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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실 번영을 꿈꾼 아기씨들의 태항아리 - <나라의 복을 담은 태항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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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제목: 조선왕실 아기씨의 탄생 - 나라의 복을 담은 태항아리
전시기간: 2018.6.27 - 9.2
전시장소: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시대의 왕은 한 번도 절대 권력을 직접 손으로 행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연산군처럼 주변을 완전히 무시한 채 폭정을 행한 왕도 있었으나 그것은 아주 특별한 예외였다. 대개는 삼사(三司), 즉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관리들로부터 끊임없이 견제를 받았다.


분청사기 인화국문 태항아리, 15세기 초중반 높이42.8cm 고려대학교박물관 국보 제177호
 

조선 후기에 일어난 예송(禮訟) 사건, 즉 왕가의 예절을 따지는 논쟁은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이 부딪친 전형적인 사건이다. 효종이 죽었을 때였다. 송시열 중심의 서인 계열에서는 효종은 차남이므로 계모인 자의대비가 유교의 종법(宗法)에 따라 1년 상복을 입어야한다고 했다. 반면 허목, 윤선도 등 남인 계열에서는 그래도 왕은 왕이므로 왕가의 예법으로 3년 상복설을 주장해 이에 맞섰다.   


태종 도기 태항아리, 고려말 높이 56.0cm

이 논쟁에서 남인이 패해 윤선도가 귀양을 간 것은 역사책에 나온 그대로다. 이처럼 조선 왕권은 전기이든 후기이든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왕권의 예우를 받은 궁중 행사가 왕가의 혈통을 잇는 새 생명의 탄생이다. 후손 탄생은 왕권의 자기복제, 계승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다. 


평원대군 태항아리의 분청사기 뚜껑, 지름 26.5cm 경북대학교 박물관
 

조선시대 왕은 한 사람 왕비 외에 정1품의 빈(嬪)에서 종4품 숙원(淑媛)까지의 내관을 후궁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물론 그외에도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후궁을 맞이할 수 있다. 그래서 태조에서 순종까지 27명의 국왕이 나은 자식은 왕자 124명에 공주 116명에 이른다.(단, 단종, 명종, 인종, 경종은 슬하에 자식이 하나도 없었다).



성종의 넷째왕자 완원군 태항아리와 태지석

이들이 태어나면서 모두 왕권을 이을 후계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왕가 자체를 외곽에서 보호할 왕족으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이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출산 행사도 그렇지만 출산 이후에 남은 태(胎)는 장태법(葬胎法)에 따라 마치 왕가의 장례처럼 소중히 다뤄지며 길지를 택해 안장하고 태실을 만들어 봉안했다.


숙종의 둘째 왕자인 영조의 태항아리와 태지석
 

왕가의 출생과 관련해 미술 쪽에서 관심을 끄는 것이 두 가지이다. 하나는 태를 묻는 태 항아리로 쓰인 도자기와 다른 하나는 태항아리를 묻은 태실을 그린 그림이다. 태실을 그린 그림은 태실도 내지는 태봉도라고 하는데 모든 아기씨를 대상으로 그려진 것은 아니다.

왕자, 왕녀 가운데 왕위를 잇는 군왕이 나오면 가봉해 두었던 태항아리를 꺼내 재차 길지를 찾아 정식으로 태실(胎室)을 조성했다. 이때 윗전의 보고용으로 태실도, 태봉도가 그려졌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에는 4점의 태봉도가 전한다. 정조의 아버지로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의 태봉도와 순조, 헌종, 순종의 태봉도이다. 


장조태봉도와 부분, 1785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영조의 둘째 아들로 1735년 정월21일 태어난 장조(사도세자)의 태는 태어난 지 4개월이 지난 윤4월4일에 경북 예천 명봉리의 명봉사 뒤쪽에 묻혔다. 그리고 아들이 정조가 즉위하고 난 뒤에 장조로 추증되면서 왕에 준하는 태실이 새로 만들어졌다. <장조 태봉도>는 그때인 1785년에 그려진 것이다. 이 그림에는 산, 나무, 건물이 묘사에서 겸재 화풍이 물씬하다.



순조태봉도와 부분, 1806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반면 1806년에 그려진 <순조 태봉도>는 겸재 화풍이 민화로 전승되는 중간 지점을 보는듯한 느낌이 있다. 태봉을 둘러싼 산들이 겸재가 금강산 그림을 그리면서 뾰족뾰족하게 추상적으로 그린 바위 표현이 동원돼 있다. 여기서 더 흐트러지면 민화의 세계이다. 



헌종태봉도와 부분, 1847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그리고 40년 뒤인 1847년에 그려진 <헌종 태봉도>는 당시 기록한 의궤를 보면 덕산 출신의 화원 박기묵(朴基默)이 그린 것으로 돼 있다. 박기묵의 그림은 현재 한 점도 전하지 않는데 그가 그린 태봉도는 한 폭의 문인화처럼 얌전하고 단정하다.


헌종의 태실이 모셔진 충남 예산군 오계저수지 부근

순종의 태봉도는 <헌종 태봉도>에서 다시 30년이 지난 1874년에 그려졌다. 이해 2월8일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순종이 태어나자 장태법(葬胎法)에 따라 태를 소중히 처리하며 안장을 준비했다. 장서각에 남아 있는 자료를 보면 1백번 물로 씻었다고 한다. 그리고 후보지 3곳 중 한 곳인 충남 홍성군 구항면 태봉리를 태실 자리로 정했다.

절차에 따라 이 해 6월8일 태를 묻고 태실을 조성하는 공사가 모두 끝났다. 작가 미상의 <순종태실도>는 이때 그려진 것이다.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겸재 화풍에 근세적 사생풍이 가미된 필치로 그려져 있다.



서삼릉 태실(한국문화재단 자료사진)

전국 각지의 명당이란 명당을 찾아 모셔졌던 태실은 일제 들어 1920년대 후반부터 1934년 사이에 관리 미흡 등의 이유로 서삼릉 한 곳으로 모두 이장했다. 이장된 서삼삼릉의 태실은 그후 1996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해 54위의 태실을 조사했다.

이로서 태항아리로 쓰인 도자기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한 눈에 볼 수 있게 됐다. 태항아리는 조선 최초기의 일부만 토기로 제작됐다. 백자가 전체의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임진왜란 직전까지 부분적으로 분청사기도 쓰였다.



헌종 태항아리, 19세기 높이 32cm, 20.8cm

초기부터 말기까지 제작된 백자 태항아리를 보면 시대가 내려오면서 형태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고려적인 유산으로 생각되는 초기의 길다란 원통형에서 점차 어께가 불룩한 항아리형으로 바뀌고 있다. 또 말기에 이르면 좋은 백토를 찾지 못해 색이 선명치 않고 형태역시 무겁고 둔탁해지는 현상도 보인다. 

소개된 태항아리 중에는 놀랄만한 사실을 말해주는 사례도 있다. 일반 백성이 야밤을 틈타 태실 주변에 자기 집 태항아리를 몰래 묻은 일이다. 1486년 성종의 딸인 왕녀 복란가 태어나자 이 아기씨의 태를 강원도 원주시의 태장동에 묻었다. 1982년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태실이 발굴됐는데 이때 놀랍게도 왕녀의 태항아리 옆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항아리들이 다수 함께 나왔다.



복란왕녀 태항아리와 주변에서 함께 발굴된 도자기들

이들은 15세기 초에서 17세기 제작의 것까지 다양하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당초 복란 왕녀의 태실 자리는 고려 왕족이 점찍은 명당 자리를 다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복란왕녀의 태가 묻힌 이후 다시 100년 사이에 누군가가 한 밤중에 명당의 기운을 얻고자 밀장을 감행했음을 말해준다.

목숨을 건 이 밀장의 대가가 어땠는지는 당연히 알 수 없다. 명당을 찾아 왕가 계승자들의 태를 묻은 조선의 이씨 왕조는 519년 동안 유지됐다. 그 긴 세월이 명당 풍수의 덕인지 어떤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장례 못지않게 엄숙, 정중한 장태(葬胎) 의례를 고수한 덕분에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있는 특별한 문화유산을 하나 더 지니게 된 것은 사실이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4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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