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조선, 병풍의 나라
장 소 :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기 간 : 2018.10.03 ~ 2018.12.23
병풍(屛風). 글자 그대로 어떤 경우에는 바람을 막을 수도 있겠다. 병풍은 외부의 시선을 막거나 보이고 싶지 않은 곳을 가리거나 공간을 구획하는 등 다양한 기능을 담당하는 물건이다. 삼사십년 전만해도 집집마다 병풍 한두 점 쯤은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생활 속에서 보는 일은 드물어졌다.
포터블 월portable wall이라고 해야 할까. 이러한 가림막은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으나 접이식 병풍은 한국과 일본에서 훨씬 더 인기를 끌었다. 접어서 이동과 보관이 쉬울 뿐만 아니라 지그재그로 접는 방식 덕에 다른 받침대가 없이도 자리에 쉽게 서 있을 수 있는 구조적 효율성을 자랑한다.
올해 용산 신사옥에 개관한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은 고미술로는 첫 번째 기획전의 주제로 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던 ‘병풍’을 택했다. 병풍에 어떤 그림을 그려 넣었는지 폭넓은 자료를 구하여 2폭에서 10폭, 궁중과 민간, 산수화에서 기록화까지의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담았다.
병풍에 그려진 그림들만을 모아서 볼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넓은 전시실을 미로처럼 꾸며 80여 점의 병풍을 찬찬히 감상할 수 있도록 잘 정돈해놓았는데, AMPA의 소장품 외에도 경기도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삼성미술관 Leeum, 서울역사박물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제주대학교박물관, 호림박물관 등의 기관과 개인 소장의 병풍을 모아서 풍부한 볼거리를 구성했다.
입구 정면에서 손님맞이를 하는 작품으로 선택된 것은 금강산도10폭 병풍이다. 가로폭이 거의 6미터에 이르는 대형 병풍으로, 정선 이후 그려졌던 진경산수의 금강산에서 거의 민화에 가까워진 19세기 금강산도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금강산도10폭병풍 부분. 19세기, 종이에 수묵, 전체 236.7x616.5cm 개인소장
AMPA 소장품인 해상군선도10폭병풍은 화면구성이나 화풍 등에서 김홍도의 군선도를 떠올리게 한다. 요지연에 참석하러 가는 수노인, 황초평, 한상자, 조국구 등의 신선이 각 기물과 복장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병풍은 고종황제가 독일 마이어상사의 조선 지사장인 볼터(Carl Andreas Wolter)에게 하사했던 것이다.
해상군선도10폭병풍. 20세기 초, 비단에 채색, 전체 196.0x423.5cm, 화면 152.7×415.7cm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서왕모가 삼천년마다 열었던 파티 그림인 요지연도 병풍도 한 점 볼 수 있다. 중국의 요지연도와는 조금 다른 조선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경기도박물관 소장품이다. 요지연도 병풍은 그 상서로운 의미 때문에 19세기 이후에는 궁궐혼례 등에 사용되기도 했던 인기 품목이다. 부귀영화를 바라는 의미에서 인기 있었던 곽분양행락도 병풍도 한 점 전시되어 있는데, 대형 화면에 자연스럽고 알찬 인물과 사물의 배치, 선명하고 화려한 색채, 치밀한 묘사 등으로 숙련된 화가의 솜씨임을 알 수 있다.
요지연도8폭병풍. 19세기, 비단에 채색, 전체 185.3x390.6cm, 화면 134.8x388.2cm 경기도박물관
곽분양행락도8폭병풍 부분. 19세기, 비단에 채색, 전체 206.5x447.5cm, 화면 175.5x441.4cm,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조선시대 국가/왕실의 행사를 꼼꼼히 기록한 궁중기록화 병풍 석 점도 눈에 띈다. 조선 초기부터 사대부에서 흔히 제작했던 계회도의 관행, 국가행사를 도감으로 꼼꼼히 기록한 도감의 제작 관행은 병풍에서도 나타난다. 화축에서 병풍으로 그 형태를 바꾼 것은 17세기 이후라고 하는데, 낭비라며 관청의 계병 제작 금지 상소가 올라갈 지경이었다고 하니 계회도 병풍이 얼마나 많이 제작되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헌종가례진하도8폭병풍. 1844년, 비단에 채색, 전체 159.0x419.3cm, 화면 112.5x414.5cm 경기도박물관. 보물 제733-2호
십장생도, 일월오봉도, 태평성시도 등 궁중 및 사대부에서 사용하던 화려한 그림들, 화면가득 매화를 채운 유숙의 홍백매도, 강필주의 서원아집도, 채용신의 무이구곡도, 근대기 대가들의 산수도, 이색의 누각도 등이 있고, 사군자, 모란도, 화조도, 어해도, 문자도, 책거리, 지도, 인두로 지져서 그린 낙화도까지 새로운 종류의 그림을 담은 병풍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유숙 劉淑, 홍백매도8폭병풍. 1868년, 종이에 수묵채색, 전체 184.8x399.0cm, 화면 111.7x387.4cm 개인소장. 보물 제1199호
태평성시도8폭병풍(부분). 18세기 말~19세기 초, 비단에 채색, 전체 185.8x420.4cm, 화면 115.0x406.6cm 국립중앙박물관
낙화소상팔경도10폭병풍. 20세기 초, 종이에 인두, 전체 167.4x442.4cm, 화면 각 100.4x32.7cm 국립민속박물관
넓은 스펙트럼의 병풍 그림들을 다 다루면서 "병풍이라는 형식에 담을 수 없는 그림은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하니, 이를 주제로 전시를 엮는 것 또한 어려움이 있었을 듯 하다.
모든 병풍이 완성도와 보존성이 뛰어나고(잘 수리되었고), 잘 짜인 (비침 없는 좋은 유리의) 쇼케이스에 들어 있고, 보기 편한 조명, 정해진 동선, 설치와 사용이 쉬운 가이드 앱 등으로 관람객을 위한 배려가 돋보였다. 다른 형식의 그림 없이, 현대적 장치의 도움 없이, 아카이브 식의 교육자료 (거의) 없이, 병풍으로 시작해서 병풍으로 끝나는 스트레이트한 전시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개점휴업인 상태이고 간송미술관도 예전과 같은 방식의 봄가을 전시를 하지 않으니 사립미술관의 대규모 고미술 전시가 더 드물게 느껴진다. AMPA가 새롭게 고미술 전시의 명가로 떠오를지 기대해보는 관객이 많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