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말 양이선의 출현부터 해방과 분단까지 시각예술로 보는 삼일운동 전후사의 인식
-친일 청산과 통일 주도권을 위한 지름길은 부정과 은폐 대신 팩트 체크부터
전시기간: 2019.3.1~4.21
전시장소: 서울서예박물관
글/ 김진녕
올해는 삼일운동 백주년이 되는 해다.
백주년을 기념해 정부 차원에서 여러 기념식도 열고 국공립미술관마다 삼일운동 백주년 기념전을 열었다. 하지만 그 많은 삼일절 전시가 해마다 열리는 삼일절 기념행사 같은 관성, 이를테면 삼일 독립선언서 낭독과 선언서 전시 같은 습관성 전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유감이다. 우리가 왜 삼일절을 기념해야 하는지, 삼일운동이 어떤 맥락에서 일본제국의 식민지 조선에서 일어났는지를 따져보고 오늘의 맥락에서 보여주는 전시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현실에서는 그런 전시가 나오지 않고 있다. 올해 삼일독립운동 기념 전시 중 서예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자화상-나를 보다>(~4월21일)은 이런 습관적인 전시의 틀을 깬 유일한 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시는 신미양요(1871년) 때 미국 해병대가 빼앗은 어재연 장군의 장수깃발 앞에서 도열한 미국해병대의 기념 사진이 월페이퍼로 붙어있고 그 옆에 김성근의 붓글씨가 걸려있다.
1871년, 아직은 유교 엘리트로서 조선왕을 떠받드는 역할을 자임했던 김성근은 칠언시를 적었다.’’서양 배의 연기와 먼지로 천하가 어둡지만 동방의 해와 달은 만년토록 밝으리!’
하지만 김성근은 자신의 말이 못미더웠는지 뒷날 친일파로 전향했다.
이어 전시는 강제 개방과 함께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한 조선의 어지러운 국내 정치 상황을 반영하듯 민씨 일문의 기린아 민영익의 상하이 망명 시절의 작품과 채용신의 작품으로 전하는 조선조 말의 높은 벼슬아치 초상, 유교 교육을 받은 뒤 독립운동에 합류한 지사들의 문인화와 글씨,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화가에게서 배운 일제 강점기의 화가들 작품, 조선에서 활동한 일본 작가, 해방공간에서 북으로 간 월북 작가의 작품으로 끝을 맺는다. 전시장 마지막에 걸린 작품이 정종여가 죽기 두 해 전에 그린 <참새>(1982년 작)다. 남한에 부인과 4명의 자녀를 두고 북으로 간 그는 나무 위의 참새 한마리가 떨어져 있는 다섯마리의 참새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절명시처럼 그려냈다.
2차 대전 종전으로 일제라는 단일 지배자가 사라진 뒤 신냉전이라는 새로운 세계질서가 강요된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을 겪어야 했던 한반도의 모습은 이게 독립의 완성이었나라는 의문을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삼일운동을 꼭지점 삼아서 엉클어진 한국현대사의 시발점이 된 구한말부터 분단까지 시대별 단면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전시다.
이번 전시의 기획자인 이동국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로부터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른 삼일절 기념 전시와 다르다.
이번 전시는 이벤트성 전시가 아니다. (그런 오해를 받을까봐)다른 삼일운동 기념 전시가 끝나고 올릴까도 고려했었다. 관행적인 전시로, 삼일절 행사 이벤트로 여겨질까봐. 이번 <나를 보다>전은 그런 성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반일 친일, 이런 프레임에 갇혀서는 우리의 본 모습을 모르게 된다.
-짝다리를 짚은 고종의 초상도 나오고 흥미로운 작품이 많다.
이번 전시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 많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내부적으로 월북작가나 조선에서 활동한 일본작가의 그림을 거는 것에 대한 이의도 있었다. 장승업의 기명절지도와 19세기 민화풍 화조도를 나란히 거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이 있었다. 시기적으로 같은 작품을 거는 것임에도. 하지만 걸자고 밀고 나갔다.
고종이 거울을 보는 모습을 담아낸 초상은 이번 전시의 상징성과도 관련이 있다. 고종이 거울을보면서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시회에 서예작품 비중 못지않게 회화 작품도 많다.
이번 전시에 서(書)와 전통회화, 서양화, 민화가 다 들어가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에서 활동하며 경주나 금강산을 그린 일본 화가의 그림도 포함시켰다. 우리 회화 미술의 횡단면을 보자는 취지다. ‘항일 프레임’ 하나로는 그 시대의, 지금의 우리 문화 예술을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적어도 먼저, 그 시대의 실상부터 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횡단면을 잘라내서 보여주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대한제국말기, 일제강점기, 광복과 분단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 문화예술을 김성근에서 시작해 정종여의 참새로 정리한 것이다.
삼일운동이 있었고 광복으로 독립했지만 우리는 진짜 독립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지금 우리는 2차 대전 종전 패러다임에 그대로 붙들려 있다. 조형언어는 문자와 달라서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양해질 수 있다. 친일이나 항일 프레임 또는 반공 프레임이 아닌 조형언어로 되돌아보는 우리의 오늘 모습을 염두에 둔 전시다.
-민화를 서예작품이나 동양화, 서양화와 나란히 배열했다.
한국 미술사 연구자 중 ‘일제 강점기는 조선이 망했고, 미술도 망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1910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과 아무 상관이 없어졌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개화기부터 한국전쟁까지의 시기를 잘라놓고 보니, 민화도 있고, 일본 작가의 그림도 있고, 조선과 일본에서 배운 작가도 있고 다양한 모습을 띤다.
오원 장승업은 천재 화가라고 불렸고 기법적으로 대단히 훌륭하다. 다만 창의성은 의문이다. (장승업의 영향을 받은)조석진이나 안중식 등 화원 화가는 화보풍의 그림을 그린 게 맞고, (그림만 봐서는)시대가 바뀌는지 알 수가 없다. 매너리즘에 빠진 면이 있다. .
하지만 그 시대에 등장한 민화는 정반대의 조형언어를 구사했다.
민화는 말그대로 미술학교 문 앞에도 못가본 이들이 그린 자유분방하고 허접한 ‘삼류’의 그림이다. 이게 주류 미술사가들의 민화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고.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민화를 그린 이들은 익명의 최고 전문 화가라고 봐야 한다. 시장에서 팔리는 그림을 그린 이들이다. 작품을 시장에서 팔아서 밥도 먹고, 예술도 하는 게 프로작가 아닌가? 그 시절 탱화만 그리던 불모들이 민간에 나와서, 불화 격식에 맞춘 그림이 아닌, 자유롭게 그린 그림이 민화이기도 하다. 이들이 세상이 바뀌는 것을 가장 먼저 화폭에 담아낸 이들이다.
나는 소치 같은 이들을 프로작가의 시작이라고 본다. 소치(허련, 1809년 ~ 1892년)는 ‘허모란’으로 불리기도 한다. 진도에서 서울을 오가면서 모란 그림으로 밥도 먹고 여행도 한 것이다. 부농이나 거상 등 중인 계급이 커지고 반상의 질서가 뒤집어지면서 그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려서 생계를 해결하는 작가의 시대가 온 것이다.
-민화가 시대의 변화를 수용한 그림이란 얘기인가.
조맹부체가 고려말에 들어와 이암과 안평대군을 거쳐 조선왕실과 사대부 커뮤니티로 퍼지는데 엄청나게 오래걸렸다.
그런데 민화는 18세기 중반 이후 폭발적으로 보급됐다. 효제충신예의염치, 책가도 같은 민화가 갑자기 18~18세기에 함경도부터 제주도까지 한반도 전역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고 인기를 끌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현상일까. 사회사적으로 분석하면 이건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조형 언어에서 조형 분석도 중요하지만, 이게 왜 그려졌을까,란 사회적인 분석도 중요하다.
그 지점은 조선의 건국자들이 설계한 반상의 질서가 내부붕괴하는 시기와 맞물린다. 즉 조선 초부터 유지됐던 신분체제의 몰락으로 중인 계급이 문화의 전면에 뛰쳐나온 것이다. 그리고 민화가 이런 현상의 대표상품이 된 것이다. 민화는 조선조 말의 내부붕괴라는 시대상을 잘 반영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조선 말기에 중인이나 양민이 호적을 많이 샀다. 양반과 상민의 결정적 차이는 ‘먹물’이다. 학식, 배웠다는 것. 이것이 책가도 수요 증가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 오일달러 붐이 오면서 사우디 노동자로 대표되는 해외파견 노동자와 기업이 돈을 벌었다. 그게 아파트 건설로 이어지고, 표준화된 아파트가 등장하자 거실을 꾸미는 ‘장식용’ 브리태니커 사전이 많이 팔렸다. 19세기 조선에 늘어난 중인 계급의 ‘브리태니커 사전’이 바로 ‘효제충신예의염치’라는 유교 이념을 그림으로 그린 문자도인 셈이다.
이렇게 조형언어를 통해서 사회를 읽자는 것이 이번 전시의 취지다. 생각이 바뀌니까 조형언어도 바뀐다. 그래서 그 시대를 있는 그대로 보자고 전시를 꾸민 것이다.
서구 미술사에서 ‘~주의’(ism)이 등장하는 게 19세기다. 유럽이나 조선은 공간만 다를 뿐, 시기적으로 보면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은 똑같다. 우리에겐 그 증거가 민화다.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하며 한국 근대화단에 영향을 끼친 일본 화가의 존재도 드러냈다.
우리가 이제는 ‘아픈 상처’나 과거도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와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게 이번 전시를 기획 이유이기도 하고. 한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모든 작가는 박수근을 빼고는 거의 다 유학을 갔다. 그것도 일본으로.
이건 가치 평가 이전에 팩트 체크의 문제다. .
전체 역사를 놓고 보면 우리가 늘 (외부로부터)받아먹기만 한 것도 아니고, 새롭게 소화해서 재해석한 게 더 많다. 수용보다 재해석에 방점을 찍어놓고 봐야 한다. 예술에서 모방이 없는 창조는 없다. 그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모습을 봐야 한다.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실존 상황에서 예술은 더 새로운 싹이 튼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라는 상황을 횡단면으로 잘라놓고 보면 여러가지 현대의 맹아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구호를 넘어서 실질적으로 친일청산을 하려면, 그때의 팩트(현실)를 먼저 체크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치유가 안되면 극복은 안된다. 실상을 정확히 알면, 미래를 위한 친일 청산을 얘기할 수가 있다. 냉정한 인식이 먼저다.
-기획전을 만드는데 얼마나 걸리나.
기본적으로 전시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제대로된 조직도 갖춰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아쉬운 점이 많다. 그러다 보니 기획에서 문을 여는데 까지 3년이 걸리는 전시도 있고, 3개월이 걸리는 것도 있다.
삼일운동 백주년 기념전은 준비 3개월 만에 문을 연 전시지만 그 전에 기획했던 전시의 연장선이자 축적물이라 전시 준비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완성도에서는 아쉬움이 많다. 영상도 더 만들어서 틀어주고, 좀 더 친절한 설명문도 붙여주고 싶었지만 인력이나 예산 문제 등 한계가 있다.
서예박물관에서 그동안 1995년에 열었던 <광복 50주년 기념 애국지사 유묵전>, 1996년과 2003년의 오세창 전, 2009년의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전, 2010년 <한일강제병합 100주년 전> 같은 전시 성과가 축적돼 있었기에 비교적 단기간에 전시를 만들 수 있었다. 뭐가 어디있는지 아니까.(웃음)
-전시에 국고 지원도 받나?
지난해 4월부터 삼일운동 100주년을 염두에 두고 국고 지원 신청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 예술의 전당의 자체 예산으로만 전시를 꾸려야 해서 전시 자재 재활용 등 최대한 경비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서예박물관에서 하는 전시지만 서예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는 전시다.
내가 89년 1월부터 서예박물관에서 일했다. 그동안 ‘서예사 특별전’만 35번을 열었다
이외에도 1년에 세 개씩, 백 개 정도의 전시는 만든 것 같다. 전시는 많이 만드는 것보다 관객과 호흡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무식한 게 아니라, 서예라는 것, 한자라는 것을 요즘 대중들은 잘모른다. 한자공부를 안하니까. 그런데 전시로 그들에게 강요를 할 수 없는 것이다. ‘한자 배워오세요’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이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 대중이 전통적인 서화 장르를 오늘의 시각 예술로 이해하게 하는 것, 그게 나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