <서창청완도>(1949, 구 10046)를 소품으로 배치했다. 두 작품 모두 전통의 현대화와 관련해 고민한 작가의 작품이다.
기획자는 도화서 화원 출신으로 청나라와 일본행을 통해 목격한 근대를 한국화에 끌어들인 안중식에게 ‘근대의 봄 새벽’이란 이름을 왜 부여했는지 전시를 통해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