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대한제국의 미술-빛의 길을 꿈꾸다
기 간 : 2018.11.15-2019.2.6
장 소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글/ 황정수
대한제국 시기의 미술의 의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대한제국의 미술, 빛의 길을 꿈꾸다>전은 시의적절한 전시이다. 마침 올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기도 하고, 3.1운동 또한 100주년 되는 때이므로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조선왕조가 근대화되는 과정을 되돌아보기에 적합한 기획이다. 개막과 함께 많은 화제가 되었지만 이렇게 한창 진행되어 막바지에 다다른 즈음에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만큼 이 전시가 여러 가지 면에서 기억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대한제국의 미술, 빛의 길을 꿈꾸다>전이 열리는 덕수궁미술관
전시 제목에 '대한제국'이란 시기에 방점을 두고 있지만, 기실 내용은 개화기 근대화 과정의 문화를 보다 폭넓고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음에 올 새로운 시대를 규명하기 위해 살펴야 할 이행기 문화의 복합적 양상을 보고자 함일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같이 식민지 시대를 지낸 국가는 이러한 이행기를 잘 규명하지 않으면 국가의 정체성을 세우는 데 어려움이 생긴다. 기획 의도에 걸맞게 전시는 기억해야 할 격변의 순간을 사초 기록하듯이 세밀하게 정리하고 있다. 마치 근대기의 문화를 정리한 역사 교과서를 보는 듯하다.
근래에 대한제국 시기에 대한 실체 규명과 일제강점기에 대한 재평가, 그리고 일제의 잔재 청산이라는 과제에 대한 논의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를 위해선 당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물론 역사서와 같은 서술이 판단의 모범이 되지만, 역사를 구성하는 유물들의 존재도 역사적 판단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동안 대한제국 시기의 기초적인 1차 자료에 대해서조차 정리되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한제국 중심의 미술품 전시는 당시의 현실을 직접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 전시의 가장 큰 줄기는 대한제국을 중심으로 전통의 유지와 외래적인 것의 수용이 서로 맞물리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서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그동안 이 시기의 문화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강요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수용된 ‘이식 문화’라는 성격으로 규정되어 온 면이 있다. 이제 피해 당사자라는 입장에서 벗어나 시대를 능동적으로 정확히 이해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아 당시의 상처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전시의 내용은 조선 왕조의 마지막이자 대한제국을 여는 시기의 궁중을 둘러싼 상류사회가 향유한 미술 문화를 주로 다루고 있다.
궁중 주변 미술의 변화
이 전시의 첫 부분은 대한제국 시기 궁중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을 담은 궁중 미술을 보여주고 있다. 궁중의 일을 화원들이 기록한 ‘의궤’에서 시작하여, 궁중의 행사를 병풍에 담은 ‘진연도’, 궁중 행사에 실용적 장식품으로 사용된 병풍 등이 주를 이룬다. 이 작품들은 솜씨도 뛰어나거니와 보관 상태도 좋아 당시의 미술 문화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만한 것들이다. 이 외에 궁중과 관련 있는 사찰에서 사용한 탱화들도 관심을 둘 만하다.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 미국 호놀룰루미술관
전시작 중에 가장 화제가 된 대표적 작품은 미국 호놀룰루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이다. 이 작품은 학과 복숭아를 주제로 그린 대작 12폭 병풍이다. 작품의 규모나 장황의 상태 등으로 보아 궁중을 위해 제작된 것에 틀림없다. 그런데 작품의 내용이 조선시대 그려진 '해악반도도' 양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특히 바탕에 금분을 전면에 칠하여 배경을 삼은 방식은 일본 '린파(琳波)' 장식화의 영향이 진하게 보인다. 이 작품은 한국 전래의 전통미술과 일본의 미술이 혼재된 형태가 궁중 미술에까지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함께 일본 미술이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특별한 유물이다.
<신중도> 공주 신원사
공주 신원사 소장의 <신중도(神衆圖)> 또한 관심을 끄는 작품이다. '신중도'는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을 그린 대표적인 불화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앞줄 중앙에 서 있는 호법신의 모습이 다른 작품과 달라 이채롭다. 그 중의 한 호법신은 대한제국기의 군복을 입고 군모를 쓰고 있다. 본래 불화는 전해오는 체본에 따라 그려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화사의 개인적 뜻이었는지 불사를 맡긴 주최 측의 주문이었는지 다시 보기 어려운 장면을 만들어 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불화가 대한제국 시기를 맞아 새로운 불화 형식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밖에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한궁도(漢宮圖)>는 중국 미술과 서양화법이 고루 적용되어 근대기의 혼란스러운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조석진이 그린 <군국기무소회의도>나 안중식이 제작했다고 전하는 <조일통상조약체결기념연회도>는 그동안 이들이 그린 다른 작품과 기법 면에서 큰 차이가 나 관심을 끈다. 그들의 솜씨인지 의심스러운 면이 있지만, 그들의 소작이라면 당시 새로 유입된 미술 양식과의 혼성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의미 있는 작품들이다.
사진의 등장과 초상화의 변화
근대기 한국 미술사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갈래는 ‘초상화’와 ‘사진’이다. 이번 전시에도 주요 품목으로 가장 많이 전시되었다. 초상화는 예로부터 궁중과 관련된 인물을 기록하는 대표적인 수단이었다. '전신사조(傳神寫照)'를 강조한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초상화 기법이 있었으나, 근대화의 흐름을 맞으며 새로운 초상 형식이 등장한다. 사람의 실물 얼굴을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등장한 것이다.
이와 맞물려 아예 초상화를 대신하는 초상사진이 등장하여 수많은 초상 사진이 제작되었다. 사진은 전래 초상화에 비해서 시간이 걸리지 않을 뿐더러 실물과 더욱 가깝게 표현할 수 있어 인물을 기록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특히 고종과 순종을 중심으로 한 왕실 사진이 많다. 그런데 이들 왕실의 사진은 권위적인 모습이 적고, 일반 세간 사람들의 모습처럼 초라한 것이 많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일본에 제압된 한국 왕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보는 이의 마음이 편치 않다.
김규진 <대한황제 초상>
왕실 사진은 대부분 일본인 사진사에 의해 제작되었고, 한국인으로는 지운영, 김규진, 황철 등이 작업한 경우도 일부 있다. 이들 사진은 당대 상류 정치계의 모습을 보여주며, 때로는 정치 세력의 이동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사진 중 일부는 처음 소개되는 자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큰 것들이다. 그 중 김규진이 찍은 고종의 사진은 왕실에서 미국사업가에게 하사한 것으로 포장한 상자 등 당대 모습 그대로 있어 사진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 또한 순종의 스승인 김상덕이 중국에서 찍은 사진은 근래에 발견되어 처음으로 실물이 전시되는 것이다. 반일 감정이 강해 평생 의병 활동을 했던 김상덕의 모습은 영친왕의 스승으로 많은 것을 누리며 산 김규진의 모습과 많은 대비를 이룬다.
채용신 <고종 어진>
사진이라는 새로운 문물이 나와 초상화를 대신하는 경향이 생겼지만, 사진을 수용하지 못한 계층은 여전히 초상화를 선호하였다. 이런 초상화는 주로 일본인 화가들이 많이 그렸는데, 점차 한국의 초상화 작가들도 이들의 영향을 받아 사진을 사용하여 초상화를 그렸다. 대표적인 작가가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배운 사진술을 바탕으로 초상화를 그려 이름을 떨쳤는데, 고종 등 많은 인물 초상을 그렸다. 채용신이 그린 <고종 어진>은 당시의 초상화 현황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이 전시에 출품된 작가 미상의 '고종 어진'이나 '이우의 초상'도 모두 일본식 초상화 기법의 면모를 보이는 정체불명의 작품들이다. 이러한 작품은 당대 사진 기법의 초상을 그린 초상화가들과 함께 새로 연구해야 할 중요한 대상들이다.
공예 작품의 발전과 변화
이번 전시의 또 하나의 주요 품목은 대한제국기의 공예품들을 종류별로 모아 전시한 것이다. 공예품은 크게 전통 공예의 맥을 이은 것과 일본의 문화 이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를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만든 것과 전통적인 기법의 나전과 자수 등은 조선의 맥을 이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은제품과 일본식 칠기 공예품은 외래적인 요소가 강한 형태이다. 당시의 공예는 왕실의 선물용으로 많이 제작되었고, 전문적인 고급 공예품으로 만들어져 상품화되기도 하였다. 특히 외국에서 오는 상류사회 사람들의 여행 기념품으로도 많이 판매되었다. 이런 다양한 요구에 맞추어 제작되다 보니, 이 시기의 공예품들은 어쩔 수 없이 한국과 일본의 정서가 혼성된 모습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근대기에 만들어진 <백자청화운룡문호>와 <색회화조문병>
이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은제품들은 한성미술품제작소나 이왕직미술품제작소 등에서 만든 것으로 실용품이라기보다는 일본 취향의 관상용 미술품이었다. 그러니 한국미술품으로서의 가치는 현저히 떨어진다. 그런 면에서 가장 주목되는 공예품은 단연 나전칠기이다. 나전은 고려, 조선시대의 맥을 이은 당시를 대표하는 공예품으로 조선시대 풍습을 그대로 이은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많다. 아쉽게도 이런 것들은 당대의 대표 공예품이긴 하나, 개인의 창조성을 중시하는 근대 미술품으로서의 가치는 크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전성규 <화대>
이러한 문제는 '근대 나전칠기의 아버지'라 불리는 전성규(全成圭, 1880-1940)가 나타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가 만들기 시작한 나전 작품은 개인의 창조적 의식을 중시한다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전성규는 자신이 개발한 도안에 따라 제작한 작품에 자신의 호나 이름을 넣어 개인 창작의 작품을 만든다. 그런 면에서 전성규는 전통 공예를 개인의 창작품으로 발표한 첫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성규의 의식은 김진갑, 김봉룡으로 이어져 근대 나전 전통을 이루고, 현대에까지 이어지게 만든다. 현대에까지 나전칠기가 한국의 전통문화로 계승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전성규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화 단체와 한국 회화의 변화
대한제국의 회화 부분에 소개된 작품들은 대부분 대한제국의 미술이라 한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대한제국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의 미술이라는 표현이 옳을 듯하다. 이는 한국 최초의 미술단체라 불리는 '서화미술회'가 시작되면서 한국 근대 미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화미술회'는 1911년평양 출신의 서화가 윤영기가 설립하였으나 이완용의 압력으로 인수해 안중식과 조석진이 이어받는다. 이어 1915년 김규진에 의해 '서화연구회'가 설립되어 서화미술회와 대립 관계에 선다. 결국 두 단체는 1918년 '서화협회'라는 이름으로 합쳐 근대기 한국의 미술계를 이끌어가게 된다. 이어 서화협회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조선총독부는 문화정치를 빌미로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를 창설한다. 이러한 일련의 단체들을 통해 한국 미술의 활동이 이루어지니 한국 근대미술은 오히려 일제강점의 시대와 발은 맞출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은 주로 안중식, 조석진, 김규진을 중심으로 한 서회협회 출신의 화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서화미술회를 이끌었던 안중식과 조석진 그리고 그들의 제자였던 김은호와 이상범 등 제자들이 두루 포진되었고, 서화연구회를 이끌었던 김규진과 그의 제자 김진우, 이병직 등의 작품이 선을 보인다. 이밖에 1923년에 창설된 서화미술회 출신 남화가들의 모임인 '동연사'의 네 작가 작품을 전시한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런 흐름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한 채용신의 작품도 크게 부각시켜 전시한 것도 특색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완용이 중심이 되어 찬탈한 서회미술회를 본래 창설했던 선구자 윤영기의 작품이 없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채용신 <최익현 유배도>
회화 부분의 작품들은 대부분 익히 보던 양식의 작품이라 신선한 면은 크지 않다. 그중에서 유독 관심을 끄는 회화 작품이 몇 있는데, 단연 채용신의 <최익현 유배도>가 돋보인다. 지금까지 '최익현의 초상'은 여러 종이 전하였으나 '최익현이 유배당하는 장면'을 그린 것은 거의 전하지 않았다. 이 그림은 1906년 최익현이 순창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일본군 헌병사령부에서 3년형을 선고 받고 쓰시마로 압송되는 과정을 두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것이다. 왼쪽 면은 최익현을 인력거에 태워 숭례문을 나와 서울역으로 데려가는 장면이고, 오른 쪽은 기차를 타고 가 부산 초량역에 내려 다시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가려는 모습이다. 최익현을 데려가려는 일본 헌병들의 모습과 배웅 나온 임병찬 등 최익현의 제자들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며 저물어가는 조국 현실의 쓰라림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채용신의 회화기법의 연원을 알 수 있다는 면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당시 경성의 모습과 부산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역사화로서 의미도 크다. 또한 조감도식 투시 방법이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요시다 하츠사부로(吉田初三郞, 1884-1955)의 조감도를 연상케 할 정도로 일본식 서양화법이 구사되어 있다. 건물, 기차, 배 등 당시의 신물물이 기록되어 있고, 그린 기법도 서양화법이 많이 흡수되어 있어 채용신의 기법적인 면을 짐작케 한다. 당시 채용신이 일본에서 한동안 머물며 일본화를 연구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된다.
안중식의 <벽수거사정도>의 그림 부분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안중식의 <벽수거사정도(碧樹居士亭圖)>도 눈에 띄는 중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순종비의 백부 윤덕영(尹德榮, 1873-1940)의 집을 그린 것이다. 윤덕영의 집은 사간동 옆 벽동에 있었는데, 집 안에는 커다란 노송과 은행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순종이 '벽수(碧樹)'라는 호를 내리고, 그 집에 ‘벽수거사정(碧樹居士亭)’이라는 현판을 내렸다고 한다. 그 내력은 그린 것인데 특별하게 초본까지 남아 있어 그의 미술가로서의 작업 방식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더욱 이 초본에는 교정한 부분까지 남아 있어 미술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이 밖에 양기훈의 작품이나 김규진, 강필주 등의 작품과 1920년에 임금을 위해 그린 김은호, 노수현, 이한복 등의 그림도 당시 한국 미술의 수준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들이다.
아쉬움을 덧댄 마무리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라 불리는 시기는 조선시대를 잇고, 한국 근대 미술을 탄생시키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전통적인 미술과 서구와 일본의 미술이 충돌하여 새로운 미술 양식을 만들어내는 혼성미술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시 한국에서 창조된 미술품에는 한국의 전통과 서구 미술의 영향과 일본의 정책적 색채가 혼재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당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복합적인 전시이다. 여러 갈래의 많은 작품을 모아 체계적으로 전시한 모습은 박수를 받기에 충분한 전시이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가장 눈에 거슬리는 것은 지나치게 많은 사진 관련 자료의 나열이다. 뻔한 왕실의 사진을 복수로 나열한 것과 한국 관련 기사를 실은 많은 외국 잡지를 전시한 것은 미술품이라는 관점의 전시에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초상화를 많이 갖추어 사진과 초상화와의 관계를 좀 더 다각적으로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또한 근대기 미술품을 전시하는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작품 수가 적어 소략하게 보여 당대의 순수미술을 대략이나마 짐작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마지막 방에 설치한 창덕궁 벽화의 영상 작업이 전체 전시 개념에 어울리지 않고 많은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원래 창덕궁 벽화를 빌릴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어렵게 되었으면 차라리 영상 작업을 하지 말고 그 공간을 이용하여 서화미술회, 서화연구회, 동연사 등 회원들의 작품을 자료들과 함께 체계적으로 보여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덧붙여 늘 보이는 양기훈이나 김규진, 김은호 등의 병풍 그림을 빼고 단품으로 된 수작을 골라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이 전시는 좋은 미덕이 많다. 처음 소개되는 중요한 작품이 여럿 있었고, 공예 부분을 회화 부분과 무리 없이 연결시켜 보여준 노력도 수준급이었다. 우선 전체 근대기의 미술 현황을 보여준다는 면에서는 성공한 듯하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근대미술의 본질을 파악하여 세분화시켜 연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외래문화의 이식요소를 밝혀내고 각 세부 분야를 독립시켜 치밀하게 연구하여야 한다. 그렇게 이루어진 연구를 바탕으로 당대의 각 미술문화를 세분하여 전시하는 쪽으로 진화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 <대한제국의 미술, 빛의 길을 꿈꾸다>가 보여준 의도는 적지 않은 반향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