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한묵 : 또 하나의 시(詩)질서를 위하여
장 소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
기 간 : 2018.12.11.-2019.03.24.
한국 기하추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묵(韓黙, 1914~2016)의 대규모 회고전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50여 년의 시기, 다양한 작품을 조명하는 전시로 그의 수많은 유작에서 작품세계의 흐름을 설명할 만한 130여 점이 선택됐다.
2016년 103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후 첫 유고전이고 개인 단독으로는 최대 규모이므로 전시는 그가 이룩한 화업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명하면서 생애 타임라인을 따라 진행된다.
1950년대의 구상작업부터 시공간이 결합된 역동적 기하추상이 완성되는 1990년대까지의 작업을 시기별로 분류하여 전시 공간을 구분했다.
제1부. 서울시대 : 구상에서 추상으로 : 1950년대
제2부. 파리시대 I : 색채에서 기하로 : 1960년대
제3부 파리시대 II : 시간을 담은 동적 공간 : 1970년대
제4부 파리시대 III : ‘미래적 공간’의 완성을 향해 : 1980년대 이후
제5부 파리시대 IV : 생명의 근원을 추구하는 구도자 : 1980년대 이후/ 먹과 종이
드로잉 작업 : 1970년대~1990년대까지
에필로그 : “붓대 들고 씩 웃으며 가야지”
한묵, 가족, 1957, 캔버스에 유채, 99×72cm, 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
어려서는 아버지를 통해 동양화를 전수받았고 10대 후반부터는 서양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만주와 일본에 유학했고 금강산 시절에도 많은 작품들이 제작되었다고 하지만 1950년대 이전작품은 전쟁으로 유실되어 남아 있는 작품이 없다. 1950년대 전반기는 구상과 추상이 함께 나타나며, 한국전쟁 이후시기로 전쟁의 참상, 가족이산, 가난에 대한 경험들이 작품에 주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대상을 제거하며, 추상의 시기로 변모해 간다.
한묵, 나선 N.19, 1975, 종이에 판화, 에칭, 57.8x53cm, 개인소장
홍익대학교 미대교수가 된 이후 사실주의 화풍이 지배하는 국전에 반대하여, 1957년 《모던아트협회》를 유영국, 박고석, 이규상, 황염수와 결성하여 현대미술운동의 선두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에는 대상을 해체하고, 재구성, 종합하는 입체파 경향이 작품에 나타났다. 점차 순수조형에 전념하면서 추상적 형태가 화면을 채워가게 된다. 주제적으로는 사회적 부조리와 사회상에 대한 개인의 감성들이 주요한 소재가 되며, 가족, 십자가 등이 주로 그려진다.
홍대 교수로서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1961년 47세의 나이에 파리로 가게 되면서 그의 작품 세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기하추상작업의 근간이 된 1960년대 순수추상 작업들과 1970년대 판화 작업의 추이를 볼 수 있다.
한묵, 무제, 1977,모눈종이에 과슈와 연필, 63×47cm, 개인소장
당시의 분위기를 감안했을 때, 파리에 가지 않았더라도 추상으로 발전하며 다양한 시도를 했겠지만 그처럼 색채와 기하학적 형태에 대한 탐구가 깊이있게 진행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전시장에 펼쳐진 1970년대 나선형의 기하학적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그가 현재의 삶을 우주와 공간으로, 그 본질적 요소를 탐구하는 데에 시각적 예술의 힘을 사용하고자 지속적인 투쟁을 할 수 있었던 에너지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궁금해질 정도의 집요함을 느끼게 된다.
전시 제목에 포함된 “또 하나의 시詩질서를 위하여”는 1976년 현대화랑의 개인전을 맞아 작가 본인이 쓴 글의 제목이다. 그는 이 글에서 예술은 생활과 마찬가지로 어떤 구체를 생산해내는 작업이라고 썼다. (예술가는) ‘시적詩的이기를 그만두고 시詩를 낳아야 한다’는 말로 진정한 예술가는 ‘신기루처럼 먼 것이 아닌 벅차게 돌아가는 현실의 수레바퀴 속에서 불꽃튀는 삶의 노래 속에 있는 미’를 찾아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런 현실을 해설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지 않고, 이런 현실에 도전하는 힘의 원천을 이루는 엘레망(Element)을 찾아내는 데에 있다.”
한묵, 백색운의 운무, 1995, 캔버스에 아크릴, 200.5×200.5cm, 개인소장
그의 회화에서 발견되는 리듬과 규칙, 충돌과 어긋남, 수축과 확대 같은 동적 요소들은 현실과 그 현실에 도전하는 인간의 에너지와 그 요소를, 그 질서를 표현하고자 한 데서 온 것이다.
“문학적인 표현, 철학적인 의미성을 강조하여 그것을 작품내용으로 삼는 경향은 시각예술이 걸어야 할 본도와는 거리가 먼 방계적인 것에 불과하다. 어디까지나 시각예술은 시각언어로써 이야기해야 하며 시각성을 내용으로 해야 한다고 본다.”
이 외에 종이 콜라주, 붓과 먹을 사용한 작품,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드로잉 작업 또한 한묵의 예술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한묵, 태양을 잉태한 새, 1996, 아크릴, 종이콜라주, 50×68.5cm, 개인소장
현대미술의 대가들과 함께, 이중섭, 박고석의 친구로 이야기되지 않는, 한묵의 독립적인 미술세계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옵아트를 연상케 하는 시각적 향연, 나선형의 파라독스, 색채와 평면에 대한 연구, 초기작의 구성적 성향과 추상화 단계의 발전과정, 동서양의 기술적 정서적 조합 같은 다양한 키워드로 한묵의 작품을 바라볼 수 있다. 60-70년대 서양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현대미술의 홍수에서 국내, 혹은 외국에 나가 작업하던 한국의 화가들 앞에 쥐어진 화두는 무엇이고 각자 어떻게 풀어갔는지에 대한 소개가 꾸준히 이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