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제목: 판타지아 조선
전시 기간: 2018.7.18 - 8.26
전시 장소: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미술대학에서 미래의 화가들이 될 학생들에게 “민화 그리기를 지도해야 하나?” 아니면 “말아야 하나?”라는 문제에 대해.
전시장 모습
언뜻 별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질문이다. 그런데 답을 하기에 앞서 잠깐 생각해보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게 된다. ‘예스냐, 노냐’라고 답하기에 앞서 ‘민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판단이 먼저 필요하기 때문이다.
민화는 흔히 민중의 이름 없는 화가, 즉 비정규 화가가 그린 그림으로 간주된다. 내용에 있어서도 대량 소비를 위해 정통 미술을 모방하면서 대강 그린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리는 방식, 즉 화법(畵法) 역시 정규미술의 그것을 따르지 않았고 또 미적 가치의 규범, 즉 미학(美學)도 무시한 것들이 많다. 때문에 대체 미술 혹은 키치 쯤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또 자신의 생각이나 소신을 담는 것을 수련하는 직업화가의 예비생들에게 민화를 가리키는 일은 적절하지 않게도 보일 수 있다. 실제 민화를 보면 그런 사례가 많다.
공작새
한두 가지를 소개해보면 우선 책가도가 있다. 책가도는 옆으로 긴 책장을 병풍 전체에 그린 것이 있는가 하면 서탁 위에 책을 적당히 쌓아놓고 여러 장식품을 곁들여 그린 낱폭짜리도 있다. 후자 중의 하나를 보면 장식으로 그려진 새가 기묘하다. 눈을 보면 봉황을 닮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깃털은 박쥐 날개 같아 보이기도 하고 또 공작새 깃털처럼도 보인다.
삼국지도
두 번째는 삼국지연의 삽화에서 민화가 된 그림이다. 단골로 등장하는 장면에 장비가 장판교에서 단신으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치는 일화가 있다. 그림 속의 장비가 서있는 곳은 다리라고 보기에는 너무 어색하다. 무슨 담장 같은데 올라선 것처럼도 보인다. 또 그가 타고 있는 말은 발 모습이 뒤죽박죽이다. 옆 장면은 제갈 공명이 칠성단에서 동남풍을 비는 대목을 그린 것인데 이 역시 희극적이다.
소상팔경도 2폭, 20세기전반
한국화에서 ‘썩어도 준치’라 할 정도로 명성이 뛰어난 그림 소재가 소상팔경도이다. 그래서 민화에도 이를 그린 게 적지 않다. 그런데 소상팔경도처럼 그려놓고 소상팔경과 무관한 타이틀을 적어 놓은 것도 있다. 심지어는 동정루(洞庭樓)라고 떡하니 적은 것도 있다. 동정호의 악양루는 예부터 유명하지만 동정루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
소상팔경도 20세기전반
이렇게 놓고 보면 장마당에 나온 촌사람을 호리는 협잡(挾雜)에 가까운 그림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정반대의 해석도 있다. 이미 피카소도 알고 브라크도 알고 있는 것을 전제로 보면 비정규적, 비정통적 표현이 절대로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여기도 사례를 소개한다. 소상팔경 중 하나로 소수, 상강에 밤비 내리는 경치가 더 없이 근사해 유명해진 소상야우(瀟湘夜雨)를 그린 게 있다. 이 민화 화가는 검은 하늘에서 비가 줄줄 내리는 것으로 그렸다.
그뿐 아니다. 짬뽕과 자장면을 한 그릇에 담은 것처럼 그 아래는 별도의 산수화와 화조화를 곁들였다. 까치가 앉아 있는 소나무 언덕에는 호랑이가 보인다. 그 아래 호수는 2단으로 그려졌는데 각각 한가롭게 배 한 척씩이 떠 있다. 아래쪽에는 푸른 버드나무가 마치 갈대처럼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그 아래에 화조화가 또 그려져 있다. 붉은 꽃이 가득 핀 나뭇가지에는 어미 새가 큼직하게 그려져 있는데 입에 물고기 하나를 물고 있다. 그 오른편 아래로는 입을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들을 그렸다. 기발하고 천진난만하다는 말 외에 달리 부를 말이 없을 정도이다.
책거리 20세기전반
이런 예상불허의 발상은 무수히 많다. 그 중에는 책거리 장식으로 거미를 그려놓은 것도 있다. 조선 그림에 거미가 그려진 사례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거미를 어째서 왜 그려 넣었는지는 당사자 민화화가만이 알 일이다.
‘못 그렸다, 턱없는 그림이다’라는 지적의 반대편에는 이처럼 큐비즘도 울고 갈 정도의 대담무쌍하고 기상천외하면서 또 절대로 남을 의식하지 않는 주체적인 표현이 있다.
화조도 19세기
19세기 어느 시점 이후에 이런 민화가 정통미술에 버금갈 정도로 대량 제작됐는데 이와 함께 고려할 점이 또 하나 있다. 제도권 화가가 마치 투잡을 한 것처럼 여겨지는 그림도 섞여 있다는 점이다. 펼쳐놓은 책에는 글씨를 좀 써본 사람의 필치로 ‘자불래도화(自不來桃花)’ ‘가행수단변(家杏樹壇邊)’ 같은 글귀가 술술 적혀있다. 이를 보면 그린 사람은 문자속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책갈피
실제로 일부에서는 19세기 제도권 화가 중 일부가 민화를 그렸다는 주장을 하고도 있다. 소나무 아래에 입을 벌리고 있는 호랑이 정도로 생각한 민화가 간단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를 보면 미술사 연구자들은 이제부터 머리가 아프게 됐다.
민화를 정통의 미술사에 넣을 것인가. 넣는다면 어떤 위치에 어떤 정의 아래 설명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때가 됐다. 서예박물관은 개막에 즈음해 <예술로서의 민화>라는 타이틀로 미술사가, 미술평론가, 큐레이터, 디자이너, 화가들이 모여 일차 포럼을 열었다.
소상팔경도 20세기전반, 도판 25 앞에서 두폭
당연하지만 무슨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고 ‘이름 없는, 지방의, 제도권 밖의, 비정규의’라는 정의에 대한 재평가 무대를 마련한 것이다. 시간도 걸리고 간단치 않을 일이지만 의미 있는 출발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한마디 더 추가하자면 제목 판타지아는 형식의 제약을 받지 않고 즉흥적인 이미지를 자유롭게 전개하는 음악의 환상곡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